구례 운조루
지정번호 | 중요민속자료 제8호
지정연도 | 1968년
소재지 |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건립시기 | 1776년(영조 52년)
운조루란 이름은 도연명陶淵明의 시詩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라는 칠언율시에서 머리글자만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영조 때 유이주(柳爾胄)가 낙안군수로 있을 때 건축했다.
큰사랑채 대청 위의 상량문에 따르면 영조 52년(1776)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조선 후기 귀족 주택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는 남아 있는 몇 안되는 건축물이다.
-자형 행랑채, ㅜ자형 사랑채, ㄷ자형 안채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사당과 연당이 남아 있다.
집을 지 은 12년 후에 유이주가 작성한 <장자구처기>에 따르면
최초 운조루는 78칸집이었다.
화재와 세월로 인한 유실, 필요한 의한 복구와 증축 등의 과정이 있었다.
2007년 문화재청의 실측 조사에 의하면 현재 63칸이 보존되어 있다.
운조루의 구조양식은 기둥과 기둥 위에 건너 얹어
그 위에 서까래를 놓는 나무인 '도리'와 그 도리를 받치고 있는 모진 나무인 '장여'로만 된
'민도리집' 구조이다.
지붕은 사랑채, 안채가 이어 있으며 팔작지붕이다.
'운조루' 는 일종의 택호에 해당하는데,
원래는 큰사랑채 이름이다.
'구름 속에 새처럼 숨어 사는 집'이란 뜻이다.
운조루와 오미동은 이른바 길지(吉地)로 유명한데 길지란 지덕이 있는 좋은 집터란 뜻이다.
하지만 세상사 요행은 없는 것이고 누구나 그러하듯이
성실하게 노동하고 그 댓가로 살아가는 사람사는 이치는 동일하다.
사람 살기에 안온한 땅이란 뜻으로 이해하면 족할 것이다.
조선시대 백성이 사는 가옥의 구분은 거주자의 신분에 따라
또는 그 신분에서 오는 경제적인 능력에 따라 민가와 반가로 나눌 수 있다.
지역성이 잘 나타나는 민가와는 달리 상류주택인 반가는
상위층의 예제(禮制) 등 공통적인 가치관으로 비교적 넓은 지역에서 동질적인
평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상류주택의 경우 16세기 이후 성행한 성리학의 예제는
주거생활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었으며
지역에 상관없이 공통적인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남녀의 공간에 대한 구분이 더욱 철저해지고,
제례에 따른 독립된 제사의 공간과 제사를 하기 위하여 모여든 손님의 접객 공간이
발달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공통적인 행위도 지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으며
가옥에도 그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운조루는 사랑채에 남아 있는
상량묵서 등에 영조 52년(1776)에 창건된 기록이 명확하고
전라구례오미동가도(全羅求禮五美洞家圖-이하 가도)나
유제양의 일기 시언(是言) 등 그림이나 문헌 기록이 잘 남아 있는 호남지방에 몇 안되는
18세기 이전의 소중한 가옥이다.
더욱이 호남에 있으며, 경북의 가옥과 유사한 평면형태는
해남의 녹우당 정도일 뿐 이 지역에서는 유래를 찾기 힘들다.
이는 운조루의 창건주인 유이주의 이력에서 알 수 있다.
유이주의 고향은 호남이 아닌 경북 안동군 해안면 입석동에서 출생하여 17세 되던 해에 상경하고
그 후 28세 되던, 영조 29년(1753)에 무과에 급제한 이후부터 관직에 등용된다.
그의 관직은 낙안군수와 삼수부사와 같이
주로 지방수령 내지 대규모 국가조영사업의 책임자였다.
운조루의 창건이 시작된 연도는 1771년으로
그가 낙안군수로 재직해 있던 시절로 비록 호남에 있지만
그가 계획한 집은 그의 고향에서 살고 보던 집으로 건립한 것이다.
2022년 3월 현재, 운조루의 안채 영역은 보수공사 중이다
운조루가 위치한 오미동五美洞 은
지리산의 노고단이 진산인 조산이 되고 노고단에서 남쪽으로 빠져 내려와 형성된
형제봉이 주산이 된다.
앞으로는 넓은 들이 펼쳐지고 들 앞에는 섬진강이 있으며
섬진강 건너 오봉산이 안산이 된다
그 너머 계족산이 조산이 된다.
동쪽으로는 왕시리봉이 좌청룡이 되며 서쪽으로 천왕봉이 우백호가 된다.
이로서만 보아도 앞으로 물이 흐르고 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진
배산임수의 명당터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처럼 운조루터는 오래전부터 금귀몰니金龜沒泥의 길지로 알려져 왔으며
운조루 영건시 거북돌이 출토된 점에서 널리 알려졌고
집안의 가보로 전해져 오고 있으나 근래에 도난으로 없어졌다.
거북돌을 넣어 두었던 함의 뚜껑에는 집을 짓기 시작한 해인 1776년에 개기 때에
출토되었다고 그 연유를 적고 있다.
창건주인 유이주는 운조루를 지을 당시 낙안군수를 역임한 후이고
상주영장을 지내는 시점이었으므로 이 지역의 풍수적인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며
그러한 정황은 앞서 언급한 삼수공행장에서도 잘 나타난다.
운조루에 소장된 호구단자 건의 유물을 통해 보면
1774년에는 토지면 구룡정리에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룡정리 마을은 현재 파도리로서 유이주의 아들인 유덕호의 처가가 있던 곳이다.
즉 이곳에 임시로 터를 잡았다가 운조루가 완성되는 1776년에 오미동으로 옮겨
정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운조루는 1776년에 지어졌으며 창건당시의 규모는
사당과 안채, 안채전행랑, 큰사랑채, 중간사랑채, 바깥사랑채,
외행랑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당을 중심으로 본다면 안채 안마당, 사랑채 앞마당, 안채 전행랑 앞마당이
품(品)자형을 이루는 배치를 하고 있다.
바깥행랑채 앞으로는 바깥마당은 없으며 바로 긴 연못이 가로놓여 있다.
초창 때의 78칸 규모는 1861-1916년 사이에
안채 남행랑에서 2칸이 철거되고 바깥사랑채인 외사 4칸과 대문 양쪽 동서장행랑 6칸,
동족침사 3칸 서협랑 3칸을 합해 18칸이 소실되었다.
따라서 이 때 60칸 규모로 축소되었고
이는 현재의 규모와 거의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현재의 모습은 대체적으로 1861년과 1916년 사이에 형성된 모습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그 이후로 규모와 형태가
줄거나 변형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초창 때와 달라진 것은 앞에서 열거한 18칸의 건물들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 규모와 모습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비교적 초창 때의 원형이 잘 남아있는 조선후기 상류주택이라고 할 수 있다.
번와(기와 교체)와 수리 공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원형의 유지 및 창건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하는 문제는 운조루의 과업으로 남아 있다.
이것은 운조루사람들 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방정부, 문화재청 등의 관련 기관 및 단체가 함께 나누어야 할 몫이다.
운조루는 류이주님이 유배를 당하는 불우함을 잊기위해
대구에서 구례를 찾아와 말년을 은둔할 심산으로 지은 집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집터를 잡아 상량도 하기 전에
다시 나라의 부름을 받아 영달이 시작되었고 그 자손들도 계속 초창기의 복록을 유지하였으므로
지리산록 명지 중의 산 증거처럼 풍수사들의 호기심을 자극해왔다.
국운이 기울던 구한말 때부터 풍수지리명당을 믿는 사람들이 옮겨오기 시작했지만
일본제국에 나라를 빼앗긴 일본식민시절 이곳을 찾아 온
이들에 의해 두 동네가 생겨날 정도로 류씨일가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일반이 생각하는 것처럼 고관대작이 나온 집안은 아니라는 사실도 흥미를 끈다.
이웃과 나누고 성실하게 노동하는 것,
그것이 바로 상생의 발복이다.
( 이상 글 출처 : 운조루 홈페이지 www.unjoru.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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