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4. 문경 <화장암 홍매> (2022.04.09.)
문경의 운달산 중턱에
금선대와 김룡사의 중간쯤에 있어서
중암이라고 불리던 호젓한 암자가 있었는데
영조34년에 백련화상이 중건하여 화장암華藏庵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영조44년에 영파성규 화상이 스님들의 진영을 모신 영각을 건립하였고
현존하는 건물로는 정문과 법당 및 요사채가 남아있다
화장華藏이란 '부처의 진리로 장엄한 세계'를
말한다고 한다
2019년에, 우연히 운달산 깊은 산속 화장암에
좋은 매화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눈이 채 녹지 않은 산길을 1시간이나 올라서 찾아 갔었다
그러나, 홍매는 전혀 피지 않았고 스님도 계시질 않았기에
2주 후에 다시 방문하여 만개한 <화장암 홍매>와 대면할 수 있었다
그 때는 화장암에 계시다는 불휴당 스님은 뵙질 못했었다
불휴당 스님은 문경 봉암사에서 참선하다가
30대 시절에 이 곳으로 들어와서 불상 하나 없고 행자나 신자도 없는 이 암자에서
무려 40년 간 홀로 수행하고 계신다 한다
그래서 문경 화장암은 사월 초파일에도 연등 하나 걸리지 않고
신자 한 명 찾아오지 않는 참선도량이라고 한다
2021년 새봄에 다시 화장암을 방문했더니
<화장암 홍매>는 이제 막 피기 시작해서 실망을 금할 수 없었지만
스님이 암자에 계셨다
“매화를 보려면 하동이나 광양 매실마을로 가야지 여길 왜 왔누?
세진루 앞 홍매는 아직 안 피었으니까
장독대 옆에 활짝 핀 어린 홍매라도 구경하고 가던지......”
“스님, 화장암 홍매는 몇 살 정도 되었습니까?”
“내가 여기 들어온 지가 47년 전인데
그 2년 후에 경주 기림사에서 남는 묘목을 얻어 와서 심었으니
45살 정도 되었겠네”
스님 덕분에 <화장암 홍매>의 내력과 수령을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지만
속세를 등지고 참선하는 스님께 폐가 될 지도 몰라서
서둘러 암자를 물러나왔다
경주 기림사는 2020년 여름에 우연히 들런 적이 있었지만
매화는 생각지도 못 했었는데 다시 들릴 기회가 생기면
매화를 한번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제 막 진달래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산길을 내려왔다
수령 46년의 <화장암 홍매>는
고졸한 암자에 잘 어울리는 아주 옅은 분홍빛을 띄고
가지마다 꽃송이가 풍성하게 달려서 화사한 수세를 자랑한다
얼핏보면 한 그루처럼 보이지만
나이가 같은 두 그루의 홍매가 사이좋게 나란히,
요사채의 세진루 앞 축대 가장자리에 둥지를 틀고 있다
마당에서 보면 건장한 한 그루의 홍매처럼 보이고
풍성한 수세와 밝은 꽃빛으로 새봄이면 적적한 암자를 환하게 밝히면서
아직 겨울이 남아 있는 깊은 산중에 따스한 봄기운을 불어넣는다
새소리마저 잦아들고 새로 나온 봄볕이 포근한
화장암 툇마루에서 잠시 망중한에 빠져본다
담장너머 백목련이 <화장암 홍매>와 때 맞춰 활짝 만개하였고
앞산이 진달래로 물들기 시작하면서
코끝를 간지러는 바람내음마저 달달함이 묻어난다
<화장암 홍매>는 만개 후, 꽃잎을 떨구기 시작하였다
올해는 전체적으로 매화의 개화시기가
2월달의 늦추위 때문에 일반적으로 1~2주정도 늦어졌지만
<화장암 홍매>는 늦추위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고 예년처럼 제때에 꽃을 피웠고
'봄의 전령사'로서의 사명을 다하고 조용히 지고 있다
오늘은 2022년 임인년 탐매기행의 마지막 날이다
<화장암 홍매>가 지기 시작했으니
이제, 봄이 깊었다!
통상적으로, 2달 동안의 길고 행복했던 그 해 탐매여행의 마무리는
<화장암 홍매> 앞에서 그 마침표를 찍곤 하였는데,
올해는 지난 겨울에 TV를 통해서 새로 알게 된,
문경 '윤필암'을 탐매여정의 종점으로 잡았다
그래서 혼자 빈 절을 지키고 있는 <화장암 홍매>를 다시 한번 뒤돌아 보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총총히 옮겼다
화장암 가는 길
이형권 시인
가지마다 저리도 봉우리가 무성한 이유는
필경 말못할 까닭이 담겨 있겠지요
생강나무꽃이 피고 진달래가 피고
사하촌의 봄빛이 부산해지도록
짐짓 저렇게 머뭇거리는 마음은
노장스님이 애를 태우며 기다리고 있는 까닭이겠지요
마흔해 전 동안거를 마치고 행각 중에
남녘의 함월산 자락에서
동자승처럼 얻어온 매화나무 두 그루
말 벗이라도 되려나 처마밑에 심어 둔 것이
용상방의 입승처럼
어느새 헌헌장부가 되었다고 합니다.
가파른 축단위 낙수물만 스치는 자리거늘
거칠고 황량한 터를 좋아하는 노장처럼
매화나무는 아랑곳하지 않았으니
인적이 끊긴 산중에서 그 많은 밤과 날들이
자줏빛 보자기에 싸인 금선의 노래처럼
성성하였던 것이겠지요.
나무 돌쩌귀 삐걱이는 소리처럼
해토머리에 무너져내린 세진루 석단
베어낸 매화나무 가지처럼 안쓰러운데
노장스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풀을 깎고 돌축대를 고쳐 쌓는 봄날이었습니다.
다만,
올해는 떠돌이 같은 낯선 시자 하나가 들어
매화꽃 피는 낡고 빛바랜 툇마루에 앉아서
이 깊은 산중에 도착할 봄날의 첫 소식을
들뜬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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