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금시당 (2021. 11. 27.)
'2021 - 매화향기, 코로나를 넘어서 세계속으로
가을이 깊었다!
덕유산 향적봉은 벌써 첫눈이 내려 이미 설국으로 변했다는데
마지막 떨어지는 남도 가을의 끝자락을 잡기 위해 11월 마지막 주말에
밀양 '금시당'의 은행나무를 찾았다
산성산 아래 노오란 은행나무가 눈부신 곳!
이번 봄에 <금시매>를 보러 두 번이나 들렀던 밀양강 언덕 위,
'금시당'이다
금시당 앞뜰에는 수령 210년의 매화 <금시매今是梅>와
수령 440년의 은행나무가 있어서
봄.가을로 밀양강을 향기롭게 물들이고 있다.
담장너머로 용호에 몸을 담그고 있는 은행나무는
'금시당(今是堂)' 이광진 선생이 직접 심은 나무로 알려져 있으며
수고 22m, 나무둘레 5.1m의 밀양시 보호수로서
항상 적막하던 금시당과 백곡재를 샛노란 황금빛 세상으로 뒤덮어
만추의 절정으로 치닫게 하고 있다!
반 년만에 다시보는 <금시매>는
지난 봄날의 청아했던 꽃잎과 향기는 꿈속처럼 아득하지만
언제나 그 자리에서, 다가올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
이 가을의 주인공은 은행나무이지만
그 은행나무가 찬 바람에 잎을 모두 떨구면
닥쳐올 황량한 겨울 강변에 홀로 당당하게 선 <금시매>는
시리고 어두운 겨울을 뚫고 꽃잎을 여는 뜨거운 열정으로
새로운 희망의 봄을 다시 피워 낼
기나 긴 꿈을 꾸게 된다!
지금 세계는 2020년에 휘몰아친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하여
아주 극심한 몸살을 앓고 있는 중이다
우리나라 역시, 이세계적 대재앙에 K-방역으로 슬기롭게 대처하며
국민 모두가 2년째 고군분투를 하고 있는 중인데
세계가 한국의 K-방역을 주목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15년간 기자생활을 한 영국의 작가이자
언론인인 마이클 브린이 쓴 <한국인을 말한다>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고한다
“일 하는 시간은 세계 2위이고 노는 시간은 세계 3위인 잠 없는 나라,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이자 아직도 휴전 중인 나라,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인 일본을 발톱사이 때만큼도 안 여기는 나라,
여성부가 존재하는 유일한 나라,
지하철 평가 세계1위로 청결함과 편리함이 최고인 나라,
가장 단기간에 IMF를 극복해 세계를 경악시킨 나라,
미국 여자프로골프 상위100명 중 30명이나 포진하고 있는 나라,
세계 4대 강국을 우습게 보는 배짱 있는 나라,
인터넷·TV·초고속 통신망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나라
......
국력으로 치면 50년 전 끝에서 2~3번째였던 나라가
이제 세계 10위권을 넘보고 있다.
IT강국이라는 타이틀은 아무나 가지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180년을 주기로 한국의 기운은 상승하는데
지금이 바로 그때다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서로 이해하고 단합만 잘하면 충분히 극복하고
도약할 것이다”
20세기 말 K-팝(1999)을 시작으로
K-드라마(2002), K-뷰티, K-컬처, K-푸드로 대표되는 “한류 열풍”은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인 트렌드로 자리 잡은 지 이미 오래되었고,
뿐만 아니라 K-방역이라는 모범적인 방역시스템으로
팬데믹을 슬기롭게 대처하는 방역 선진국으로서의
위상도 세계에 함께 떨치고 있다
우리는 지금껏 2년 가까이
코로나와 전쟁을 치르면서 숱한 고비를 잘 헤쳐 왔다
정부와 국민, 의료진 모두 힘을 모아서 힘겹게 여기까지 왔지만,
또 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확진자가 다시 늘고 있고 오미크론 변이까지 겹쳐서
매우 엄중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이 마지막 고비를
국민들의 흔들림 없는 신뢰와 단합으로 반드시 극복하고
'위드 코리아'의 일상회복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 국민들이 다시 한 번 힘을 모아야 하는
아주 중요한 전환점 앞에 지금 우리는 서 있다
2021년 신축년의 탐매기행은
두 해째,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사태의 여파 때문에
지난 해처럼 탐매여행을 자제하고 삼가하는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그래서 지난 해 수준의 답사여행으로 그쳤지만
약 10년 동안 이어졌던 지난 탐매여행을 찬찬히 뒤돌아보고
향후의 탐매계획의 방향과 대상도 재설정해보는
숙고의 시간도 함께 가졌다
이제 겨울은 바로 문밖까지 와 있다
어둡고 긴 시련의 겨울은
매화 뿐만아니라 우리 국민들에게도 닥치겠지만
엄동설한의 인고의 시간 속에서도 희망과 새싹을 키워서
누구보다도 먼저 꽃을 피워서 새봄을 여는 매화의 숙명처럼
우리 한반도에 봄은 기필코 올 것이고,
그 고난의 시간이 어둡고 길수록
그 봄은 더 찬란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21. 11. 30.
001. 김해박물관 매화 (2021.01.30.)
올해 첫 매화와의 만남이다!!
매화를 보기 위해서
김해박물관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인터넷에서 확인 한대로 김해박물관 뒷편, 양지바른 낮은 언덕에
아직 어린 매화 몇 그루가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장한 꽃잎을 피웠다
벌써 매화가 핀 국립김해박물관은
고대국가의 하나인 가야의 문화유산을 집대성하기 위해
1998년 문을 열었다.
가야의 건국 설화가 깃든 김해시 구지봉 기슭에 자리 잡은 국립김해박물관은
가야의 문화재를 모아 집중적으로 전시하고 있으며,
부산·경남 지역의 선사 시대 문화상과 가야의 성장 기반이 된 변한(弁韓)의
문화유산을 전시하고 있다.
가야는 다른 고대 국가들에 비해 역사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유물·유적을 발굴함으로써 가야사를 복원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국립김해박물관은 다른 국립박물관들과 달리
고고학 중심 전문 박물관으로 특성화되어 있다.
박물관을 설계한 건축가 장세양 (1947 ~ 1996)씨는
설계의도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립김해박물관은 사적지인 구지봉 자락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렇기에 역사적 장소와 문화적 상징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박물관 건물이 주변과 잘 어우러져야 합니다.
하지만 네모난 형태로 박물관을 만들면 주변과 조화를 이루기가 힘듭니다.
박물관은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는 공간입니다.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기 위해 둥그런 울타리를 먼저 생각해 냈습니다.
그리고 둥그런 울타리 안에 네모나게 공간을 나누었습니다.
원과 사각형이 만나고 남은 바깥 부분은 주변과 조화를 이루게 했습니다.
박물관 정문을 통해 도시 김해와 만나게 하였고,
박물관이 구지봉 공간에 녹아들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로써 김해라는 현재와 구지봉이라는 과거가 만나는
박물관이 완성되었습니다.
둥그런 울타리 안에 사각형으로 솟아오른 박물관 전시동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철판이 색이 변하도록 설계하였는데,
이는 철기문화와 시간의 흐름을 상징합니다"
구지봉 기슭에 안긴 김해박물관에서
매화를 볼 수 있는 곳은 3곳정도 되는 것 같다
박물관 뒷쪽에서 구지봉으로 올라가는 산책로 입구,
박물관 바로 뒷쪽의 낮은 언덕, 그리고 빔프로젝트가 있는 파고라 앞 산책로에서
매화들을 만날 수 있다
대부분 10~20년 내외의 어린 매화들로
박물관 신축 전후에 심겨진 매화들로 추정되는데
바로 인근의 김해공고 <와룡매>와 함께 개화시기는 김해지역에서
가장 빠른 것으로 보인다
정상이 너무 낮고 평범해서 놀란
구지봉을 여유있게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에
박물관 야외광장 포치에서 드레스 사진촬영 중인 애기가족을 만났다
아직도 엄동설한 섣달인데
드레스만 달랑 입고 촬영중인 가족을 보니 염려스러웠지만
가야의 건국설화가 서려있는 구지봉아래
햇볕이 가장 잘 드는 곳에 자리를 잡은 박물관의 지리적인 영향으로
찬바람은 막아주고 역사의 온기를 품고 있는 듯
그리 춥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직 추위가 매서운 겨울이 한창이고
코로나 19의 기세도 좀처럼 꺽이지 않고 있지만
김해박물관에는 매화가 피기 시작하였고
봄은 오늘도 저만치 다가오고 있다
2021. 01.30.
002. 순천 금둔사 <납월매> (2021.02.06.)
새벽에 남해 창선면 추도에서
모처럼 황홀한 일출을 보고 내친김에 매화를 보러
순천 금둔사로 방향을 잡았다
며칠 전 인터넷에서 금둔사 <납월매>가
12월 말쯤에 벌써 100송이 정도 꽃을 피웠다는 상당히 빠른
개화소식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납월홍매> 6그루 중에서,
화장실 앞에 있는 여섯째 나무만 어느 정도 개화가 진행되었고
나머지는 아직 필동말동 애매한 모습들 이었다
더욱이 꽃잎을 애써 피운 <납월매>도
추위에 꽃잎이 얼어버려서 벌써 시들고 색깔도 많이 바랬다
3년 만에 다시 찾은 금둔사에는
부산 UN공원의 홍매와 거제도 구조라 초등학교의 <춘당매>를 제외하면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피는 매화로 유명한 <납월홍매>가 있기 때문에
전국의 탐매객 들이 이른 봄이면 항상 남녘의 금둔사를 주시하게 되는
<납월홍매>의 성지와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개화시기는 매우 빠르지만 그 날자는 해마다 들쑥날쑥하여
그 적기에 맞추어 찾아가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고
그래서 항상 실망도 많이 하게 되는 탐매처가
금둔사이기도 하다
금둔사金芚寺는 ‘부처가 싹을 틔우는 절’이란
심오한 뜻을 가지고 있는 순천의 작은 사찰이다.
바로 옆 조계산 자락에 워낙 유명한 선암사와 송광사가 턱 버티고 있어
비교적 덜 알려져 있지만 그래도 아는 사람은 안다.
특히 사진작가들 사이에선 매화와 차로 유명한 절로서,
해마다 2월이면 <납월매>를 보려고 전국에서
카메라를 메고 몰려든다.
해발 679m의 금전산 서쪽에 위치한 금둔사는
신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 보물인 금둔사지석불비상과 금둔사지 삼층석탑으로 보아
금둔사의 창건연대를 통일신라 때로 추정해오다가
최근에 순천대학교 박물관측의 발굴유물을 토대로 9세기경 창건된
사찰임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정유재란(1597) 때 가람이 완전히 불에 타서
금둔사는 오랜 세월 폐사지로 남아 있었는데,
1979년에 이르러 완전 도굴되어 흩어져 있는 삼층석탑을 복원하고
1984년부터 지허 선사가 대웅전과 일주문 선원, 약사전, 요사채,
홍교 등을 복원 중창하였다
금둔사를 다시 일으키면서 지허 선사가
산 아랫마을 낙안읍성 근처의 조씨 면장 집에서 600살의 나이로 고사한
<납월매>의 씨앗을 받아와 1985년에 금둔사 경내에 심었는데,
그 씨앗 중에서 6개가 살아남아서 오늘까지 <납월매>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금둔사의 홍매화가 <납월매>로 불리는 까닭은
엄동설한인음력 12월에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음력으로 12월을 납월(臘月), 혹은 섣달이라고 하는데,
온 세상 모두가 얼어붙어 있는 엄동설한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매화가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기와 인내가 필요하다.
그래서 막상 꽃을 피워도 이내 꽃잎은
아직도 매서운 추위에 바로 얼어서 시들어 버리고,
꽃으로서의 생명을 다하고 만다.
꽃으로서의 화사함이나 우아한 자태는 찾아보기 힘들고,
오히려 메마르고 퇴색된 꽃잎만 남기고
하루살이처럼 장렬히 사라져 간다.
‘유아독존’
- 세상 모두가 숨죽인 눈 속에서 홀로 피어나지만
이내 얼어붙어 시들어 버리는 그 쿨한 모습은 이른바 ‘상처뿐인 영광’으로서,
오직 이 혹한에 꽃을 피워냈다는 강인한 정신과 맑은 기품만
오래토록 우리 곁에 향기로 남아 있을 뿐이다.
<금둔사 청매>
금둔사의 대웅전 근처에
제법 오래 된 청매화 2그루가 있다
<납월매>가 만개한 뒤, 지기 시작할 무렵에야
꽃망울을 열기 시작하여 금둔사의 봄을 이어가지만
<납월매>의 유명세에 가려
만개한 모습을 보는 기회를 항상 놓치게 되는 매화가
바로 <금둔사 청매>이다
금둔사 <납월홍매>는
꽃잎의 크기가 상당히 작은 분홍색의 겹꽃으로서
20~30개의 꽃잎들이 겹겹으로
지름 1cm 안팎의 크기로 가지에 달리는데 반하여
<금둔사 청매>는 흰꽃에 푸른 꽃받침을 가진
100년생 내외의 꽃잎 5장 홑꽃 청매로서
청매 특유의 아주 우아한 자태를 자랑한다
2021. 02. 06.
남해 창선면 추도 일출 (2021. 02. 06.)
003. 양산 통도사 <자장매> (2021.02.11.)
설날연휴 첫 날에
<자장매>를 보러 통도사로 달려갔다
원래는 연휴 말미에 느긋하게 다녀올 계획이었는데
SNS 상으로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올해 <자장매>의 개화가 무척 빨라서 벌써 만개 직전이라는 정보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져서 하루라도 더 빨리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소문대로 <자장매>는 만개 직전의 개화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예년의 <자장매> 개화시기와 비교해 보면 개략 2주 정도 빠른 상태이지만
그런데 여러모로 좀 이상했다
일반적으로 매화의 개화시기는
소한, 대한을 거쳐 입춘을 전후하여 그 해의 날씨와 기온에 따라서
2~3주 내외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올겨울은 연초에 30년만의 강추위가 몰아쳐서
예년보다 더 추웠기 때문에 올해의 매화 개화시기는
2~3주 늦어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에 맞다
그런데도 <자장매>의 개화시기가 오히려 빨라진 것은 무슨 연유일까?
올겨울에 30년만의 강추위가 몰아쳤지만
그 반면에 봄날보다도 더 포근했던 이상고온의 따뜻한 날씨도 많았었다는 팩트에서
그 해답을 찾아본다면 무리가 있을까?
날씨와 기온은 두 가지 모두 식물의 개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지만
통도사의 <자장매>는 추위보다는 온기에 더 강렬하게 반응하는
강한 DNA와 의지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고 싶다
그러나 그 대가는 혹독했다
맹추위 속에서도 한 조각의 불빛과 온기에 의지해 꽃잎을 열었지만
금새 다시 밀어닥친 맹추위와 비바람에 꽃잎이 꽁꽁 얼어버려서
꽃이 피자말자 이내 시들고 꽃잎은 퇴색되고 떨어져 버리게 된다
올해 2월 11일 <자장매>의 모습이 그랬다
우리나라 홍매화의 표준 색깔이라는 고운 분홍빛은 생기를 잃었고
아직 만개 전인데도 벌써 반 정도가 이미 시들었고, 꽃잎도 많이 떨어졌다
이른바 ‘상처뿐인 영광!’이다
매화가 북풍의 칼바람 속에서도
고드름처럼 얼어 붙은 가지목을 지키며
불빛 하나 없는 눈 덮힌 산과 들에서 온기 없는 별빛을 받으며
인고의 시간을 버텨내는 것은
얼어 붙은 대지를 녹이고 혹독한 추위를 걷어내고서
만물이 소생하는 봄의 세상을 열어야 하는 '선구자적 역할' 때문이다
그런 뒤에 초연히 시든 꽃잎을 떨구어야
비로소 봄이 시작된다
그 옛날 선비들이 매화를 존중하고 사랑했던 가장 큰 이유는
매화의 여러 덕목 중에서도 이 ‘선구자적 역할’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선구자적 역할’의 대표적인 매화가
순천 금둔사의 <납월매>이고
코로나 19로 어려운 올해는 통도사의 <자장매>가 그 ‘선구자적 역할’을
훌륭하게 이어받았은 것으로 보인다
‘통도사의 자장매가 꽃을 피워야
한반도에 봄이 온 것을 공식적으로 인증한다!’는 말이 있듯이
'한반도의 봄 전령사'로서의 <자장매>의 개화는 의미가 특별하고
그 역할을 가리켜 어느 시인은
‘대자연이 쓰는 시詩의 첫문장’이라고 노래했다
긴 겨울의 터널 끝에 얼핏 보이는 작은 불빛처럼
얼음장 속에서도 키워 낸 불씨와 온기를 한반도에 전해서
마침내 봄이 멀지 않았다는 '희망 전령사'로서의 그 선구자적 역할는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고 할 것이다
영남알프스의 한 축인
영축산 아래에 자리 잡은 불보사찰 통도사에
수령 370년이 넘는 홍매화가 1그루 있다.
스님들의 영정을 보관하는 영각 앞에 자리 잡은 이 홍매화는
‘우리나라 홍매의 표준’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고운 색과 자태가 빼어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매화중의 하나이다
아이돌급의 높은 인기를 누리는 이 홍매는
신라시대 때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율사의 이름을 따
<자장매>라고 불리는데
매화나무 아래에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있다
“임진왜란 후 통도사 중창을 발원한 우운대사는
먼저 대웅전과 금강계단을 축조하고 인조23년(1643년) 이후
참회하는 마음으로 역대 조사의 진영을 모실 영각(影閣)을 건립했다.
상량보를 올리고 낙성을 마치니 홀연히 매화 싹이 자라나서
해마다 섣달 납월에 연분홍 꽃이 피어 사람들은 이를
자장스님의 이심전심이라 믿었다.
매화는 매서운 추위가 뼛속까지 사무칠 때 향이 더욱 짙어진다.
그 특성이 수행자의 구도행과 닮았고 자장스님의 지계 정신을 표현한다 해서
이를 자장매화(慈藏梅花)라 하였다.”
통도사에는 자장매 외에도 절 입구 종무소 앞에
홍매화 2그루가 더 있다
그래서 <세가지 색의 분홍>을 비교하며 감상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곳이 통도사이기도 하다
천왕문에 들어서면 먼저 보이는 우측 매화가
수령 150년 된 진분홍 겹꽃의 <영취매>이고,
좌측이 수령 50년 정도 된 <통도매>인데 홑꽃의 연한 분홍색으로
담백하고 단아한 느낌을 준다
<통도매>
004. 거제 구조라 <춘당매> (2021.02.13.)
한려해상국립공원을 품은 거제도는
해안선이 길게 발달하여 곳곳에 좋은 해수욕장이 많이 있는데
일운면의 구조라 해수욕장은
수심이 완만하고 호수처럼 조용한 내륙형 해안지형으로서
해수욕장으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또한 모래가 부드럽고 수온도 적당해서 많은 피서객들이 찾고 있다
주변에는 조선 중기에 축성한 구조라성지와 ‘샛바람 소리길’ 산책로가 있고,
그리고 학교 바로 앞에는 요즘 인기 높은 카페 '외도널서리'가 있다
그리고 유람선을 이용하면 내도 및 외도뿐만 아니라
해금강까지도 관광할 수 있다.
올해초, 전국이 30년만의 강추위로 꽁꽁 얼어있던
1월 7일 이른 아침 거제시에 흰눈이 내리던 날,
옛 구조라초등학교의 <춘당매(春堂梅)>가 꽃망울을 터트렸다고 한다
거제도 구조라초등학교의 <춘당매>의 개화시기는
1950년대에는 2월 중순 경, 2천 년대 초반에는 1월 하순 경이었지만,
요즘은 1월 중순, 초순 경으로 지구온난화의 영향인지
조금씩 그 개화시기가 점점 당겨지고 있는 추세인데
거제도의 <춘당매>는 제주도를 제외하면 전국에서 가장 빨리 피는
매화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빨리 피는 매화의 대명사로는
금둔사의 <납월매>와 부산 UN공원의 홍매 그리고 통도사의 <자장매> 등의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고 있는데 각종 자료마다 차이가 많아서
몇 년 전에 그 개화 순서를 확정하기 위해 작정하고 관찰해 본 적이 있었다
간혹 예외는 있지만 부산 UN공원의 홍매, 거제도의 <춘당매>,
금둔사의 <납월매>, 통도사의 <자장매>의 순서로 보통 꽃을 피우고 있지만
결론적으로 1등은 거제도의 <춘당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UN공원의 홍매는 가장 일찍 꽃을 피우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너무 어려서 매화의 풍모와 품격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예선 탈락이고,
금둔사 <납월매>는 간혹 한두 그루는 <춘당매>보다 개화시기가 빠르기도 하지만
전체 나무군집으로 판단하면 <춘당매>의 승리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본다
그런데 구조라 <춘당매>가 1등을 차지한 것은
주변 환경과 지리적인 잇점이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다
일운면의 구조라초등학교는 거제지역에서도 따뜻한 남단에 자리를 잡았고
바다 쪽에서 몰아치는 해풍은 먼 바다의 내도와 외도가 일차적으로 걸러주고
차가운 북풍은 북병산 줄기가, 거센 동풍은 예구리의 망산이 막아주고 있어서
<춘당매>의 개화를 지원하고 있는 든든한 우군이 되고 있다
해수욕장 바로 위 언덕에 자리잡은 구조라초등학교는
1941년 설립되었으나 1999년 50회 졸업생 배출을 마지막으로
일운초등학교에 통합되면서 문을 닫았고 지금은 폐교가 된 상태의 학교이다
현재는 거제교육지원청 소유로서 구조라 마을회가 유상으로 임대해
체육시설로 활용하고 있는데 교문 맞은 편 언덕에,
거칠고 시린 바닷바람을 견디며 오늘도 학교를 지키고 있는
매화나무 <춘당매(春堂梅)> 4그루가 있다
한동안 <춘당매(春堂梅)>의 이름과 수령 때문에 논란이 있었다
지방신문에 “일제시대에 ‘춘당’이라 불린 일본 신사가 구조라 삼정마을에 있었고,
신사가 없어진 뒤에도 그 자리를 ‘춘당’이라 불렀고
이를 빌려와 <춘당매>라 이름 짓고 나무 앞에 팻말도 세웠다”라는
오보가 있었다
그러나 마을 주민들의 노력에 의하여
“일본 신사에 대해 조사해보니 신사는 일반적으로 이름에
‘당(堂)’이 아닌‘궁(宮)’이나 ‘사(社)’를 붙이기에 ‘춘당’이 일본신사의 이름이었다는 것은 사실무근이고
구조라 마을 어귀에 ‘춘당’이라 불리는 가파른 언덕이 있었는데,
‘봄을 맞이하는 자리, 봄이 머무는 자리라는 의미’로서
이른 봄 꽃을 틔우는 매화와 잘 어울려 ‘봄을 맞는 자리에 피는 매화’라는 뜻으로
‘춘당매(春堂梅)’라 이름지었다”는 것으로 다시 정정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아울러 <춘당매>의 수령에 대한 부분도 나름 정리가 되었다
지금도 나무아래 안내판에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빨리 피는 매화로 알려져 있으며
...... 수령은 120~150년으로 추정되며,
현재 구조라 초등학교 교정에 4그루, 마을 입구에 1그루가 서식하고 있다“라고
적혀 있지만 이것은 앞으로 수정이 필요한 부분으로 밝혀졌다
‘지난 1970년 무렵에 공곶이수목원의 강명식 대표가
설중매 5그루를 구조라초등학교에 기증하였고 작고한 이봉래 교장 선생과 학교 직원이
언덕에 4그루, 마을 입구에 1그루를 심었다’라고 근래에 관계자의 증언이 나옴으로써
<춘당매>의 수령은 약 60년 내외로 보는 것이 적절한 것으로
새로이 판명되었다
구조라초등학교와 <춘당매>는
현재 거제교육지원청 소유로 되어 있다
학교 운동장은 구조라 마을회가 유상으로 임대해서 테니스장, 게이트볼장 등
주민들의 체육시설로 활용하고 있고,
학교 부속시설인 <춘당매>는 폐교가 된 후로 오랫동안 방치되다가,
10년 전쯤부터에야 마을 주민들의 관심과 보살핌을 받기 시작했지만
태풍에 그루터기가 부러지고 날로 쇠약해지고 있어서
해당 관리청의 배려와 지원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구조라의 <춘당매>는
학교 안에 4그루, 마을 입구 버스정류자에 1그루가 있다
학교 안의 담장 끝에 있는 네 번 째 매화는 10년 전쯤에 처음 봤을 때 부터
수세와 가지가 빈약했었지만, 나머지 4그루는 상당히 건강한 모습이었는데
오늘, 3년만에 다시 찾아와보니 그 사이에 나무들이 많이 상했다
첫 번때 나무는 중심 줄기의 윗부분이 완전히 부러져버렸고
세 번째 나무는 아랫 부분 큰 가지 하나가 꺽여 버렸고,
그리고 버스정류장 곁의 다섯 번째 매화도 큰 줄기가 부러져서
당당하던 자태를 잃고 왜소하고 볼품없는 모습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여름철에 올라오는 태풍의 피해로 짐작되는데
수 백년 묵은 고매들이 태풍의 영향으로 종종 가지가 부러지기도 하지만
아직 한창인 <춘당매>가 상처 투성이로 변해가는 것은
그만큼 태풍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있는 바닷가의 입지적 요인이 클 것이다
이처럼 특수한 환경적 이유로 <춘당매>는 더 과학적인 관리와
보존이 필요한 셈이다
<춘당매>의 가치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다
매화 애호가들은 거제의 보물일 뿐만아니라 나라의 보물이라고 여길 것이고
구조라초등학교 졸업생들은 학교의 산 증인이자, 역사로 여길 것이고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매화나무 단지'도 아니고 '몇 그루'에 불과한데
왜 그렇게 말이 많은 것인지 의아하게 여길것이다
판단은 <춘당매>의 운명을 쥐고있는 교육청의 몫이다
어떤 사업이 학교와 지역사회를 위한 가성비 높은 투자와 지원인지?
그리고 미래지향적이면서 교육적인 효과가 높은 <춘당매>의 활용방안은 무엇인지?를
결정해야만 하는 시간이 우리에게 그리 많이 남아 있지는 않은 것 같기에
우려의 심정 또한 지우기가 어렵다
푸르고 시린 겨울바다를 마주보고
옛 초등학교 교정과 마을 입구 언덕에 턱 버티고 있는 <춘당매> 5그루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빨리 피는 매화로서
어두운 겨울을 걷어내고 한반도에 봄을 가장 먼저 전해주는
'봄의 전령사이자, 희망의 메신저'이다
초등학교는 이미 폐교가 되었고
아이들의 재롱과 웃음소리마저 끊어진 교정의 적막함과
당국의 무관심뿐만 아니라 살을 파고드는 차가운 해풍 속에서도
구조라의 <춘당매>는 어김없이 해마다 1월이면
새하얀 꽃망울을 터뜨리고 끊어질 듯 말 듯한 고혹적인 향기를
해풍에 실어 전국으로 보낸다
그래서 거제도는 1월부터 봄이 시작된다.
005. 김해건설공고 <와룡매> (2021.02.20.)
우리나라의 토종 매화로서
매화의 연륜과 품격을 갖춘 고매화는 현재, 약 200여 그루 정도가
전국 각지에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중에서 약 70%가 전남과 광주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데
특별히 호남지역의 토종 매화 다섯을 엄선하여
‘호남 5매梅’라고 부른다
장성 백양사의 <고불매古佛梅>, <선암사의 선암매仙巖梅>,
담양 지실마을의 <계당매溪堂梅>, 전남대의 <대명매大明梅>,
고흥 소록도의 <수양매垂楊梅>가 여기에 해당된다
영남지역을 대표하는 매화로는 '산청 3매梅'와 '안동 2매梅‘가 유명한데,
남사예담촌의 <원정매元正梅>, 단속사지의 <정당매政堂梅>,
산천재의 <남명매南冥梅>가 ’산청 3매'이고
안동 도산서원의 <도산매陶山梅>와 하회마을의 <서애매西厓梅>가
'안동 2매‘에 속한다
그리고 2007년 문화재청은 오랜 세월 우리 생활·문화와 함께해온
매화 4그루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바 있다
장성 백양사의 <고불매(천연기념물 제486호)> 강릉 오죽헌의 <율곡매(484호)>,
구례 화엄사 <길상전 앞 백매(485호)>, 순천 선암사 <선암매(488호)>등이
국가문화재로서 나라의 보호를 받고 있다
그 밖에 양산 통도사의 <자장매>, 화엄사의 <흑매>, 전주 경기전의 <녹약매> 등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명매의 반열에 올릴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열거한 고매들 중에서
도산서원의 <도산매>와 산청의 <정당매> 그리고 소록도의 <수양매>는
애석하게도 근래에 완전히 고사하고 말았다
나머지 고매들도 수령 350년에서 700년까지 워낙 나이가 많은 고목들이라서
항상 동해凍害나 태풍의 위협과 피해 앞에 놓여있고
해마다 힘겹게 꽃을 피우고 있다.
경남지역에 '산청 3매', 양산 통도사의 <자장매> 외에
아직 연륜은 낮지만 김해건설공고에 <와룡매> 군락지가 있다
대부분의 매화들이 전통 깊은 사찰이나 산 속에 자리하고 있지만
김해건설공고의 <와룡매>는 김해 구산동 도심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어서
접근성이 아주 뛰어난 것이 큰 장점이다
인근에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 국립김해박물관, 구지봉, 대성동고분, 봉황대공원 등
가야의 천년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유적이 두루 산재해 있고
부산∼김해 경전철의 박물관역에서 불과 100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서
교통뿐만 아니라 가야역사문화의 인프라가 잘 갖추어진
김해건설공고에 <와룡매> 군락지가 있다
경남 유일의 도심 매화 군락이다
김해건설공업고등학교 교정에는
수령 100년 정도의 고매(古梅)들이
교문에서부터 본관까지의 약 200m의 '매화로' 양 옆으로
81그루나 도열해 있다.
오래된 나무들이 줄기가 휘고 구부러져 있어서
용이 하늘로 날아가는 듯, 땅을 기어가는 듯한 형상으로
마치 무리를 지어 용트림하는 모습이어서 <와룡매>라고 불린다
81그루의 매화나무 중에서
백매가 63그루, 홍매가 18그루라고 하는데 대부분 90년 이상 된 나무들이고
특히 구지호 연못 주변의 10여 그루가 가장 오래된 나무로 알려져 있다
해마다 <와룡매>가 만개하는 2월 말쯤 주말이면 '매화로' 주위는
‘매화 반, 사람 반!’이라는 표현처럼 인근 대도시에서 상춘객들이 몰려와
요상하게 생긴 매화나무 밑에서 오묘한 매화향과 이른 봄을 만끽하곤 한다
이 <와룡매>들은 1927년에 김해농고가 개교할 때
당시 한 일본인 교사가 의욕적으로 매화나무를 심고 가꾸었다고 하는데
이제 백발이 된 그 일본인 교사는 몇 년 전에 학교를 다시 찾아와서
당시를 회상하면서 눈물을 지으며 <와룡매>들이 아직도 잘 자라라고 있음에 감사해하면서
일본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40여 년 전쯤인 1978년에 김해농고가 시 외곽으로 이전하고
그 자리에 김해건설공고가 들어서면서 그 이후부터는 김해건설공고에서
<와룡매>들을 관리해오고 있는데 현재 김해시 관리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전교생이 800여 명이 넘는 김해건설공고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글로벌 전문 기술인을 육성하는 건설 및 하이텍 특성화 고등학교로서
‘취업 걱정 없는 명품 학교’로 거듭나고 있는 남녀 공학의 김해지역 공립 고등학교이다
지금은 코로나 19사태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중단되고 있지만
김해건설공고에서는 36년 동안 해마다 매화축전을 개최해 왔다
매화축전은 신입생과 재학생들이 모교의 아름다움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애교심을 키우고, 교우들과 함께 교정을 거닐며 학년 초의 긴장감을 완화시키는 행사로
오랜 기간 동안 교직원과 학생들의 호응도가 높았기에
학교 측에서는 “매화 축전의 주요 행사는
학생들이 교정에 핀 다양한 매화를 주제로 사진을 촬영하고 글짓기 활동을 하도록 구성돼 있는데
특성화 고등학교이지만 학생들에게 모교의 아름다움을 일깨워 주고,
예술 활동을 통해 심미성을 고양시키는 교육적 효과가 커
매년 즐겁게 참여하고 있는 행사이다”라고 적극적으로 홍보해왔다
아울러 매화축전은 김해건설공고의 교내축제이지만
행사기간동안 지역사회에 교문을 완전히 개방하여 ‘주민 참여형 봄맞이 매화축제’로 승화시켜서
그동안 영남 지역사회의 문화창달에 기여한 바가
결코 적지 않다고 할 것이다
앞으로 김해건설공고 <와룡매> 군락지의 커다란 변화가
불가피하게 되는 일이 지난해에 있었다
김해건설공고는 지난 2004년 가야역사문화 정비사업 지구에 포함됐지만,
그동안 사업의 장기간 표류로 교육 투자가 이뤄지지 않아 어려움을 겪어왔는데
2020년에 '김해건설공고 이전' 건이 교육부 중앙투자심사를 통과했다
'가야 역사문화 환경정비사업'에 포함된 김해지역 교육시설은
김해교육지원청·김해서중·김해건설공고·구봉초교 등 4곳인데
이미 김해교육지원청과 김해서중·김해건설공고 이전이 확정됐고,
마지막으로 구봉초교 이전을 추진하고 있다
경남교육청은 2020년 설계, 2022년 공사를 거쳐 2024년 3월에
김해건설공고 이전을 완료할 계획이다
김해건설공고 이전 이후의 <와룡매> 군락지 정비계획에 대해서
아직까지 알려진 바는 없다
'가야 역사문화 환경정비사업'이라는 가야 천 년의 영광을 재현하는
역사적이고 훌륭한 문화적 인프라 속에서 <와룡매>도 이번 기회에
체계적인 보호와 관리를 통하여 김해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와룡매> 군락지로뿌리 내릴 수 있기를
정말 기대해 본다
006. 007. 밀양 <금시매> (2021.03.01. 및 2021.03.05.)
밀양의 산성산이
밀양강을 향해 흘러내리다 웅지를 튼 백곡계곡 언덕위에
금시당과 백곡재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예로부터 아름드리 잣나무들이
대규모로 숲을 이룬 깊은 골짜기로서 백곡이라고
불리던 곳이었다
뒤로는 산성산 일자봉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는 용두산(龍頭山) 능선이 내려가고
왼쪽으로는 호두산(虎頭山) 능선이 내려가는 요지로서
금시당과 백곡재는 용과 호랑이의 꼬리가 맞닿은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금시당은 조선시대 문신인 금시당 이광진 선생이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지은 건물로서
금시당(今是堂)이란 당호는 도연명의 귀거래사 내용 중
‘覺今是而昨非’ 중에서 ‘今是’를 취한 것이라 한다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오늘은 잘한 일이요
벼슬살이에 얽매였던 지난날은 잘못이었음을 깨달았다’는 의미로서
산수와 전원에서 여생을 즐긴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명종 21년(1566)에 처음 지어졌던 금시당은
임진왜란(1592)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743년에 백곡 이지운 선생이 다시 복원한 건물이고
금시당 옆의 백곡재는 백곡 이지운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철종 11년(1860)에 후손들에 의해서 세워진 건물이다.
금시당과 백곡재는 건축양식 및 규모까지 대체로 동일한데
온돌방과 마루의 배치가 반대 방향으로 자리 잡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2021.03.01. 개화상황)
금시당과 벽곡재 앞뜰에는
수령 210년의 매화 <금시매今是梅>와 수령 450년의 은행나무
그리고 마당에는 100년 넘은 백송이 있다
이광진 선생이 금시당 신축시 직접 심은 은행나무는
수고 22m, 나무둘레 5.1m의 거목으로
밀양시의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데
주변의 인기 높은 달성 도동서원의 은행나무와
경주 운곡서원의 은행나무와 비교해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품격과 자태를 지녔다고 말 할 수 있다
<금시매>는 금시당과 벽곡재의 중간지점인
2단 화계의 가장자리에 둥지를 틀고 있다
어느 쪽에도 지우치지 않는 ‘중용의 위치’에 절묘하게 자리를 잡아서
양쪽 마당을 지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금시매>의 수령은 여태껏 160년 정도로 알려져 왔지만
최근에 금시당을 방문한 수목전문가의 의견에 따르면 210년 정도가 올바른 나이라고
주인어른께서 귀뜸해 주신 적이 있었다
금시당의 주인어른은 여주 이씨 후손으로
대도시에서 생활하다가 3년 전쯤에 귀향해서 금시당과 벽곡재를 관리하면서
방문객들에게 여러 도움을 제공해 주고 계신다
운이 좋으면 커피와 떡을 대접 받을 수도 있다
주인어른이 금시당으로 귀향하시기 전에는
항상 대문이 굳게 잠겨 있었기에 관람이 어려웠던 시기가 있었는데
나도 서너 번 헛걸음을 했었던 아픈 추억이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많이 귀찮을 법도 한데
친절하게 맞아 주시는 주인어른의 모습에서
오늘날에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명문가의 높은 선비정신을
뵐 때마다 느끼곤 한다
그래서 밀양의 <금시당>은
밀양강에 살포시 내려앉은 <금시매>의 달달한 향기뿐만 아니라
손님을 접대하던 접빈객接賓客의 선비의 품격도 함께 체험할 수 있는
산 교육장이라고 말 하고 싶다
3ㆍ1절 연휴에 금시당을 올해 처음 찾았었는데
날씨도 흐렸고 아직 개화도 덜 되어서 미련이 남아
3월 5일 오후에도 퇴근길에 잠시 들렀었다
(2021.03.05. 개화상황)
008. 산청 <남명매> (2021.03.06.)
산청 시천면의 산천재山天齊는
조선 중기의 유학자인 남명 조식 선생의 유적지로서
조정에서 내린 벼슬을 모두 거절하고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여생을 보냈던 곳이다
실천유학의 대가 남명 선생이 예순 한 살에 둥지를 튼 산청,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이 자리에 선생은 산천재를 짓고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는 매화나무 한 그루를 뜰에 심고
벗을 삼았다
산천재가 있는 현 위치는 지리산 천왕봉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중산과 삼장으로 나누어 흐르다가 덕천에서 만나는 곳으로
산천재에서 바라보는 지리산 천왕봉이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으며
물 맑은 덕천강이 산천재 앞으로 흐른다
조식 선생의 유적은 두 곳으로 나뉘는데
사리絲里에는 산천재, 별묘, 신도비, 묘비가 있고
원리院里에는 덕천서원과 세심정이 있다
산천재는 선생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곳으로
명종 16년(1561)에 세웠고, 순조 18년(1818)에 다시 고쳐 지었다
규모는 앞면 2칸, 옆면 2칸의 단촐한 규모이다.
남명 선생은 영남의 퇴계 이황 선생과 쌍벽을 이룬
호남 학파의 수장이다.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았지만
죽어서 대사간에 이어 영의정에 추서된 선비이다.
선생은 1501년(연산7년)에 경상도 삼가현에서 태어나
벼슬길에 나아간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주하였다가
그 후 의령, 김해, 삼가 등지에서 거주하였다
선생은 61세가 되던 해에 산청의 덕산으로 이주해 그곳에 서실을 짓고
산천재라 이름 하였다.
이 ‘산천山天’이라는 당호는
<주역> 대축괘大畜卦의 “강건하고 독실하게 수양해
안으로 덕을 쌓아 밖으로 빛을 드러내서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말에서 뜻을 취한 것으로
강건한 기상과 독실한 자세로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깊숙이 묻혀
심성을 수련하고 올바른 수양을 하는 것이 학자의 길임을 천명한 것이다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평생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음으로써
진정한 은둔의 지사, 참 선비의 표상으로서
오늘날에도 존경을 받고 있는 분이다
산천재 앞 뜰의 매화나무, <남명매南冥梅>는
'산청3매'중의 하나로서,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는 이곳에
선생이 61세이던 명종 16년(1561)에 산천재를 지으면서
손수 심은 것으로 전해진다
<남명매>는 수령 450여 년의 역사와 연륜을 헤아리는 고매로서
크게 세 갈래로 갈라진 중심 줄기는 뒤틀리면서 하늘을 향해 뻗어 올랐고
연한 분홍빛이 도는 소담한 반겹꽃을 피운다
450년 동안 숱한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아 온 <남명매>는
'산청3매' 중에서 유일하게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지만 원목이 노쇠하여
2016년에 대대적인 외과수술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나무의 외과수술은
부패부제거 살균처리→ 살충처리→ 방부처리→ 방수 처리→ 동공 충전→
매트 처리→ 인공나무 껍질, 지주목 설치 등의 순서로 치료과정의 작업을 거치게 되는데
보통 노거수나 거목의 외과수술은 동공이 크고 가지나 줄기의 상처에 부패가 심하여
부러지거나 갈라질 위험이 많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쇠조임 와이어작업도 함께 설치하게 된다
복잡한 외과수술로 현재 <남명매>의 몸은 성한 곳이 없지만
비교적 잘 회복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산청3매'중에서 <원정매>와 <정당매>는 원목이 결국 고사하고 말았지만
<남명매>는 치료와 보호의 보살핌을 받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라 할 것이다
「 春山底處無芳草
봄 산 어디엔들 아름다운 꽃 없겠는가
只愛天王近帝居
내가 여기에 집을 지은 이유는
다만 천왕봉이 하늘에 가까운 걸 사랑해서 라네
白手歸來何物食
빈손으로 돌아 왔으니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銀河十里喫有餘
은하수 십 리 맑은 물 먹고도 남겠네 」
남명 선생이 말년에 산천재에서 쓴 한시이다
지리산 천왕봉의 깊은 계곡에서 흘러내려 산천재 앞을 흘러가는
은하수 강의 맑은 물만 마시고 선비의 지조를 지키고 살았던
옛주인은 가고 없지만
그 빈 뜰에서 '남명매'는 450년 동안이나 은하수 강을 벗 삼아
오늘도 묵묵히 꽃을 피우고 있다
2021. 03. 06.
009. 산청 <정당매> (2021.03.06.)
산청군 단성면 운리의 옛 단속사 터에는
현재 문화재 사적 발굴 조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천 년 전,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돼
조선후기에 폐사된 것으로 알려진 단속사는
승려가 100명이나 있었던 큰 사찰이었는데
지금의 옛 터에는 일부 민가가 들어서 있고 마을 앞으로 보물인 동·서 석탑과
당간 지주만 덩그러니 남아 전해지고 있다
‘속세를 떠난 절’이라는 단속사斷俗寺는
한 바퀴를 돌고 나면 짚신이 다 해질만큼 규모가 컸다는
통일신라시대 사찰이었는데
삼국사기에는 신라 때의 유명한 화공 솔거가 그린
유마거사상維摩居士象이 있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그후, 단속사는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졌지만
조선 초 대사헌까지 지낸 강회백 선생이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단속사에서 공부할 때 직접 심었다는
매화 <정당매>가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훗날 그가 종 2품인 ‘정당문학’이란 직위의 벼슬에 오르자
사람들은 이 매화에게 <정당매>’란 이름을 붙여주었고
두 기의 비석과 매화각이란 누각까지 세워주었다
‘산청3매’의 하나로 꼽히는 <정당매>는
단속사는 아주 오래전에 사라졌어도 한 쌍의 삼층석탑과 함께
600년 이상 절을 지키고 있다
<정당매>는 높이 8m에 둘레가 1.5m로
뿌리에서 4본의 지간이 생겨 위로 혹은 옆으로 뻗어 있으며
꽃의 색깔은 백색이며 홑꽃이다.
‘산청3매’ 중 유일하게 1982년에 경상남도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정당매>는 640여 년 전에 강희백 선생이
단속사 절에 매화를 처음 심은 뒤, 100년쯤 지난 후에 고사해 버리자
후손들이 다시 후계목을 키워내어 부활시켰다 한다
이후, 숱한 선비와 인물들의 사연과 사랑 속에서
540년의 유구한 역사를 이어온 <정당매>는
2014년에 우리들의 무관심 속에서 다시 고사하고 말았다
단속사지는 지리산 서쪽자락인
웅석봉 남쪽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다
절터가 위치하고 있는 곳은 탑동마을 일원으로
북쪽의 웅석봉, 서쪽의 마근담봉, 남동쪽의 석대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이며
웅석봉에서 발원하여 남류하는 계곡의 하류에 해당하는 곳이다.
일제강점기 자료인 『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는
동·서 석탑과 당간지주가 있으며 와편이 산재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후 1977년, 2006년에 단속사지에 대한 간략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한편 1999년에는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에 의하여
탑 북방 100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건물지 등
일부 지역에 대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으며
2005년에는 정비방안 마련을 위한 기본 조사의 목적으로
인제대학교 가야문화연구원에 의하여 정밀지표조사가 실시되었다
2011년 자료에는 석탑을 중심으로 한 보고가 이루어졌다
단속사지의 사역은 탑동마을 전체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 마을과 경작지가 형성되어 있다
마을은 동서에 계곡을 끼고 형성된 완만한 경사지에 입지하고 있으며
지형상 남향이다.
마을 입구의 당간지주를 시작으로 중심에 석탑이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안에는 정당 강회백이 심었다고 전하는
매화나무와 정당매 비각이 있다.
(글출처 : 문화재청)
지난 2014년 새해에
TV뉴스에서 <정당매>의 고사 소식을 처음 접하고
결코 사실이 아니기를 바랬지만
끝내 그 해 봄부터 꽃을 다시 피우지 않았다
2010년에 내가 처음 <정당매>를 대면했을 때도
오래 전에 원줄기는 고사하였고
곁가지 하나만 겨우 꽃을 피우고 있었지만
그렇게 빨리 고사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매년 봄이면 어김없이 찾아가던
'친구와 연인같은 그리움!'의 대상이었는데
600년의 찬란한 역사와 인연이 한낱 봄밤의 꿈처럼 스러졌다
회자정리 - 사람이나 나무나
자연의 섭리를 피해 갈 수는 없지만
‘준비 없는 이별’은 언제나 아쉽고 허망한 법이다
640년의 역사를 이어왔던 <정당매>가
2014년에 안타깝게도 고사하고 난 이후 산청군청에서
어린 후계목 3그루를 정당매 주위에 심어 놓았는데
지금 그 후계목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이 후계목들이 성공적으로 자라서
산청3매, <정당매>의 영광을 다시 재현해 주기를
응원해 본다
2021. 03. 06.
010. 산청 남사마을 <이씨매> (2021.03.06.)
남사마을의 기본은 지리산이다.
지리산은 '어리석은 사람(愚者)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智者)으로 변한다'고 해서
'지리산(智異山)'이라 불린다고 알려져 있다.
지리산 국립공원은 1967년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국내 국립공원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남한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인 천왕봉(1,915.4미터)의 위세에 알맞게
주변에 화엄사 같은 대사찰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재를 보유해
한국 남부의 문화권을 실질적으로 관할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명산인 지리산 천왕봉에서 흘러나온 봉우리
니구산을 배경으로 한 마을이 과거에 여사촌으로 불린 남사마을이다.
풍수적으로 해석할 때 니구산이 암룡의 머리이고 당산이 숫룡의 머리로
서로 머리와 꼬리를 무는 쌍룡교구 형상을 하고 있으며,
아래를 휘감아 흐르는 사수천이 조화를 이루면서
넓은 들과 울창한 숲이 주위를 둘러친
천혜의 입지에 있다.
남사마을의 특이한 점은
마을 생김새가 반달 모양이므로
'달이 차면 기운다'는 말처럼 반월을 메우면 안 된다고 믿어
중심부에 집을 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에 있는 주차장이 중앙 부분이다
......
(글 출처 : 과학문화유산답사기2 | 저자 이종호)
산청의 남사마을(남사예담촌)에는
집집마다 오래 묵은 매화나무 한두 그루씩
없는 집이 없다
그 중에서도 하씨, 정씨, 최씨, 이씨, 박씨 등
마을의 다섯 문중을 대표하는 다섯 그루의 매화나무
‘오매불망五梅不忘’이 유명했었다
남사마을에는 골목을 따라 늘어선 고택 담 안쪽에
매화나무를 비롯해 기품있는 오래된 나무들이 유독 많다.
두 그루 나무가 ×자로 가지를 교차해 자라는
이씨 고가 앞 돌담길 회화나무는 남사마을을 대표하는 명물이고
‘산청3매’로서 우리나라 매화 중에서 최고령을 자랑하는
하씨 고가의 <원정매>를 비롯하여
옅은 분홍빛의 가녀린 몸매를 자랑하는
최씨 고가의 <최씨매>가 있다
사효재에는 기이하게 자라고 있는 500년 된 향나무가 있고
선명당에는 우람한 단풍나무 노거수와
남사마을에서 가장 늦게 꽃을 피우는 <정씨매>가 있다
남사마을 뒤쪽 사수천 건너편에는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 때 묵어갔다는 자리에 세운 사당 니사재가 있는데
니사재 마당에는 가지와 가지가 붙은 연리지인 배롱나무와
<박씨매>가 나란히 있다
그리고 마을 중앙주차장 옆에는
근래 들어 전통염색 체험장으로 쓰이고 있는 남호정사에
마을에서 가장 화려한 매화를 피우는 <이씨매>가 있다
이씨문중을 대표하는 <이씨매>는
성주 이씨 문중의 서재인 남호정사에 있는 매화로
이씨 고택에 있었던 400년 된 고매가 오래 전에 고사하여
지금은 <이씨매>가 이씨 문중을 대표하고 있고
수령은 150년 정도의 키가 늘씬한 백매이다
<이씨매>는 평소에는 항상 대문이 잠겨있어서
흙돌담 너머로 보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근래에 남호정사에 염색공방이 새로 입주하여 문을 열게 되어
자유로운 출입이 가능해졌다
차 한잔하면서 염색작품 관람뿐만 아니라
<이씨매> 감상도 할 수 있는 좋은 곳이
남사예담촌에 생겼다
2021. 03. 06.
011. 양산 통도사 <오향매> (2021.03.13.)
2019년 2월 달에 <자장매>를 보러 갔다가
우연히 <오향매>를 처음 발견했었다
다섯 갈래의 우람한 고목에 아직 채 꽃망울도 달리지 않았기에
아래에 있는 안내판을 보고서야
지리산 골짜기에서 옮겨온 통도사의 새로운 식구,
매화라는 것을 알 게 되었다
"추운 겨울을 이겨낸 그윽한 매화향이
부처님께 향 사르며 예배하는 성불을 향한 수행자의 향기, 즉
1) 수행자가 계율(戒律)을 잘 지키는 향기(戒香)
2) 수행자가 마음을 쉬게 하는 향기(定香)
3) 수행자의 마음에 걸림이 없는 향기(蕙香:혜향)
4) 마음을 뛰어 넘는 향기(解脫香)
5) 수행자의 마음에 나와 남의 구별이 없는 향기(解脫知見) 등
다섯 가지의 향기를 닮았다 하여 오향매라고
주지스님이 지었다
지리산 남녘 깊은 골짜기에서 자생한 이 나무는
수령이 300년 이상 된 고매이다
여러 귀한 인연으로 통도사에 뿌리 내리고
순백색의 꽃을 피워 아름다운 꽃과 향기를 공양하고
영축총림의 일원으로
당당히 도량의 주인이 되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소개말이다
그리고 품위와 격조가 있으면서도 정이 묻어나는
주지스님의 환영사라고 할 수 있겠다
<오향매>의 등장으로 인해
영각影閣 앞의 마당은 통도사의 ‘매화 정원’으로 자리를 잡았다
영각 바로 앞에 통도사의 스타, <자장매>가 턱 버티고 서 있고
<자장매>의 맞은 편, 천자각과 영산전의 측면 모서리에
<오향매>가 새로 자리를 틀었다
그리고 <오향매> 앞뒤로 젊은 청매 4그루가 호위를 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다만, 영각과 영산전으로 이루어진 이 ‘환상의 정원’이
종무소 쪽으로의 난 통과동선으로 가끔 분위기를 깨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
영각影閣은 역대 주지 및 큰스님들의 진영을 봉안한 건물로
정면 8칸 측면 3칸의 긴 장방형 평면으로 된 팔작집이다
현재의 건물은 1704년(숙종 30)에 다시 지었다고 전한다
처음에는 영자전이라 불리다가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임진왜란 때 불탄 후에 다시 복원하기 위하여 건물 상량식을 마쳤더니
전각 앞에 <자장매>가 저절로 돋아났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영산전靈山殿의 영산靈山은
석가모니불이 법화경을 설한 영취산의 준말이다
후불탱화는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던 정경을 묘사한 영산회상도이고
그 주위에 여덟 폭의 팔상도八相圖를 배치한다
팔상도는 석가모니 생애를 여덟으로 나누어 묘사한 불화이다
이와 같이 팔상도를 배치하고 있기 때문에 영산전靈山殿을
팔상전(八相殿, 捌相殿)이라고도 한다
천자각은 학승들을 가르치는 강원(승가대학) 겸 기숙사 건물로
황화각이라고도 한다
한반도의 봄을 연 <자장매>가 질 무렵이면 항상 아쉽지만
그때쯤부터 <오향매>가 피기 시작한다는 것은
항상 새로운 희망이기도하다
지난해의 <오향매> 가지치기는 잔인하리만치 가혹했기에
현재의 모습은 마치 손발이 모두 잘린 생명을 다한 고사목을 연상시키고 있지만
그 속에서도 장한 꽃들을 피워내고 있다
2021. 03. 13.
012. 통도사 <육화당 백매> (2021.03.13.)
통도사의 입구, 일주문 우측의 육화당은
원래 입적하신 월하스님의 유품을 전시하던 노천유물관으로 사용되었고
그 후 통도사의 종무행정 일체를 관장하는 사무기능을 지닌
종무소로 운영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신도들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고
불교대학과 템플스테이 등 신도교육의 장소로도 이용되고 있다
통도사는 세 가람이 합쳐진 대사찰이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상로전,
통도사 건물 중 가장 오래된 대광명전을 중심으로 한 중로전,
영산전을 중심으로 한 하로전으로 구분한다
646년 신라 자장율사가 창건한 뒤 고려와 조선시대에
지속적으로 중건·중수되면서 규모가 계속해서 커졌기 때문인데
육화당은 하로전의 입구에 속한다
육화당이 종무소로 이용되던 시절에는
대문이 항상 굳게 잠겨 있어서 내부를 볼 기회가 전혀 없었는데
지난해부터 빗장이 풀리기 시작한 것 같다
대문 오른쪽에 물고기 그림의 돌로 만든 수조가 놓여 있고
그 뒤쪽 담장 곁에 육화당 매화가 있다
<육화당 백매>에 대해서는 자료가 전혀 없어서
매화의 내력이나 수명 등 이력 등을 알기 어려우나
몸통에 상처가 남아 있는 수령 200년 내외의 고매로서
3~4년 전쯤, <오향매>와 비슷한 시기에 육화당으로 담장 곁으로
옮겨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육화당 담장 곁으로 매화를 새로 심은 깊은 뜻은
일주문 앞의 <수양매>로 부터 시작하여
<통도매>, <영취매>로 이어지는 '통도사 매화길'을 이어주는 중간 지점에
징검다리를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는가 나름 짐작해 본다
아무튼, 통도사 산문 입구에서
담장 너머로 고개를 살짝 내밀고 미소 짓는 <육화당매화>는
아주 투명하고 흰 백색의 예쁜 꽃을 피운다
013. 통도사의 매화들 (2021.03.13.)
순천 승주의 선암사를 '꽃절'이라고 칭송하는데
3월 초순 매화가 피는 시절의 통도사도 그에 못지않다고 말 할 수 있다
사찰 경내 곳곳 요소요소에 매화가 피지 않은 곳이 없고
선방 앞에도 화사한 매화 한 그루씩은 꼭 있다
해마다 통도사의 매화를 보기 위하여
3번 이상은 꼭 들렀었는데 올해는 코로나19를 고려하여
2번으로 줄여서 주말 오후에 양산 통도사를 찾았다
통도사 자장매는
부산 UN기념공원의 홍매화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개화시기가 가장 빠른 대표적인 매화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UN기념공원의 홍매화가 피고나면
1~2주 후에는 <자장매>도 뒤따라 피어서
'한반도의 공식적인 봄'을 알린다
그러나 올해는 연초에 30년만의 강한 추위가 한동안 맹위를 떨쳐서
개화시기가 빠른 매화들은 대부분 동해를 입고 말았다
그래서 꽃잎이 일찍 시들거나 퇴색되어
매화의 청초한 모습을 감상하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자장매>의 개화시기는 평년보다 1~2주 앞당겨졌지만
추위에 얼어서 시든 꽃잎이 너무 많아서 클로즈 업 촬영이 불가능 할 정도여서
디테일 촬영은 포기하고 전체 이미지 촬영으로
방향을 바꾸기도 했었다
개화시기가 조금 늦은 <영축매>와 <통도매>는
<자장매>보다는 덜 했지만 강추위의 영향을 피해가지 못했고
전반적으로 올해의 매화들은 동해로 꽃잎이 일찍 시들어서
새로 피는 꽃과 시든 꽃이 한 가지에서 공존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많이 연출되곤 했었는데
반면에, 3월 초순의 날씨는 예년보다 포근해서
전국의 매화들이 개화 순서도 지키지 않고 동시에 함께 피는
무질서한 경향도 함께 보이고 있다
일주문 옆의 <수양매>
<자장매>
통도사 경내로 진입하는 방법은 2가지가 있다
하나는, 매표소 입구 주차장에 차를 두고
운치 있는 무풍한송로를 걸어서 들어가는 방법이고
나머지는, 내부 주차장까지 차로 들어가서 통도천을 건너가는 방법이 있다
통도사 무풍한송로舞風寒松路는
영축산문 입구 무풍교에서 제 2주차장 앞 청류교에 이르는
1km 구간을 마사토로 조성한 보행자 전용도로이며
무풍송림舞風松林이 마치 춤을 추듯 어우러지는 풍경을 연출하고
"통도 8경" 가운데 제 1경에 속한다
무풍한송로舞風寒松路는
'춤추는 바람결에 물결치는 찬 소나무'라는 심오한 뜻을 가지고 있고
통도천을 따라 걸어서 20~30분 정도가 소요되는데
수백 년된 적송들이 자유자재로 멋대로
휘고, 굽고, 누운 소나무숲에서 잠시나마 세속에서 벗어나
명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길이다
통도사 내부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삼성반월교 다리를 이용하여 통도천을 지나게 되는데
삼성반월교 다리 앞에 가녀린 <청매>가 1그루 있었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 깜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몸집이 왜소하고 수령도 어린 <청매>지만
통도사 경내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수문장 매화인데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고 나니 그 허전함과 실망감이 생각보다 크게 느껴져서
삼성반월교를 넘어가면서 자꾸 뒤돌아보곤 했었다
일주문 옆의 <수양매>는 만개하였고
벌써 시들기 시작한 꽃도 보인다
일주문 뒷쪽의 백매 1그루와 육화당 담장너머 <육화당 백매> 등은
지난해의 심한 가지치기로 꽃잎이 몇 장 달리진 않았지만 만개했고
영산전 옆의 <오향매>와 그 주변의 <청매>도
현재 절정의 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아울러 <통도매>와 <영축매>, 그리고 <자장매>는
이미 자신들의 사명을 마치고 조용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바야흐로, 통도사의 봄이 조용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영산전 옆 <청매>
014. 통도사 자장암매화 (2021.03.13.)
양산 영축산의 불보종찰 통도사의 산내암자인
자장암慈藏庵은 자장율사가 통도사를 창건하기 전에
수도 하던 암자이다
법당은 암벽을 의지하여 서향하였고
그 옆에는 1896년에 조각된 약 4m의 거대한 마애불이 있다
법당 뒤쪽 암벽에는 석간수가 나오는데
자장율사가 손가락으로 바위에 구멍을 뚫어 금개구리를 살게 하였다는
소위 금와공이 있어 유명하다
현재 자장암에는 관음전과 수세전,자장전이 위치하며,
관음전에는 관세음보살과 영산 회상도 등이 봉안되어 있다
2014년 초봄에 통도사 매화를 보러왔다가
우연히 자장암에 들린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 자장암으로 진입하는 108계단 보수공사가
한창 진행 되고 있었는데 공사장 한 켠에서
가지가 일부 부러진 백매 1그루를 본 적이 있었다
문득 그 매화나무가 궁금해져서 7년 만에 다시
자장암을 찾았다
그 사이에 108계단은 깔끔하게 정비되었고
아직 어린 매화나무도 몇 그루도 늘었다
계단 중간쯤의 부도탑 곁에 수양매가 1그루 새로 생겼는데
벌써 꽃이 많이 졌다
자장암의 높은 축대 아래에는
백매 1그루와 새로 심은 홍매 3그루가 있었다
옛날에 봤던 그 백매는 건강해 보이지만 생각보다 수령이 어렸고
심한 가지치기로 꽃이 올해는 거의 달리지 못했다
나머지 홍매들은 수령 10년 내외의 아직 어린 매화들이라
매화로서의 품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의 수양이 필요할 것이다
자장암은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으로도 유명하다
암자 마당에 서면 영축산의 빼어난 암봉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자장암 아래 계곡에는 가뭄에도 결코 마르지 않는 청정수
양산천이 사시사철 흐른다
매화가 살기에도 아주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015. 김해 봉하마을 <민주매> (2021.03.14.)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고향에 귀향 후
서거하기 전까지 생활했던 김해 봉하마을 '대통령의 집'에
아주 오랜 연륜을 자랑하는 고매가 한 그루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가 "이 집은 내가 살다가
언젠가는 국민에게 돌려주어야 할 집"이라고 했었던 고인의 유지에 따라
노무현재단은 2018년 5월 1일부터
'대통령의 집' 을 시민들에게 정식 개방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전문 학예사의 안내에 따라 고인의 흔적이 남아 있는
집안 곳곳을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
2019년에 처음으로 대면이 가능했을 때는
꽃이 가장 싱그러운 개화시기를 가늠하기 위해서
그 해만 해도 세 번(2월 03일, 23일과 3월 3일)의 사전답사를 거쳐서
3월 중순쯤에 만개하는 개화 습성을 가졌다는 것을 확인하고
2019년 3월 13일에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만들어 방문했었다
2020년 봄에는 코로나 19사태로
'대통령의 집' 관람이 중단되어서 아예 볼 수가 없었고
올해는 관람이 다시 재개되었지만 매화의 개화시기를 잘못 예측하여
매화는 벌써 만개한 후, 꽃잎을 떨구고 있었다
300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매화는
안방침실 오른쪽 장독대 옆에 자리잡고 있다
밑둥에서 부터 뻗은 여러 가닥의 가지가 위쪽 보다는 옆으로 펼처져서
전체적으로 밥사발 같은 소박하고 안정적인 모습을 띠고 있는
우리 토종의 와룡매이다
지난 2009년 봄에 노 대통령은 우리 곁을 떠났다
님이 어느날 갑자기 떠난 텅 빈 마당에
언제나 한결같이 홀로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고매는
5장의 순백색 꽃을 피우는 홑꽃의 백매이다
현장의 학예사에 따르면, 2008년에 인근의 농장에서 이 곳으로 옮겨 오게 된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평소에 농촌의 친환경 농법에 관심이 많았던 노 대통령께서
진주의 <문산농장>에 단감나무 견학을 갔다가
참한 매화나무를 발견하고 칭찬을 했더니
농장 주인이 즉석에서 방문기념 선물로 내 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민폐를 우려하여 대통령께서 정중하게 거절하고 돌아 왔는데
다음날 농장 주인이 트럭에 싣고 와서 무작정 내려놓고
가 버렸다는 아름다운 일화가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매화나무에 큰 상처가 남아 있다
생전에 대통령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매화나무의
밑둥에서 부터 줄기까지 껍질이 아주 흉하게 벗겨진 부분이 있는데
대통령께서 서거하셨을 때 그 상처가 생겼다는
안타까운 사연이 전해온다
그런데 학예사께 물어보았더니
아직 '대통령의 집' 매화나무의 이름이 없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매화 이름으로는
유명인사의 이름이나 지명을 따서 지으면 무난하지만
고인께서 사양하실 것 같아서 포기하고
내가 직접 작명해 보기로 하였다
고인께서 평생을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서 투쟁하셨고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와 정의를 지키키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바쳤으니
고인의 철학과 정신을 살리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봉하마을 <민주매民主梅>라고 부르기로 했다
지붕 낮은 집
‘지붕 낮은 집’은 설계 당시부터 부르던 ‘대통령의 집’의
아명兒名입니다.
노무현 대통령 내외와 정기용 건축가가 함께 지었는데,
노 대통령은 ‘부끄럼 타는 집’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름처럼 평평한 지붕을 가진 ‘대통령의 집’은 지하 1층, 지상 1층의
나지막한 건물입니다.
노 대통령은 혼자만 우뚝 서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선과 조화를 이루는
집을 바랐습니다.
사람들과도 어울림도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대통령은 자신이 살 집이 새로 들어오면서
그동안 마을 사람들이 보아온 경치를 가리거나 독점하게 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사자바위 아래, 노무현 대통령 묘역에서
마을 쪽으로 ‘대통령의 집’을 바라보면 뒷산 산세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집의 굴곡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더 멀리 화포천 쪽에서 보면 정말 부끄럼을 타는 것처럼
집의 모습이 전혀 드러나 보이지 않습니다
(글 출처 : 정기용 건축가)
대통령 사저관람을 마치고
집 앞의 묘역을 찾았다
올해 5월이면 벌써 서거 12주기로
님이 우리 곁을 떠난 지 강산이 수도 없이 바뀌었지만
우리 사는 세상은 별로 바뀌지 못 한 것 같다
‘사람 사는 세상’을 그토록 염원했었고
그래서 이제는 눈앞에 가까워진 것도 같았지만
LH사건을 기화로 한동안 움츠렸던 적폐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했고
개혁의 칼을 손에 쥐어줬더니 그 칼로 주인의 자리를 탐내는
배은망덕한 망나니가 칼춤을 추고
적폐들의 가짜뉴스가 대한민국의 참된 민주주의와 정의를 왜곡하는
혼란이 이어지고 있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다>
선과 악, 그리고 정의와 불의를 구별해 내는 ‘깨어있는 시민의 지혜’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시기임을 절감하며
무겁고 죄송한 마음으로 묘역을 빠져 나왔다
2021.03.14.
016. 화엄사 <흑매黑梅> (2021.03.20.)
조선 숙종 때 화엄사의 장육전이 불탄 자리에
각황전을 다시 짓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계파선사桂波仙師가
이 매화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진다
수령 300년이 훨씬 넘은 아주 짙은 선홍색의 홍매로
장육화丈六花라는 애초의 이름이 있었지만
특유의 아주 짙은 붉은 색이 검은 빛을 띈다하여
일반적으로 화엄사 <흑매黑梅>라고 불린다
<흑매>는 화엄사와 지리산을 대표하는 명물이지만
천연기념물 485호로 지정된 귀한 매화가 큰절 위쪽의 암자,
길상암에도 있다
이 <길상암 야매野梅>는 산청 단속사지 들판의 <원리 야매>처럼
자연발생적으로 산속의 대나무 숲에서 자란
작고 하얀 꽃을 피우는 500살이 넘은 야생의 들매화로서
현재 당국의 보호를 받고 있다
새벽부터 봄을 재촉하는 봄비가 줄기차게 내렸지만
각황전 옆의 홍매화<흑매> 앞에는 사람들과 우산으로 가득 찼고
촬영 포인트가 좋은 뒷산 위에는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양산 통도사의 <자장매>와 화엄사 <흑매>의 인기가 날로 치솟아
이젠 주말에는 매화 가까이에서 촬영하기조차도 많이 힘들어졌다
<흑매>를 보러 새벽부터 달려온 상춘객들의 열정과 정성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고 ‘매화 사랑’의 저변확대는 바람직한 현상이지만
10년 전쯤에 느긋하게 감상할 수 있었던 그 옛날이
그리워 질 때가 종종 있다
일반적으로 전국의 유명한 고매들의 개화시기는
지난 겨울의 추위와 날씨에 따라서 상당한 영향을 받기에
해마다 그 개화시기가 들쑥날쑥하기 마련인데
화엄사 <흑매>는 기후에 상관없이 항상 3월 하순에 만개하는
규칙적인 개화 특성을 가지고 있는 매화이다
저멀리 화엄사 앞산 노고단에 비안개가 가득하다
물방울을 머금은 작고 귀여운 분홍의 꽃잎 조각들이 모여서
매혹적이면서도 고혹적인 선홍색 빛깔을 띄고 있는 화엄사 <흑매>는
빗 속에서 더욱 선명해지고
그래서 애잔하다
2021. 03. 20.
지금, 화엄사에서는
천년도량에 봄이 오는 순간을 카메라에 담으며
산사의 봄을 만끽할 수 있는 특별한 축제가 열리고 있다
‘제1회 홍매와·들매화 휴대폰 카메라 사진 콘테스트’로서
3월16일부터 27일까지 ‘천년의 도량에서 매화와 노닐다’를 주제로 열리는 이번 행사는
현대인의 필수품으로 자리잡아 ‘폰카’로 불리는 휴대폰 카메라를 이용해
산사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함께 느낄 수 있도록 기획됐다
신라시대 창건돼 각황전·석등·사사자삼층석탑 등
다수의 국보와 보물을 품고 있는 화엄사의 아름다움을 비롯해
각황전과 원통전 사이에 우뚝 선 홍매화,
그리고 산내 암자인 길상암의 들매화를 통해
그곳에 찾아온 봄의 순간을 카메라에 담으며 역사와 문화,
자연의 조화까지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될 전망이다.
(글 출처 : 법보신문)
[ 화엄사 각황전 중건 설화 ]
<흑매>를 심었던 계파선사와 화엄사 각황전 중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불교설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임진왜란때 승병들의 활약에 분노한 왜병들이 불을 질러 화엄사 도량이 전소되었다. 그 후 계파선사에 의해 화엄사 장육전 중건의 서원 기도가 시작되었다.
계파선사는 깊은 수행과 덕망을 갖추고, 자비를 실천하는 스님이었다. 어느 날 밤, 계파선사는 부처님 전에 향을 사르고, 무릎 꿇고 합장하고, 장육전 중건을 위한 간절한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날도 기도 중에 비몽사몽간 금빛 광명 속에 문수보살이 나타났다.
"계파여! 큰 불사를 성취하려면 그 불사와 인연 있는 진실한 화주승을 선발해서 그 화주승이 복있는 시주施主를 만나야 하느니라."
"진실한 화주승을 어떻게 찾을 수 있겠사옵니까?"
"알려주겠다. 물 항아리와 밀가루 항아리를 준비하되, 먼저 물 항아리에 손을 넣었다가, 밀가루 항아리에 손을 넣게 하라.
손에 밀가루가 묻지 않는 스님이 진실한 스님이니라."
계파선사는 곧 대중들에게 고하고, 시험해 보았으나 아무도 성공하는 이가 없었다.
모두가 낙담하는 중에 마지막 남은 공양주 스님이 손을 넣었는데 밀가루가 묻어 나오지 않았다.
계파선사와 대중 스님들은 가사 장삼을 수하고, 모두 공양주 스님에게 3배를 올리면서, 장육전 중건의 화주 소임을 맡기었다.
계파선사는 공양주 스님에게 말했다
"그대가 지난 10년을 공양주 소임을 맡아 그 어떤 대중 스님 보다도 더 큰 복덕을 지은 연고로 오늘 같은 이적을 보인 것이니, 부디 장육전 중건의 소임을 맡아 주도록 하라.
이는 문수보살님의 뜻이기도 하다."
새로 화주승이 된 스님은 큰 걱정 속에 간절하게 백일 문수 기도에 들어갔다. 백일 기도가 끝나는 날 밤, 꿈에 금빛 광명의 문수보살이 나타났다.
"내일 아침 공양 전에 산을 내려가되, 제일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장육전 시주의 약속을 받아라. 알겠느냐?"
"예, 그리하겠나이다."
꿈에서 깬 화주승은 이른 새벽 설레는 가슴을 안고 산문을 나서 하산하기 시작했다. 한참 내려 가던 중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사람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자, 화주승은 다가가서 인사를 하다가 깜짝 놀랐다. 그 사람은 다름아닌 절에 와서 잔일을 거들고 남은 음식이나 누룽지를 얻어 가던 불쌍한 노파였다.
화주승은 절망에 빠진 마음으로 노파를 쳐다보다가, 문수보살님의 계시를 기억해 내고는 노파 앞에 엎드려 절하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장육전 중건의 소원을 말하였다.
"대보살님! 부디 장육전을 지어 주십시오!"
노파는 놀라서 어쩔줄 몰라 하다가 스님의 팔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스님! 천지간에 의탁할 곳 없는 저 같은 노인네가 어떻게 그 큰 불사금을 시주할 수 있겠어요?"
"저는 어젯밤 꿈에 문수 보살님의 계시를 받고 지금 보살님께 말씀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발 시주하시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엎드려 애원하는 화주승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노파가 슬픈 음성으로 말했다.
"문수보살님의 뜻이라면 약속하지요.
하지만 금생에는 불사금을 드릴 형편이 않되니, 이 몸을 바꾸어서 약속을 지키도록 하겠어요."
그러고 나서 자신의 신세를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본래 경주의 명문가의 여식으로, 시집가서 남매를 낳고 행복하게 살던 중 시아버지가 무고를 받아 역모죄로 몰려, 하루 아침에 멸문지화를 당하였습니다.
두남매를 데리고 달아나던 중에 두 남매는 화살에 맞아 죽고 나만 살아서 지금까지 성명을 숨기고 살아왔습니다.
이후 기도하되 다시는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건만, 스님께서 장육전 중건을 부탁하니, 한 번 더 환생의 슬픔을 겪을 수 밖에 없군요.
훗날 저와 만날때 두 가지 징표를 보이겠으니 잘 기억해 두십시오.
하나는 왼 손바닥에 '장육전丈六殿' 이라 쓴 글이고, 다른 하나는 오른 쪽 이마 위의 검은 점입니다.
스님! 내생에 또 봅시다."
그러고는 왔던 길을 돌아갔다.
화주승이 돌아가다 느낌이 이상하여 따라가보니 노파는 섬진강 속으로 뛰어 들고 있었다.
스님이 소리치며 달려갔으나 노파는 이미 강물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이후 화주승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여 천하를 떠돌며, 문수보살에 대한 원망과 노파에 대한 죄책감으로 정처없이 행각하였다.
그 후 무상無常한 산색山色이 여섯 번 바뀌었다.
그 무렵, 청나라 강희제는 나이 50이 넘어 공주를 얻게 되었다.
공주는 예쁘고 귀여웠고, 공주에 대한 황제의 총애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찌된 연유인지 공주는 태어나면서 부터 감아 쥔 왼 손이 펴지지 않았고, 웃지를 않고 항상 슬피 울었다.
황제가 달래면 울음을 그쳤다가 혼자가 되면 슬피 울었다.
귀여운 딸에 대해 황제는 크게 걱정했다.
어느 화창한 봄날 황후와 비빈들은 울기만 하는 어린 공주를 달래기 위해 궁궐 밖, 대로 변에 있는 누각에 올라, 대로 변에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시키고 있었다.
이상한 공주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구경하려고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보고도 그저 울기만 하던 공주가 갑자기 울음을 딱 그치고 활짝 웃으며 손으로 군중 속을 가르키며 말했다.
"저기, 우리 스님이 있어요."
황후가 놀라서 바라보니 그 곳에는 낯선 이국의 승려가 초라하게 서 있었다.
청나라까지 흘러 들어온 화주승은 모든 사람이 자기를 쳐다보자 놀라서 달아나려 하였다.
그러자 공주가 또 울음을 터뜨렸고, 황후가 물었다.
"저 스님을 데려 올까?"
공주는 울음을 그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황후 앞에 불려온 스님은 조선에서 왔으며, 죽을 죄를 지었다고 고백했다.
그 때 공주가 달려와 스님의 옷을 잡고 웃으며 '우리 스님' 이라고 좋아하는 것이었다.
공주는 스님 눈 앞에 꼬옥 쥔 왼 손을 활짝 펴 보였다.
손바닥에는 '장육전' 이라고 씌어 있었고, 가르키는 이마에는 팥알만한 검은 점이 박혀 있었다.
화주승은 그제서야 모든 사실을 깨달았다.
놀라운 사실을 보고 받은 황제와 황후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비로소 인간의 육신은 멸해도, 그 진신眞身은 인연 따라 윤회전생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황제는 조선에서 온 승려를 특별히 접견하여 치하했다.
그리고 공주의 전생의 약속을 지켜 주었다.
그리고 죄수들에게 대사면을 내렸으며, 조선으로 돌아가는 화주승에게 장육전 중건 불사금을 시주하였다.
보고를 접한 조선의 숙종임금도 장육전 중건 불사금을 시주했으며, 큰 붓으로 중건되는 장육전의 이름을 '황제를 깨닫게 한 전당' 이라는 뜻에서 '각황전覺皇殿' 이라고 사액하였다.
그때가 청나라 강희제 38년이요, 조선 숙종 25년이 되는 기묘년(1699)이었다.
각황전은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부처님을 두고 '깨달음의 황제'라는 뜻이고,
두번째는 '황제를 깨닫게 해 준 전당' 이라는 뜻이다.
약속을 지킨 노파의 움막에는 다음과 같은 원효대사의 게송이 적혀 있었다 한다.
莫生兮其死也苦 세상 태어나지 말아라 죽기가 괴롭다.
莫死兮其生也苦 죽지도 말아라 태어나는 것도 괴롭다.
(글 출처 : 각황전 중건 설화|작성자 광명)
017. 송광사 <송광매> (2021.03.20.)
조계산은 소백산맥 줄기의 끝 부분에 해당하며,
해발 889m의 높지 않은 산이다
산세는 험하지 않으며, 철따라 계절의 변화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솟구친 절벽은 비룡폭포, 감초암폭포와 같은
명산의 경관도 지니고 있다
그 중턱에는 대각국사 의천 이후 16명의 국사를 배출한 송광사와
선·교종의 중심사찰인 선암사가 자리잡고 있다
조계산 송광사는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로
매우 유서 깊은 절이다
‘송광’이라는 절 이름은 조계산의 옛 이름인 송광산에서 따 왔다고 하는데,
절을 언제 세웠는지 정확한 자료는 없고 신라 말기에
체징이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1842년의 화재와 6·25전쟁 등으로 많은 전각들이
소실되거나 파괴되고 다시 중건되는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현재 한국 선종을 이끄는 중심사찰의 역할을 하고 있다.
송광사의 천왕문에 들어서서 종고루 밑을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정면으로 중심건물인 대웅보전이 보이고
왼편으로 <송광매松廣梅>가 나타난다
지상에서 5줄기로 갈라져서 뻗어 오른 이 나무는
수세가 건장한 들매화 계통의 백매로서 수령은 200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해마다 선암사와 화엄사의 매화는 꼭 찾아가지만
그 중간쯤에 위치한 <송광매>는 일정에 쫒기면 생략하곤 했었는데
마지막 방문은 3년 전 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2014년에는 해가 질 무렵에 방문한 적도 있었다
남은 저녁빛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송광매 앞에 도착하기 위해서
매표소에서부터 뛰다시피 걸어서 대웅전 마당에 도착했다
부지런히 셔터를 누르고 있는데
7시쯤부터 송광사 저녁 예불을 알리는
법고와 사물을 두드리는 행사가 시작되었다
어둠이 짙게 깔려오는 산사에
<송광매>의 촉촉한 향기가 활기 찬 북소리를 타고
적막한 산사로 스며들었었다
지금, 2021년의 <송광매>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주변의 베롱나무에 걸린 붉은 연등들은
공간을 한층 풍요롭고 운치 있게 만들어 주었지만
<송광매>의 풍성하던 가지들이 많이 잘려나가 수세가 많이 약해졌다
600살이 넘은 선암사 <선암매>의 후계목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한 적도 있었는데
100년도 못 사는 인간이 자연의 섭리를
어찌 알 수 있겠는가?
018. 선암사 매화 (2021.03.21.)
우리나라 '매화의 성지'인 선암사 경내에는
수령 350~650년에 이르는 오래된 매화나무 50여 그루가
천년 세월의 이끼가 내려앉은 절집 곳곳에
자리를 잡고 살고 있다
선암사를 대표하는 '무우전 돌담길'과
원통전 담장, 응진당 담장. 뒤깐 옆 그리고 대웅전 뒷편과
첨성각 연못 옆에도 고매가 살고 있다
그리고 공양간인 적묵당 담장의 홍매와 백매
요사채인 무량수전 뜰 앞의 홍매
그리고 해천당 담장과 마당에도 잘 늙은
고매들이 살고 있다
그 중에서 원통전 담장 뒤편의 백매화와
무우전 돌담길의 홍매화가 천연기념물 제488호로
2007년에 지정되었다
'눈물이 나도록 아름다운 풍경'으로 불리는
'무우전 돌담길'에는
350년이 넘는 매화나무 23그루가
담장을 따라 도열하고 섰고
수령 550년의 천연기념물 <선암홍매>는
큰 줄기 3개중에 2개가 태풍에 부러져 완전히 사라졌지만
지금또 꿋꿋하게 분홍빛 꽃을 피운다
원통전 앞의 <선암백매>는 약 600년 전에
천불전 앞의 와송과 함께 심어졌다고 전해지는데,
늠름한 수세를 자랑하고 아직도 왕성하게 꽃을 피우는
선암사의 살아 있는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해마다 이른 봄에 치러지는 2달 정도의 탐매여행에서
우리나라 '매화의 성지'인 선암사 방문은
탐매여행의 핵심이자, 가장 중요한 일정으로 여기고 준비한다
그래서, 토요일은 하루 종일 봄비가 내려서
화엄사와 송광사쪽으로 매화를 보러 갔었고
비가 갠 일요일 새벽을 택하여 ‘선암사 매화길’로 달려갔었다
그런데 매화가 많이 져 버렸다
1년을 기다리고 벼르고 별러서 왔는데
하늘이 캄캄하고 억장이 무너진다
사전에 미리 예비답사를 왔었어야 했는데
방심과 게으름이 한해 농사(?)를 망치고 말았다
선암사 입구 식당에서 눈물 젖은 산채비빔밥을 씹으며
내년에는 꼭 사전답사를 오리라......
입술을 깨물었다!
호남의 명산 조계산 동쪽에 자리 잡은 선암사는
우리나라 태고종의 총본산이다.
그러나 서쪽의 승보사찰 송광사와 구례의 화엄사의 명성에 가려서
잘 알려지지 못했고,
더러는 동백과 상사화로 유명한 전북 고창의 선운사와 혼동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선암사는, 유홍준 전문화재청장의 표현처럼
'미술사적으로 뛰어난 유적도 없고 경관이 빼어난 것도 아니지만 가고 싶은 절,
가면 마음이 마냥 편해지는 사찰'로서
신도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사랑을 받고 있는
남도의 천년고찰이다.
유홍준 교수가 자기 마음속 최고의 문화유산으로
한글과 청자와 산사(山寺)를 꼽았고,
우리나라 산사의 대표적인 절로는 선암사를 뽑았다.
그리고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김봉렬 교수도
선암사를 건축적인 면에서 ‘최후의 최고’라고 극찬을 하기도 했다
전남 순천에 위치한 선암사는
백제성왕 5년에 아도화상이 현재의 비로암자에 처음 세웠고,
도선국사가 현재의 선암사 자리에 절을 중창하고 1철불 2보탑 3부도를 세웠다.
그 후, 의천대각국사에 이르러 대중창이 이루어지고 천태종을 널리 전파하여
호남의 중심사찰이 되었다
정유재란 때 전소되다시피한 선암사를
1660년 경준, 경잠, 문정 세 스님이 대웅전을 세우는 등
8년에 걸쳐 중수를 하였고
호암 스님에 와서 원통전, 불조선, 승선교 등을 지으며
중창 불사가 마무리되었다 한다
019. 선암사 <무우전매> (2021.03.21.)
우리나라 '매화의 보물창고'인
승주 선암사 경내에는 최소 수령 350년이 넘는
약 50여 그루의 고매들이 전각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 중에서 원통전 담장 뒤편의 백매화와
무우전 돌담길의 홍매화가 천연기념물 제488호로
2007년에 지정되었다
무우전無憂殿은 선암사 북쪽으로
대웅전의 북동쪽에 위치해 있는 요사채이다
‘ㄷ’자형으로 전면이 둘러싸여진 무우전의 뒷마당에는
철불이 봉안되어 있는 각황전이 있다
선암사에서 제일 외진 곳에 위치하여 선방으로 적격인데
지금은 선방 겸 요사채로 사용하고 있으며
태고종台古宗 종정의 침실이 있다
그동안 굳게 닫혀 있었던
무우전 지역이 지난해부터 처음으로 개방되었다
<무우전매>들의 뒷모습을 볼 수 있는
새로운 앵글과 미지의 종교영역이 열린 것이다
전인미답의 신천지에 들어서는 기대와 설레임을 안고
그 비밀의 정원 구석구석을 렌즈에 담으면서
문득 고마움이 우러나왔다
코로나 19로 어려운 시절에
금단의 지역을 일반인에게 개방해준
선암사의 자비와 배려는 마땅히 칭찬받아야 할 선행이자
진정한 종교의 역할이라고 할 것이다!
<무우전 뒷마당의 각황전>
일 년 내내 꽃이 지지 않는다는 선암사는
예로부터 100종이 넘는 꽃나무들이 자생하고 있어서
한국의 정원수들을 총 망라했다는 찬사를 듣는 ‘꽃절’로도 유명하다.
무량수각 앞의 600살 된 누운 소나무,
지장전 위의 영산홍과 자산홍, 칠전차밭의 700살 넘은 차나무 등이 유명하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단연 백미는 매화나무라고 할 수 있다.
천년고찰 선암사에는 그 오랜 시간을 전설처럼 함께 살아 온
매화나무들이 있다.
칠전선원과 원통전 사이 그 통로 한가운데 자리 잡은 ‘선암백매仙庵白昧’와
무우전 돌담길 중간쯤의 ‘선암홍매仙庵紅昧’는 600살이 넘은 천연기념물로서
선암사의 역사와 그 향기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1,500년이 넘은 완숙한 절집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두 그루 말고도 많은 고매화들이 살고 있다.
대웅전 뒷 계단에 자리한 수령 450년의 매화와
첨성각 앞의 홍매화는 수령 40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건강한 매실을 생산해 내고 있고,
그 외에도 수령 300년 내외의 매화들이 곳곳에 포진해있다.
특히 무우전 돌담길의 20여 그루의 고매 군락은
우리나라 토종 매화의 정수精髓를 보여준다.
어느 이른 봄날 그 매화터널에 들어서면
시린 겨울과 속세에서 벗어나 환상적이고 달콤한 봄을 체험할 수 있는
보석 같은 공간이 '무우전 매화길'이다.
선암사 매화는 요즘 우리 주위에 흔한 일본산 개량종이 아니라
우리의 토종매화이다.
개량종의 수명이 수십 년인 데 비하여 토종 매화는 수명이 수백 년에 이르고,
고목의 구부러진 등걸마다 몇 백 년의 세월을 이고 있다.
우리나라 토종매화의 특징은 꽃잎은,
일반 매화에 비해 작고 꽃도 듬성듬성 피지만
그 기품과 향은 감히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한다.
죽은 듯이 메마른 등걸에서 한 송이 꽃을 피우는 그 고아한 멋과
끝을 알 수 없는 그 깊은 향기는
이 세상 모든 꽃 중에서 단연 으뜸으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다.
해마다 겨울이면 나는, 선암사 쪽만 바라보고 살지만,
그 찬란한 매화의 계절은 결코 길지 않다.
보통 일주일에서 길어야 이주일로 아주 짧다.
‘짧은 만남, 긴 아쉬움......’이지만
<선암매>가 있어서 선암사의 겨울은 깊고도 깊고,
그리고 아름답다!
020. 선암사 첨성각매 (2021.03.21.)
선암사의 후원, 첨성각과 장경각 사이에
조그만 연못이 하나 있고 그 연못 위쪽, 담장 곁에
오래된 고매 <첨성각매>가 있다
첨성각은 스님들이 별이 보이는 새벽에 일어나
수행을 열심히 하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전각으로
지금은 원통전을 관리하는 스님이 사는 요사체로 활용하고 있는 건물이다
지붕구조가 왼쪽은 맞배지붕이고 오른쪽은 우진각지붕을 가진
특이한 건물이다
그 맞은 편의 장경각은 각종 경전을 보관하는
서고의 역할을 하는 건물이다
<첨성각매>는 수령 400년 내외의
세월의 이끼가 곱게 내려앉은 늘씬한 몸매와 자유분방한 형태를
자랑하는 멋쟁이 고매이다
일반적으로, 수령 400년이면 상당한 고매에 속하지만
쟁쟁한 <선암매> 선배들이 버티고 있는 선암사에서는
아직은 '젊은 피' 매화에 속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옛 선인들은 매화를 평가 할 때,
첫 째, 가지에 붙은 꽃이 많지 않고(稀),
둘 째, 나이를 먹어(老),
셋 째, 줄기와 가지는 마르고(瘦)
넷 째, 매화의 꽃봉오리 형상으로 그 등위를 매기는
기준으로 삼았다
선암사 돌담 곁에서 400년을 묵은 <첨성각매>는
고매가 지녀야 할 이러한 품격을 모두 간직하고 있다
늙은 등걸에서 용틀임하듯 기이하게 구부러지고
뒤틀린 가지가 힘차게 뻗어 나와서 점점이 새하얀 꽃을 피워
선암사의 새봄을 열고 있다
021. 담양 <계당매> (2021.03.21.)
담양군 남면 지곡리 가사문학관 뒤
지실마을 계곡 안쪽에 계당溪堂이라는 정자가 있다
송강 정철 선생의 네째 아들 정홍명 선생이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서, 지실마을 만수동에 터를 구입하고
자신의 거처로 삼은 집인데, 개천 위에 지은 집이란 의미로
곧 계당溪堂이라 불렀다
이 계당 앞에는 수령 400년이 넘은 홍매와 옥매가
각각 한그루씩 있는데 <계당매溪堂梅>라고 불린다
그렇지만, 백매가 홍매보다 항상 일주일 이상 일찍 꽃을 피워
같이 만개한 모습을 보기는 쉽지 않다
지실마을 <계당매溪堂梅>는
집을 지으면서 같이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데
현재는 사람이 살지 않아 관리도 부실하고
수세도 많이 빈약한 편이다
그렇지만 송강 정철 선생의 가사문학의 향기와 역사가 배여 있고
고매로서의 품위가 살아 있는 나무이다
특히, 호남을 대표하는 ‘호남 5매湖南五梅’의 하나로서
담양을 대표하는 매화이다
무등산 가사문화권에 있는 지실마을은 송강 정철 시인이 청소년 시절을 보냈던 그의 정서적 고향이다.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 시인은 아버지 정유침과 어머니 죽산 안씨 사이에 4남 3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유년시절은 비교적 화려한 편이었다. 위로 큰 누이가 인종의 귀인이었고, 셋째누이가 계림군과 혼인하는 등 왕실과의 인연으로 궁중을 자주 출입하였고 후에 명종이 된 경원군과는 소꼽친구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송강이 10살이 되면서 그 해 을사사화가 있었다. 이 사건으로 송강의 자형인 계림군은 역적으로 몰려 능지처참의 비운을 맞았다. 송강은 나이가 어려 아버지의 유배지를 따라다니다가 16살이 되면서 아버지의 유배가 풀리자 담양 창평으로 역시 아버지를 따라 내려왔다.
그 해 여름, 송강은 역시 을사사화에 순천 처가로 은둔한 형 정소를 민나러 길을 나섰다가 환벽당 아래 증암천(甑岩川)에서 목욕을 하던중 환벽당의 주인이었던 사촌 김윤제(紗村 金允悌 1501-1572)선생을 만나게 된다. 사촌은 을사사화로 세상이 어수선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정자를 지어 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더위에 지쳐 오수를 즐기던 중 냇가에서 용이 승천하려는 이상한 꿈을 꾸게 되었다. 꿈이 하수상하여 일어나 냇가를 살피던 중에 목욕하던 소년을 발견하고 불러 자초지종을 문답했다. 이런 인연으로 사촌선생의 보살핌을 받으며 뒤늦은 공부를 시작하였고 17세에는 역시 사촌선생의 주선으로 그의 외손녀 문화 유씨와 혼인하였다. 그리고 26세에 진사시험에 장원한데 이어 27세에 별시문과에도 장원하여 한양으로 진출한다.
그러나 성품이 곧고 강직했던 송강은 동서당쟁東西黨爭에 휘말리게 되면서 파란만장한 정치인의 생을 살면서 벼슬을 버리고 네번이나 낙향을 한다. 그 낙향이 모두 창평이었다. 창평은 그를 성장시켜주었던 정서적 고향으로 마음의 상처를 치유받는 가운데 작품활동에 정진하여 주옥같은 수 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그가 창작한 순수한 우리글의 작품들 성산별곡, 사미인곡思美人曲과 속미인곡續美人曲, 관동별곡關東別曲, 장진주사將進酒辭 등 가사작품들은 세종대왕이 창제 반포한 훈민정음이 널리 쓰이게 되는 업적을 낳게 되었다
무등산 가사문화권은 무등산 정기를 받고 성장하여 조선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받게 된 송강의 이야기와 함께 관련 문화유산들이 산재하고 있다. 우선 송강이 공부하던 환벽당(環碧堂, 광주광역시기념물 1호)이 있고, 성산별곡(星山別曲)을 지었던 식영정(息影亭, 국가명승 57호)이 있으며, 많은 문인들이 교류하던 양산보 선생의 소쇄원(瀟灑園, 국가명승 40호)이 있다
022. 백양사 <고불매古佛梅> (2021.03.21.)
백양사 스님들은 1700년경부터
이곳에서 북쪽으로 100m쯤 떨어진 옛 백양사 앞뜰에다
여러 그루의 매화나무를 심고 가꾸어 왔다고 한다
1863년 경 백양사가
큰 홍수를 만나 대웅전 등 주요 건물들이 피해를 입자
절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짓기로 결정하고
스님들은 아껴오던 매화나무들 중에서 모양새가 좋은
홍매와 백매 각 한 그루씩을 옮겨 심었으나
백매는 오래지 않아 죽고 홍매만 살아남아
지금까지 전해 온다
<고불매古佛梅>라는 명칭은
부처의 원래 가르침을 기리기 위해 '고불총림'이 결성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왜색 불교의 잔상이 선명하던 1947년 백양사는
부처의 원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뜻에서 백양사 고불총림을 결성했는데
고불古佛은 '부처 원래의 모습',
고불총림古佛叢林은 옛 큰스님들이 모인 도량을 뜻한다
그 뒤, <고불매>는 역사성과 학술적인 가치가 인정되어
2007년 천연기념물 제 486호로 지정되었다
백암산의 절경과 어우러진 <고불매>는
담홍색 꽃이 피는 매화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자태와 기품을 지녔고,
선암사의 <선암 백매와 홍매>, 전남대의 <대명매>,
담양 지곡리의 <계당매溪堂梅>, 소록도의 <수양매垂楊梅>와
더불어 호남5매湖南五梅 가운데 하나로 불린다
우화루雨花樓 옆 담장에 기대 선 <고불매>는
수령이 3백60년, 높이 5.3m, 뿌리목 줄기둘레가 1.5m 정도이고,
땅위 70cm쯤에서 줄기가 셋으로 갈라져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단정하게 가지가 뻗고 모양도 깔끔하여
고목의 기품과 포스가 살아있다
백양사에서는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면
<고불매> 앞에 상을 차리고 안녕과 건강을 기원하며
독송을 해 오고 있다 한다
2021년 올해 <고불매> 탐매여행은
시기를 잘 선택하여 매화가 만개한 때에 잘 맞추었지만
지난 겨울철에 혹한으로 냉해를 입어서
예년에 비해 꽃의 화려함은 다소 떨어지는
아쉬움이 있다
2019년의 탐매여행기 중 일부이다
“고불매가 모두 져 버렸다
며칠 전에 만개했다는 정보를 분명히 확인하고 왔는데
이틀 동안 내린 비 때문에 꽃잎이 모두 떨어져버린 것이다
평소에 <고불매> 주위에 그 많던 관광객들이 없으니
오히려 편리한 점도 있다고 느끼며 촬영 중인데
지나가던 스님 한분이 한마디 하신다
"이미 꽃이 져 버렸는데 사진은 뭐하러 찍누?"
"꽃이 져서 좀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좋기만 하네요......"
같이 간 일행의 이미 해탈한 대답이다
일행은 꽃을 보러 간 것이 아니라
해마다 <고불매>를 보러 백양사로 간 것이다
꽃은 져도 <고불매>의 품격과 향기는 친구처럼 애인처럼
항상 가슴 속에 남아 있는 것이리라!
이미 '탐매의 도'를 터득한 것 같은 일행을
나는 놀랍고도 부러운 심정으로
한동안 일행을 바라보았다
(2019. 04. 06.)“
백양사는 대웅전과 쌍계루에서 바라보는
백학봉의 암벽 및 식생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
예로부터 대한 8경의 하나로 꼽혀왔을 만큼 이름난 곳이다
백양사가 위치한 백암산은 내장산과 함께 단풍이 특히 유명하며,
천연기념물 제153호인 "백양사 비자나무 분포 북한지대"를 비롯하여
1,500여종의 다양하고 풍요로운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어
자연자원의 보고라 할 만하다
백양사는 창건 역사를 전하는
정도전의 <정토사교루기>를 비롯하여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하서 김인후, 사암 박순, 면앙정 송순 등
고려말부터 조선시대까지 많은 유명인사들이 이곳을 탐방하여
백학봉과 쌍계루의 풍광을 읊은 시와 기문을 남기는 등
예로부터 자연경관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명승지이다.
특히, 백양사 대웅전 기와지붕과 어우러지는 백학봉과
쌍계루 앞 연못에 비치는 쌍계루와 백학봉의 자태는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로 경관이 뛰어나
지금도 많은 사진작가들이 찾는 곳으로 유명하다
(글출처; 문화재청)
023. 문경 <화장암 홍매> (2021.03.27.)
문경 운달산 중턱에 금선대가 있고
금선대와 김룡사 사이에 있어서
중암이라고 불리던 호젓한 암자가 있었는데
영조34년에 백련화상이 중건하여 화장암華藏庵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영조44년에 영파성규 화상이 스님들의 진영을 모신 영각을 건립하였고
현존하는 건물로는 정문과 법당 및 요사채가 남아있다
화장華藏이란 부처의 진리로 장엄한 세계를
말한다고 한다
2019년에, 우연히 운달산 깊은 산속 화장암에
좋은 매화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눈이 채 녹지 않은 산길을 1시간이나 올라서 찾아 갔었다
그러나, 홍매는 전혀 피지 않았고 스님도 계시질 않았기에
2주 후에 다시 방문하여 만개한 <화장암 홍매>와 대면할 수 있었다
그 때도 화장암의 주인인 불휴당 스님은 뵙질 못했다
불휴당 스님은
문경 봉암사에서 참선하다가 이 곳으로 들어와서
불상 하나 없고 신자도 없는 이 암자에서
무려 30년 간 홀로 수행하고 계신다 한다
사월 초파일에도 연등 하나 걸리지 않고 신자 한 명 찾아오지 않는
참선도량이라고 한다
2년 만에 다시 화장암을 방문했더니
<화장암 홍매>는 이제 막 피기 시작하여 실망을 금할 수 없었지만
스님이 암자에 계셨다
“매화를 보려면 하동이나 광양 매실마을로 가야지 여길 왜 왔누?
여기 홍매는 아직 안 피었으니까
장독대 옆 어린 홍매라도 구경하고 가던지......”
“스님, 화장암 홍매는 몇 살 정도 되었습니까?”
“내가 여기 들어온 지가 47년 전인데
그 2년 후에 경주 기림사에서 남는 묘목을 얻어 와서 심었으니
45살 정도 되었겠네”
스님 덕분에 <화장암 홍매>의 내력과 수령을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경주 기림사를 지난해 여름에 들런 적이 있었는데
매화는 생각지도 못 했었는데 다시 들릴 기회가 생기면
매화를 한번 찾아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고졸한 암자에 잘 어울리는
아주 옅은 분홍빛을 띤 수세가 좋은 <화장암 홍매>는
얼핏보면 한 그루처럼 보이지만
두 그루가 나란히 요사채 앞에 둥지를 틀고 있다
적적한 암자에 사이좋은 쌍둥이처럼 정겨운 모습이다
새소리마저 잦아들고
새로 나온 봄볕마저 따사로운 화장암 툇마루에서
잠시 망중한에 빠져본다
담장너머 백목련이 홍매보다 먼저 만개하였고
앞산은 진달래로 물들기 시작하였다
오늘은 2021년 올해 탐매기행의 마지막 날이다
2달 동안의 긴 여정의 종점인
안동 <병산서원 백매>를 만나러 가기 위해
총총히 암자를 내려왔다
2021.03.27.
024. 안동 <병산서원 쌍매> (2021.03.27.)
안동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 선생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는 곳이자
한국 전통건축의 진수로 꼽히는 명품 공간이다
그래서 2019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고
올해 초에도 만대루가 보물로 지정되는
경사가 있었다
서애 선생을 추모하고
인간의 도리를 공부하는 그 선비의 공간 중심에
백매와 홍매 한 쌍의 매화나무가
강당마당에 좌우로 자리잡고 있다
유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했던
동재 앞에는 홍매가, 서재 앞에는 백매가 1그루씩 있어서
각각 선비의 벗이자 지표가 되었다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 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매화만이 설 수 있는 영광된 자리일 것이다
백매와 홍매의 수령은
약 110년생 정도로 알려져 있다
개화시기는 항상 백매가 홍매보다 약 보름 정도 일찍 피고
홍매가 피기 시작하면
언제나 백매는 지기 시작하기 때문에
백매와 홍매를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행운을 얻기란
쉽지가 않다
2021년 신축년의 탐매여행 마지막 날에
<병산서원 쌍매>를 찾았다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 선생을 모시는 서원으로
서원 앞에, 모양이 꼭 병풍을 둘러친 듯하여
병산(屛山)으로 불리는 산이 있어 그 이름을 따왔다
서애 선생이 시내에 있던 풍악서당을 1572년에
지금의 병산으로 옮겨 병산서당이라 하였다
그 후, 1607년 서애 선생이 돌아가시자,
정경세를 비롯한 지방 유림들이 서애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613년에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고 서애 선생의 위패를 봉안했다
1614년에 병산서원으로 이름을 고쳤고,
1863년 철종으로부터 병산서원 편액을 하사 받았다
병산서원 전면에 있는 만대루晩對樓는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지은 정면 7칸, 측면 2칸의 누각으로
유생들의 휴식과 강학의 공간이다
병산서원 안에 있는 입교당立敎堂은 강당으로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의미로서 병산서원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유생들의 기숙사였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그리고 책을 인쇄할 때 쓰이는 목판을 보관한 장판각,
사당에 올릴 제수를 준비하는 전사청 등이
병산서원 안에 있다
승효상의 전통 건축 이야기(3) - 병산서원
▲자연에 순응하는 공간의 아름다움
서양 집들과 우리의 옛집이 다른 점 가운데 중요한 것은 자연을 대하는 방법이다.
공간 배치에 관해 이야기하면 대체로 서양의 집들은 내부지향형이다.
방들은 거의 반드시 복도를 통해서 접속되어 있고 대개 중복도여서 겹방이 많다.
중요한 방은 바깥과 직접 연결되는 곳 없이 집안의 한가운데에 위치하는데 그 방은 필경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이 사용하는 곳이며 둘러싸인 겹이 많을수록 세력가의 집이다.
바로 외부나 자연은 나를 해칠 수 있는 적이라는 생각 때문일 게다.
그들에게 자연은 정복하기 위한 대상이고 건축은 외부로부터의 은신처(shelter)일 뿐이어서, 자연과 적대적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는 건축 개념이 그들 건축 역사의 근간을 이루어 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옛 건축을 보면 대개 방 자체가 홑겹으로 그냥 자연에 노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방의 집합도 복도를 통하여 접하는 게 아니라 다른 방과 직접 연속되거나 바깥을 통하여 연결된다. 대청이나 툇마루 같은 공간은 내부인지 외부인지 도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바깥의 자연에 노출되어 있다.
어떻게 보면 자연 속에 집이 던져져 있는 모습이다.
이는 우리의 선조들에게 자연은 결단코 정복 대상이 아니라 공존해야 하는 가치이며 어떤 경우에는 섬김의 대상이었으므로 자연의 섭리는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까닭이었다.
따라서 집은 다분히 외부 지향적이며 앞산과 뒷산을 연결해 주는 매개적 역할을 할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집 자체의 모양에 대한 관심이 있을 수 없고 공간의 배열이 더 큰 과제였다.
우리의 옛집들을 생각하면 하나같이 그 생김이 다 똑같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전부가 기와집 아니면 초가이며 목조의 구조에 회벽이나 한지를 발라 마감한 것이니 무어가 다르겠는가. 그러나 이는 건축을 시지각 대상으로만 보는 과오의 결과이다.
우리의 옛 건축은 자연과 외부를 어떻게 건축 공간화 시키는가에 있으므로 그 건축이 앉은 장소에 따라 다 다르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공간의 변화에 주의를 기울일 수만 있다면 우리 건축이 갖는 지적 감성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하회마을의 끝자락에 있는 병산서원은 단연 선두에 있다.
병산서원은 임진왜란 때의 명재상이었던 서애 유성룡(1542~1607)을 모시는 사액서원이다. 그는 의성 김씨 대종가를 지은 학봉 김성일과 함께 퇴계의 수제자로 성리학의 대가요 징비록을 지은 대학자였다. 또한 24세에 관직에 나가 49세에 우의정에 오르고 이조판서·병조판서를 겸임한 당대 최고의 세도가였으니 풍산 유씨의 중흥자이다.
▲서애 유성룡 모시는 사액서원
퇴계의 후계자로서 서애와 학봉이 그 서열을 다투는 바람에 서애는 호계서원에서 떨어져 나오게 되고, 1572년 풍악서당에서 현재의 자리로 이전한 서당을 1607년에 중건하고 후예들이 1614년에 서애의 위패를 모심으로써 병산서원의 칭호를 갖게 되었다.
권력과 더욱 밀착했던 호계서원이 당쟁의 중심이 되어 대원군 때 급기야 서원 철폐령의 대상에 올라 없어진 반면, 병산서원은 다소 세력권에서 밀려나 있었던 까닭에 건축적으로 오히려 내실화되고 오늘날까지 건재하기에 이른다.
병산서원은 지리적으로 안동 시내와는 물론 하회마을과도 절벽 같은 너들대벽을 두고 떨어져 있는 곳이다. 남쪽에 병산이 우뚝 솟아 병풍처럼 펼쳐져 있으며 그 밑으로 낙동강의 줄기가 유유히 흐르는 고요한 곳이다. 따라서 공부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장소이며 오로지 자연과 마주하는 삶을 살게 되는 곳이다.
병산서원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가르치고 배우는 곳인 강의동과 서애 유성룡의 위패를 모신 사당 부분 그리고 하인들이 머물면서 전체의 관리와 서비스를 담당하는 주소(廚所)가 그것이다.
물론 전체는 각 부분이 수행하는 기능에 맞는 규모를 유지하며 전체적으로 지형에 순응하면서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중에서 우리의 관심은 강의동 건축이 구성하는 공간의 아름다움이다.
강의동은 네 개의 건물로 이루어지는데 맨 위에 강의를 하는 입교당(立敎堂), 그 앞에 좌우로 학생들이 기거하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그리고 남쪽 아래에 누각인 만대루(晩對樓)가 있어 50~60평 정도 크기의 가운데 마당을 감싸고 있다.
밖에서 보면 중첩된 기와지붕이 만드는 풍모가 경사진 지형과 잘 어울려 있지만 가만히 보면 만대루라는 누각의 길이가 다른 건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과도하게 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 이랬을까. 이 의문은 마당에 들어가 입교당에 앉아보면 절로 나오는 탄성과 함께 풀리게 된다. 앞산 병산이 만대루에 가득 들어와서 마당의 한쪽 벽면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즉 만대루는 그 건물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둥만 남기고 스스로를 비움으로써 병산을 그 속에 채울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그 크기는 마당 전체를 포용할 수 있는 길이여야 한 까닭에 긴 모습을 가질 수밖에 없다.
건축은 프레임으로서만 존재하며 자연을 적극적으로 매개하는 수단일 뿐이라는 것을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입교당의 대청에 앉아 뒷벽의 목재문을 열면 병산은 마당을 타고 강당을 관통하여 뒷마당과 장판고를 넘어 뒷산으로 이어진다. 건축은 오로지 자연 속에 걸터앉아 있지 자연을 막거나 닫거나 그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다.
기둥에 의지하고 걸터앉아 다시 병산을 보면, 병산은 이름 그대로 병풍 속에 닫힌 듯 펼쳐져 있고 시시때때로 물안개가 그 풍경을 변화시킨다. 틀림없이 사계절의 시간이 만드는 이 절경은 그 속의 갇힌 고요한 마당을 살아 숨쉬게 하는 힘이 될 것이다.
▲건축은 자연의 매개자일 뿐
만대루에 올라 병산을 바라보면 도무지 내가 건축 속에 있지 않고 병산의 녹색에 파묻힌 것 같은데 뒤를 돌아보면 나는 마당을 두고 오로지 삼라만상의 본질을 논하는 자세가 되어 입교당을 마주한다.
역시 건축은 대상이 아니라 매개자일 뿐이다.
적당히 어긋나게 배치된 건물들은 아마도 직각이 갖는 부자연함을 슬쩍 부스러뜨린 결과이다.
어디를 보아도 편안하고 자연스럽다. 그러나 결단코 흐트러지거나 방만하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역시 저 고요한 마당이 갖는 긴장 때문일진대, 여기서 그 긴장은 단순한 침묵이나 그저 그런 고요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출발점이 된다.
그렇다. 그게 학문하는 올바른 태도이다.
그 장소가 바로 서원 아닌가.
오늘은 2021년 신축년의 탐매여행 마지막 날이다
원래 계획은, 문경의 화장암에서
올해 2달 동안의 탐매대장정의 피날레를 지을 생각이었는데
<화장암 홍매>가 아직 덜 피어서 어쩔 수 없이 생각을 접고
안동의 병산서원 <쌍매> 앞에서 길고 행복했던 여행의 마침표를 찍기로
계획을 수정한 아쉬운 사연이 있었다
예상대로 서재西齋 앞의 백매는 꽃이 핀 뒤 모두 져 버렸지만
다행히 동재東齋 앞의 홍매는 만개한 뒤,
봄을 열기 위한 마지막 열정을 쏟아내고 있었다
일기예보대로 오후 늦게부터 봄비가 내려
매화와 서원의 빈 마당을 촉촉이 적셨다
글 읽는 선비들이 모두 사라진 서원 마당에는
매화 꽃잎 하나 둘 떨어지고
고요와 정적이 조용히 내려앉는다
'인간의 근본과 도리를 익히고
사회와 세상에 이로운 학문과 지혜를 공부하던
그 많던 선비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황금만능주의가 세상을 휩쓸고 있는 이 세태에
서애 선생은 우리 후손들에게 어떤 말을
들려주고 싶을까?'
돌아 갈 길은 먼데
만대루 너머 병산에 비안개가 점점 짙게
내려앉고 있었다
2021. 03. 27.
병산서원 초입의 이름없는 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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