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향교 (密陽鄕校)
밀양향교(密陽鄕校)는 서기 1100년경에 창건되었다고 전하고 있는데,
밀성(密城) 손(孫)씨 집성마을로 전통가옥이 밀집해 있는 교동(校洞)마을 뒤
경사지에 위치하고 있다.
선조 25년(1602년) 현재의 위치에 부사(府使) 최기(崔沂)가 중건(重建)하였고,
특히 대성전(大成殿)은 순조 21년(1821년) 부사 이현시(李玄始)가
중수(重修)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의 구성은 대성전(大成殿), 동무(東蕪), 서무(西蕪),
내삼문(內三門), 명륜당(明倫堂), 동재(東齋), 서재(西齋), 풍화루(風化樓) 등이 있고,
건물 배치형식은 경사지에 이축선(二軸線) 전학후묘(前學後廟) 병렬형 배치이다.
문묘부(文廟部)의 중심축과 교당(校堂部)의 중심축이 완전하게 평행하지는 않지만
대성전과 내삼문을 잇는 중심축의 양무(兩蕪)가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고,
명륜당과 풍화루를 잇는 중심축에 양재(兩齋)가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성전에는 공자(孔子)를 주향(主享)하고
사성(四聖)과 송조6년(宋朝六賢)중 2위(位), 신라(新羅) 2위(位), 고려(高麗) 2위(位)를
배향(配享)하였고, 동서 양무(兩蕪)에 조선(朝鮮)의 14위(位)를 봉안하여
춘추로 석존(釋尊)을 봉행하고 있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고
5량(五樑)구조에 2출목 2익공 결구를 하였고 양협칸은 방으로 하고
가운데 3칸은 대칭으로 하였으며 전퇴가 개방되었고 넓고
전망이 좋은 대청공간을 형성하였다.
동재와 서재는 정면 5칸, 측면 1.5칸의 맞배 지붕이고 3량구조에 민도리집이며,
명륜당을 중심으로 양재의 배치 및 평면구성은
명륜당쪽에서부터 방 1칸, 대청 2칸, 방 2칸으로 되었고 전퇴를 개방 하였다.
동서재의 남쪽 측면에 퇴마루를 두고 상부에 별도 지붕을 설치 하였다.
풍화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八作)지붕 2층 누각이고
5량구조에 초익공결구를 하였다.
정문은 아래층의 가운데 1칸만 출입문을 달았고
상부 누마루에는 계자각난간(鷄子脚欄干)을 설치하였다.
마을의 윗쪽 막다른 골목에 향교로 들어가는 입구에
정면 3칸의 맞배지붕의 솟을대문이 있고
가운데 1칸에만 출입문이 있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고
5량(樑) 구조에 1출목(出目) 2결구(結構)를 하였으며,
전퇴(前退)가 없고 전면 3칸의 안쪽으로 열리는 쌍여닫이 통판문(通板門)을 달았고
내부 바닥은 장마루로 개조(改造)했다.
동무와 서무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며,
삼량(三樑)구조의 초익공(初翼工) 결구이고 가운데 칸에 안쪽으로 열리는
쌍여닫이 판장문을 하였고
양 협간의 전면에는 채광을 위한 붙박이 살창을 달았다.
동쪽 끝 2칸은 전사실(典祀室)로 사용하고 있다.
(이상 글 출처 : 문화재청)
< 이야기를 따라가는 한옥 여행 / 이상현 >
밀양향교
은밀한 세상으로 들어가다
목차
익숙하지만 낯선 건축
강당 영역을 풍부하게 하는 배후 공간
세월이 만든 건축의 율동감
향교는 대표적인 규범 건축이다. 나라에서 읍마다 설치했던 국립학교여서 건축가의 창의성이 개입될 여지가 별로 없었다. 유학의 교주인 공자를 모시는 제사 영역과 유학을 배우는 강당 영역이 모두 정형화되어 있어 건축가들은 향교에 그리 호감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규범이 주는 아름다움을 읽어 낸다면, 종묘에서 느낀 감동을 재현할 수 있는 곳이 향교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14호인 밀양향교는 규범미에 세월의 흐름까지 담아낸 빼어난 건축물이다. 돌에서 쇳소리가 나는 만어사의 경석과 한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얼음골의 신비스러운 여행이 건축 기행에 이어질 것이다.
익숙하지만 낯선 건축
밀양(密陽)이라는 말에는 무언가 마음을 적시는 힘이 있다. 정확하게 짚어 내기는 힘들지만 어떤 마음 저림, 그러니까 지나간 인연에 대한 아련한 감정 같은 것인데, 이를테면 잊고 있던 누군가 이곳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나 기대감 같은 것이다. 밀(密)은 은밀함을, 양(陽)은 세상을 뜻하니 밀양이라는 말 자체가 무언가 은밀한 세상을 태생적으로 안고 있다. 이곳에 오는 사람 누구나가 이 모호하고 아릿한 상념에 젖어 들지도 모를 일이다.
전통 건축을 하는 많은 이들에게 향교는 잊힌 곳이다. 그리하여 향교는 외롭다. 전통 건축에 대한 에세이가 쏟아지고 있지만, 향교에 애정을 가진 글을 찾기가 쉽지 않다. 같은 규범 건축이라고 해도 사찰은 장엄미를 내세워 건축을 조형예술의 수준까지 승화시켰고, 서원은 이를 경영한 사람의 건축적 안목을 녹여내 이따금 독창적인 건축의 아름다움을 성취해 내기도 한다. 이에 비해 향교는 이렇다 할 조형미를 갖추지도 못한 데다 전국적으로 교동이나 명륜동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길 정도로 흔한 국립학교이다 보니 개인적인 창의성이 들어갈 여지가 적었다. 이 때문에 건축가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일반인들의 시야에서도 밀려난 처지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규범을 지킨 건물에는 규범에 의해 도달한 아름다움이 있다는 점이다. 엄격한 규범 건축인 종묘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까닭이다.
어쩌면 이곳으로 오는 내내 의식을 지배한 아련한 감정의 정체는 향교에서 출발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릴 적 마을에서 처음 만났던 향교의 기억(살림집을 제외하고는 전통 건축에 대한 첫 경험이다)이 세월 속에서 잊히자, 향교는 스스로 자신들의 은밀한 세계를 만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 미묘한 감정의 정체는 오래된 기억의 층위를 밀고 올라오는 추억 같은 것이다. 그것이 밀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밀양향교는 옥교산 중턱에 앉은 채 바람이 실어 오는 세월을 맞고 있다. 한옥 마을 뒤편에 자리한 까닭에 향교로 들어가는 골목길은 그에 맞는 운치가 있다. 밀성 손씨(密城 孫氏)의 집성촌인 한옥 마을에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지어진 한옥들이 빼곡하다. 전통 한옥이 근대 한옥으로 변하는 과정을 볼 수 있는 귀한 곳이다. 때로 폐가처럼 방치된 건물이 눈에 밟히지만, 다감한 골목길이 주는 고즈넉함이 만족스럽다. 마을의 토석담을 따라 골목 끝에 다다르면, 세월 속에 넣고 막 헹궈낸 듯 하얗게 바랜 단청을 입은 풍화루(風化樓)가 사람을 맞는다. 풍화(風化)는 '교육이나 정치의 힘으로 풍습을 잘 교화하는 일'을 이른다. 향교가 지향하는 교육 목표를 짐작할 수 있다. 누마루 아래 마련된 문이 정문 구실을 하는 외삼문이다. 밀양향교는 고려 중기에 부북면 용지리에 세워졌고,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2년 지금의 자리에 다시 지어졌다. 물론 그 뒤 여러 번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렀다.
향교는 강당과 제사 영역으로 구분된다는 점에서 서원과 유사하지만, 제사 영역에서 서원 건축과 차이가 난다. 서원에서 제사 영역은 자신들이 모시는 특정 인물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한 것이지만, 향교는 공자와 함께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이름을 떨친 유학자 수십 명을 한꺼번에 모신다. 여러 사람을 모시다 보니 공간이 많이 필요하고, 그래서 제사 영역에 공자를 모신 대성전(大成殿) 말고도 대성전 앞에 동무(東廡)와 서무(西廡)라는 건물을 같이 배치한다. 따라서 서원과 달리 강당 영역과 사당 영역의 건물 비중이 비슷하다. 향교 건축을 감상한다면, 이 두 공간의 건축적인 대비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강당 영역을 풍부하게 하는 배후 공간
꼭꼭 잠긴 누마루의 대문을 지나 관리사 쪽으로 난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강당 영역이다. 향교 건물에 들어설 때마다 느끼는 것은 단절감이다. 거의 사람이 들지 않는 곳이어서 적막감이 주는 심리적 충격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 단절감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향교는 개인적으로 가장 먼저 경험한 전통 건축물이어서 부지불식간에 감정을 아련한 추억 속으로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더구나 계절은 봄을 지나 이제 여름으로 이동하고 있어 푸른 기운이 기분을 상큼하게 자극하고 들어온다. 마당에 마사토 대신 잔디가 깔려 조금 낯설기도 하지만, 주위에 선 고건축과 어우러지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어 나쁘지 않다. 풍화루와 마주보는 명륜당(明倫堂)은 강당 영역의 중심 건물이다. 명륜당 앞쪽에는 학생들이 생활하는 동재와 서재가 밀도감 있게 마당을 감싸고 있다. 동재에는 양반이, 서재에는 일반 양민이 기숙하며 공부했다. 조선 시대는 실상이야 어떻게 되었든 법적으로는 양민도 과거를 보는 평등한 사회였다. 건물에 둘러싸인 마당이 자칫 답답할 만하지만, 사당으로 이어지는 공간이 비어 있어 오히려 아늑하다. 그 터짐이 밀양향교를 건축적으로 살려 낸다. 아무리 규범 건축이지만 건축을 하는 이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들의 건축적 안목을 살려 낸다.
마당을 중심으로 네 개의 건물을 세우고 건물 사이에 터진 공간을 만드는 수법은 조선 후기 사찰과 비슷한 배치 모습이다. 조선 시대 전통 건축의 풍요로운 공간 변화를 이곳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런 특징은 건물과 건물을 회랑(回廊, 지붕이 있는 외부 통로)으로 연결하는 중국 건축과 명백히 구분된다. 마당 가운데 제법 세월을 견뎌 온 소나무가 그늘을 늘어뜨리고 여유롭다. 그런데 마당 한가운데 소나무라니? 언뜻 소나무를 그곳에 심은 뜻을 이해하기 힘들다. 마당 한가운데 나무를 심으면 한자 困(곤)의 모습이 되어 좋아하지 않았으니, 이도 마당의 잔디만큼이나 낯설어 보인다. 그러나 사당 쪽에 다녀오면 이곳에 소나무를 심은 까닭을 알 수 있다. 먼저 사당을 보기로 하자.
연둣빛 잔디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사당 쪽으로 들어서면 사당과 강당의 중간 영역을 지나게 된다. 사당으로 들어가는 예비 공간이면서 강당 영역을 풍부하게 하는 배후 공간이기도 하다. 이 공간이 없었다면 건축은 전체적으로 답답했을 것이다. 향교와 세월을 같이 한 은행나무가 뿌리내린 자리도 이곳이다.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에게 강의를 했다는 고사에서 시작하여, 공자를 모시는 곳에는 으레 은행나무를 심는다. 이 점이 향교가 서원과 또 다른 점이다. 가파른 계단을 눈으로 좇아가니 그 높이가 상당하다. 제사 영역인 사당이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그곳이 일상 공간이 아니며 또 그곳에 모셔진 인물이 참배하는 사람과는 격이 다름을 일깨워 마음을 다소곳하게 한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며 늘 근신하던 선비의 생활을 느껴 본다. 신문(神門)을 지키듯 앉아 낯선 이를 관찰하던 강아지 한 마리가 도둑이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신기하게 한 번도 짖지 않고 조용히 옆으로 비켜 앉는다. 사람이 들지 않는 향교가 저 스스로 자연과 함께 은밀한 세상을 만들어 온 것은 아닐까? 강아지는 내가 모르는 다른 생명체가 아닐까?
내삼문을 들어서니 전혀 다른 분위기가 사람을 맞는다. 시원하게 마을을 내려다보던 공간감 때문인지 텅 빈 마당이 오히려 꽉 찬 느낌으로 다가온다. 대성전은 맞배지붕을 관모처럼 쓰고 단정하게 앉아 적멸의 세계에 빠져든 표정이다. 대성전으로 들어오는 것을 용납 못하겠다는 듯 완강하게 막고 선 세 개의 판문(판을 이어 빈틈없이 만든 문)이 공간을 더욱 정적으로 만든다. 관리인이 안을 한번 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지 않았다면, 결코 그 안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안에는 공자와 함께 여러 유학자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장대석 기단(돌을 직사각형으로 길게 다듬어 쌓은 기단) 위에 앉은 대성전은 밀양향교에서 제일 격이 높은 건물이다. 왕이 머무는 곳에나 쓸 수 있는 '전(殿)'이라는 한자를 건물에 붙인 것은 공자가 문선왕(文宣王)으로 추존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 앞으로 동무와 서무가 살창(창틀에 살을 달아 만든 창)을 달고 역시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 가까운 사찰에서 가져왔을, 다듬어진 주춧돌이나 계단돌에서 언뜻 권력의 무상함이 마음 끝을 지난다.
세월이 만든 건축의 율동감
대성전까지 걸어가서 뒤를 돌아보면, 지나온 내삼문이 굉장히 길다는 데 놀란다. 은행나무 밑에서 우러러보았을 때보다 훨씬 길게 느껴져 순간적으로 혼란스럽다. 건축적으로 사람이 한번에 인식할 수 있는 최대의 층이나 간격은 다섯이다. 공간 단위가 다섯을 넘으면 이를 숫자로 인식하지 못하고, 단지 높다거나 길다고 느끼게 된다. 내삼문은 좌우에 수장 공간을 두어 아홉 칸이나 되는 긴 건물이다. 종묘 정전을 마주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눈 아래서 기왓골이 반복되며, 길게 이어진 지붕은 자연스럽게 영원을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이곳으로 출발하며 내내 마음속에서 밀양이라는 어감이 울려 내던 그 미묘한 감정에 닿아 있는 듯하다. 종묘의 넓은 기단 위에 섰을 때의 그 막연한 느낌, 적멸. 낡은 문간채지만 신문으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 건물은 전사청이 있는 문간채가 가장 낮고, 동무와 서무가 중간, 대성전이 제일 높다. 사당 영역의 위계를 세우기 위해서다. 강당 영역에서 풍화루가 명륜당보다 높은 것에 비교된다. 건물 주위에는 향나무를 심어 성현들에게 24시간 향을 피우는 마음을 담았다.
사당 영역에 다녀오면 강당 영역이 가진 생기를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공간이 같을 수는 없다. 마당에 푸른 소나무를 심은 이유도 뚜렷해진다. 소나무를 심은 선학의 마음을 알았을까? 후학이 심은 동백나무가 꽃을 피워 계절을 풍성하게 한다. 나무가 주는 생동감은 건물로도 그대로 이어진다. 동재와 서재의 심심한 지붕 한쪽에는 눈썹처럼 좁고 긴 지붕을 달아 율동감을 주었다. 기단에도 생활 동선에 따라 자연스럽게 계단을 만들어 향교 건물이 주는 정적인 느낌을 누그러뜨렸다. 이런 주변 조건 때문에 똑같은 잔디가 대성전에서는 엄숙함을, 이곳에서는 생동감을 선사한다. 그러나 활기가 자칫 방종으로 떨어지지 않게 건축 하나하나에 예를 다한 모습이다. 지붕은 안정감 있게 맞배지붕으로 통일하고, 팔작지붕인 풍화루 역시 추녀를 높이지 않아 정숙함을 유지한다. 학생들이 머무는 동재와 서재의 칸수를 명륜당과 같게 하여 건물에 통일성을 주되, 스케일을 작게 하여 위계성도 확보했다. 선학과 후학 사이의 예가 중요한 공간이지만, 생활의 활기를 잃지 않게 배려한 건축 태도가 지금까지 살아 숨 쉰다. 건축가들만이 건축의 율동감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세월도 저 스스로 공간을 바꾸며 율동을 만들어 낸다. 동재와 서재의 풍부한 변화는 생활에 적응하며 세월이 만든 밀양향교의 활력이다. 소나무와 동백나무에서 느껴지는 생기 또한 세월의 공이다.
향교는 아직도 지방 유림의 활동 공간으로 제사 의식이 중요한 곳이다. 때문에 밀양향교 역시 향교 내부를 보려면 사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 이런 점이 향교가 생활 속에 들어와 있음에도 사람들이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까닭이다. 언제부터인가 향교는 우리에게 밀양처럼 은밀한 세계가 되었다. 대부분의 향교는 문을 굳게 걸어 두고, 학자들도 이에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일 년 열두 달 들고 나는 사람을 보기 힘들다. 때로는 이웃에 사는 사람들조차 그것이 향교인 줄 모르는 경우도 있지만, 향교는 시군마다 하나씩 남아 있을 정도로 우리 가까이에 있는 건축물이다. 종묘에서 강한 인상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향교 순례를 권한다. 특히 밀양향교는 지난 세월을 그대로 담아내며 향교만의 은밀한 세상을 잘 간직한 향교 건축의 뛰어난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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