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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는 이야기 ■/소나무 기행

소나무-14 하동 문암송 ( 2016. 12. 31. )

















 (34) 경남 하동 축지리 문암송

                                                             글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거친 너럭바위 뚫고 솟아 수백년 악양 들녘 굽어보네

 


 

한 톨의 솔씨가 바람을 타고 섬진강을 따라 지리산 자락으로 올랐다.

수백 년을 살아가야 할 아늑한 보금자리를 찾느라 기력을 다한 솔씨는

햇살 따스하게 내리쬐는 양지 바른 곳에 내려앉았다.

한 줌의 포근한 흙에 묻혀 솔씨는 천년의 영화를 꿈꾸며 평안한 잠에 들었다.

그러나 그가 오랜 망설임 끝에 겨우 찾아내 잠든 곳은 얄궂게도

큰 바위 위에 포슬포슬 얹힌 한 줌의 흙이었다.

이미 1000년을 살아온 바위 위의 한줌 흙만으로 산다는 건,

애당초 견디기 힘든 고통이 뒤따르거나 불가능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어린 솔씨는 애면글면 바위 틈을 파고들어 뿌리를 내렸고

가끔은 강철같이 단단한 바위를 쪼개기도 했다.

 






























물 한 모금 없는 곳에 터 잡은 나무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큰 소나무로 자라는 고난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산 아래에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어린 솔씨처럼 사람들도 황무지 위에 논밭을 일구고 생명을 키우며 풍요로운 농촌을 이뤘다.

경상남도 하동 악양면 축지리 대축마을이다.

 

그 큰 바위 덩어리 위에서 나무가 어떻게 그리 오래도록 크게 자랐는지.

 만날 보는 나무지만 볼 때마다 신기하다니까. 그런 거 보면, 나무가 힘이 좋은 거야.

 바위까지 뚫고 자랐으니 말이야.”

  

마을 입구의 한적한 버스 정류장 앞 점방을 지키는 조분수(77) 노파는

 뒷동산 큰 바위 위에 서 있는 한 그루의 소나무를 바위보다 강한 나무라고 이야기한다.

 나무를 문암송이라고 부르고 나무를 떠받치고 있는 바위는 문암,

혹은 문바위라고 부른다.

 나무와 바위는 모두 대축마을 사람들에게 경외의 대상이다.

 누구는 이 소나무의 나이를 300년이 됐다고 하고, 또 누구는 600년도 넘었다고 한다.

 나무의 나이를 정확히 가늠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무로서 생명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물 한 모금 스며들지 않는 바위 위는

 문암송에게 최악의 조건이다.

문암송의 나이를 비옥한 땅에 터 잡은 여느 소나무들의 크기와 비교해

짐작할 수 없는 이유다.

 

나무가 자라려면 어쩔 수 없이 바위를 쪼개고 뿌리를 내릴 수밖에 없는데,

 바위가 쪼개지면 나무는 보금자리를 잃게 된다.

문암송이 여느 나무들처럼 자랐다면 바위는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나무도 생명을 잃었을지 모른다.

 하여 문암송은 사람도 바위도 전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조금씩 그것도 아주 천천히 자랐다.

 그게 애당초 문암송에게 주어진 숙명이었다.

 

 








































  

 

지리산 선비들 음풍농월 즐기던 곳


  


내가 시집온 게 열일곱 살 땐데,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

 더 자라지도 않고, 부러지거나 시들지도 않고, 그때 그대로야.

외려 나무 밑에 있는 바위가 조금 더 갈라졌지. 그건 알 수 있어.”

 

조 할머니는 처음 시집왔을 때 보았던 나무를 또렷이 기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나무도 자람의 숙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생명이거늘 어찌 60년 동안 변하지 않았겠는가.

 다만 사람들의 눈으로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천천히 자란 것이다.

문암송도 봄이면 송홧가루를 날리고 가을에는 솔방울을 맺으면서,

 차갑고 견고한 바위 위에서 제 몸을 키웠다.


 12m의 키, 줄기 둘레 3m의 훤칠한 소나무가 됐다.

살아남기 위해 나무는 바위를 파고들었지만, 바위가 바스라지지 않도록 조금씩 자라야 했다.

다른 소나무가 한 아름 자라는 동안 이 나무는 고작 한 뼘쯤 자라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또 나무의 보금자리인 바위가 부서지지 않도록 나무는 바깥으로 낸 뿌리로 바위를 감싸 안았다.

 가운데에서는 바위를 쪼개고 바깥에서는 더 이상 쪼개지지 않도록 붙들어 안으며

나무는 긴 세월 동안 변증의 생명을 살았다.

 

우리 마을에는 문암계라는 게 있어.

대축마을하고, 저 아래 소축마을 사람들이 함께 하는 계야.

해마다 7월 백중에 계원들이 문암송 앞에 모여서 잔치를 벌이지.

나무 앞에 정자 있잖아. 그게 문암정이야. 그래서 그 나무도 문암송이라고 불러.

우리는 그냥 문바위 나무라고 부르곤 해.”

 

문암송이 자리 잡은 곳은 멀리 악양들녘이 한눈에 내다보이는 경관 좋은 자리여서,

옛날에는 문인들이 모여 자주 시회(詩會)를 열곤 했다.

사람이 지은 정자는 필요 없었다.

 바위를 뚫고 솟아오른 신비로운 나무 한 그루가 드리우는 상큼한 그늘이면 너끈했다.

 문암송이 드리우는 그늘은 곧 하늘이 지은 정자였다.

천연의 소나무 정자에는 오랫동안 지리산 자락에 흩어져 사는 문인 선비들이 모여들어

 호연지기를 익히며 음풍농월의 흥취를 즐겼다.

 맑은 바람 밝은 달을 노래하기에 나무 그늘만큼 알맞춤한 자리가

 또 어디 있겠는가.

 


















































 

고통·풍요 조화 이룬 생명의 변증법

 

    

문암송 곁에 있는 한 그루 나무 또 봤수? 그건 서어나문데,

 기가 막히게 그 나무도 바위에 뿌리를 내렸잖아.

큰 바위는 아니지만, 쪼개고 감싸면서 자라 오르는 건 똑같아.

우리 동네 나무들이 죄다 힘이 좋다는 이야기지 뭐. 허허.”

 

나무가 바위 위에서도 잘 자랄 수 있을 만큼 건강하고 활기찬 마을이라는 게

조 할머니의 자랑이다.

한평생 농촌 마을에서 잔뼈가 굵은 조 할머니의 건강한 웃음에는

간단없이 부닥쳐 온 농촌 살림의 모든 고통을 감내한 관록이 배어 있다.

이곳 사람들이 조 할머니처럼 건강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건

어쩌면 사람보다 먼저 바위를 뚫고 생명을 키운 한 그루의 소나무가 있는 탓인지도 모른다.

 살림살이가 어려울 때마다 사람들은 마을 뒷동산에 서 있는 문암송의 고통과

 강인한 생명력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격려했던 것이다.

 

바위를 뚫고 솟아오른 문암송!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거친 바위 표면에 생살이 찢기는 아픔을 삼키며

바위 틈을 조금씩 벌리면서 뿌리를 밀어 넣는다.

뿌리가 파고들수록 차츰 벌어지는 바위를 꽁꽁 붙들어 안아야 하는 바깥쪽 뿌리의 아픔은

 더 커지기만 한다.

 애처로운 운명의 문암송이 펼쳐 보이는 생명의 변증법이다.

    [글출처: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