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 윤선도 고택
고산 윤선도 고택 녹우당의 역사는 고산 윤선도((1554~1619)의 4대조이자 해남윤씨 어초은공파의 시조가 된
어초은 윤효정(尹孝貞, 1476~1543)이 백련동에 자리를 잡으면서부터 시작된다.
어초은 윤효정은 해남윤씨를 이 지역 재지사족으로 성장시키는 기틀을 마련하는데 당시 해남에서 가장 큰 기반을
가지고 있던 향족인 해남정씨의 사위가 되어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며 분가를 하게 되자 백련동에 터를 잡고
그 가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어초은은 해남을 학문의 길로 이끌었다는 금남 최부의 밑에서 공부했으며, 윤구(尹衢), 윤행(尹行), 윤복(尹復)
세 아들을 문과에 급제시키는 등 해남윤씨가를 명문사족으로 자리 잡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윤구(尹衢)는 1516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부교리를 지냈으며 유성춘, 최산두와 함께 호남 3걸로
일컬어지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 국문학의 비조라 일컬어지는 단가문학의 최고봉인 고산 윤선도를 배출한다.
이와 함께 고산 윤선도의 증손인 공재 윤두서(1626~1694)는 조선후기 삼재중 한명인 문인화가로
국보 ‘자화상’을 그렸으며, 아들 낙서 윤덕희와 청고 윤용의 3대에까지 그 예술적 재능이 이어진다.
녹우당은 조선후기 공재 윤두서의 학문과 예술의 토대가 될 뿐만 아니라 다산 정약용, 소치 허유 등 쟁쟁한 학자와
문인예술가들이 머물거나 교류한 곳이 되어 해남의 유교문화와 문화예술의 중심공간이 되었던 곳이다
(이하 글자료 : 해남군청)
백련동
고산유물전시관 입구
충헌각 - 고산유물전시관의 신축으로 현재 비어있다
녹우당 - 내부관람 불가
고산 사당
어초은 사당
안사당
어초은 묘소및 비자나무숲 가는 길
추원당 가는 길
해남윤씨 녹우당 (사적 167호)
고산 윤선도 고택 녹우당은 조선중기에 건립된 호남지방의 대표적인 상류주택으로 그 규모도 크며
구조 및 양식의 구성요소도 풍부하여 한국 상류주택 연구의 중요한 대상이 되고 있는 고가이다.
당대의 문헌이나 기문이 없어 그 정확한 건축 연대는 알 수 가 없다. 다만 고산의 4대 조부인 윤효정(1476∼1543)이
해남에 들어온 시기로 보아 대략 15C 중엽에 시창된 건축물로 여겨진다.
전체적인 집의 구조는 대문을 들어서면 행랑채를 지나 사랑마당이 나오고 앞면에 사랑채가 있으며 서남쪽
담 모퉁이에는 조그마한 연못이 있다. 사랑채는 효종이 고산에게 지어준 집으로 경기도 수원에 있던 것을
현종 9년(1668)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사랑채 뒤 동쪽 대문을 들어서면 안채가 ‘ㄷ’자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사당은 안채 뒤 동쪽 담장 안에 한 채가 있고
담장 밖에 고산사당과 어초은사당 등이 있다.
녹우당은 안채와 사랑채가 ‘ㅁ’자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앞에는 행랑채가 갖추어져 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서울이나 중부지방의 양반가와 같은 구조인 ‘ㅁ’자 형식을 취하고 있어 특징적이며
한때 아흔 아홉 칸에 달했으나 현재 55칸 정도만 남아 있다.
현재 녹우당 영역 속에 있는 주 건물로는 선생이 시문에 열중하던 해남윤씨어초은공파(海南尹氏漁樵隱公派)
종가(宗家)의 고택(古宅)안채와 사랑채인 녹우당(綠雨堂,사적 제167호), 행랑채, 헛간, 그리고 안사당,
그의 선조 어초은사당(漁樵隱祠堂) 외에 고산사당(孤山祠堂) 및 좌측 숲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추원당(追遠堂)이 있고,
고산유물전시관(遺物展示館)에서는 공재윤두서자화상(恭齋尹斗서自畵像, 국보 제240호)을 비롯하여
해남윤씨가전고화첩(海南尹氏家傳古畵帖, 보물 제 481호), 윤고산수적관계문서(尹孤山手蹟關係文書,보물 제 482호)
지정(至正) 14년 노비문서(奴婢文書,보물 제 483호) 등 소중한 유물이 전시되어있다.
또 뒷산 덕음산 중턱에에 있는 명품숲 비자나무숲(천연기념물 제 241호)은 약 600년전 선생의 선조가 이루어 놓은
수림(樹林)으로 문학적 생물학적가치가 높은 으로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고산서원과 후원에 별당채도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녹우당의 자연과 풍수형국
녹우당은 덕음산(德陰山)을 배산으로 자리 잡은 우리나라 최고 명당자리 중에 하나다.
덕음산을 뒤로 그 줄기인 성매산, 옥녀봉, 호산을 잇고 들어서 있어 흔히 풍수지리의 산서(山書)에서 말하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잘 짜여진 명당자리로 손꼽히고 있다.
덕음산을 주봉으로 배산(背山, 玄武)하고 좌우에 그 지맥이 안아 싸고 있는 듯한 형상일 뿐 만 아니라
동쪽 계곡에서 원류된 작은 개울이 마을 앞 들판을 흘러 임수(臨水)하고 있으며, 들판 건너 안산(문필봉)이
원경(朝山)으로 펼쳐져 있어 수려한 형국임을 말해준다.
*입지환경 및 전체배치계획
고산 고택은 해남읍 소재지로부터 동남방으로 약 4km정도 떨어진 연동마을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다.
이 마을은 주산인 덕음산을 배산으로 하여 그 지맥이 좌우로 흘러 좌청룡 우백호를 형성하고 있고 전방으로는
작은 개울이 흐르고 또한 연못도 파져 있으며 그 앞쪽으로는 멀리 호산이 펼쳐져 있다.
이렇듯 이 가옥은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훌륭한 형국 속에 자리하고 있다. 건물의 배치는 동서의 직선축을 이용하여
서향으로 주요 건물을 배치하였다. '순' 자를 뒤집어 놓은 형의 행랑채를 맨 앞에 두어 그 우측면에 난 솟을대문 간을
통하여 사랑마당에 들어서면 비교적 높은 기단상에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사랑채 우측 뒷 편에 난 중간문을 들어서면 안채가 있는데 이 안채와 사랑채는 서로 연결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순'자의 평면형을 이루고 있다. 안채 좌측 편에는 별도의 담장으로 둘러진 곳에 장독대와 곳간들이 있어
여성만을 위한 공간이 형성되어 있으며 사랑채 전면에는 방형의 연못이 파여져 있고 또한 각종 수목이 잘 가꾸어져
있어 조선시대 반가와 남성공간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안채 뒷편에는 과실수가 심어져 있는 넓은 후원이
형성되어 있다.
사당은 안사당만이 후원의 우측 담장내에 자리하고 있으며 어초은과 고산사당은 담장 밖 뒷 편 우측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본 가옥의 주위는 한와를 얹힌 막돌담장이 반듯하게 둘러져 있다.
*은행나무
녹우당 집 앞과 전시관 뒤편에 3그루의 은행나무가 있다. 고산의 4대조인 어초은 윤효정이 아들들의 진사시 합격을
기념하여 심은 것이라고 하며, 녹우당 앞의 은행나무는 1982년에 도에서 보호수로 지정하였고 수령은 500년,
수고 20m, 둘레는 48m가량이다. 나머지 2그루 중 한 그루는 나무세가 아직도 고목이 되지 않은 채 크고 우람하며
한그루는 고목이 되어 몸통이 없어지고 가지부분만 약간 남아있다. 녹우당의 당호가 이 은행나무의 잎이 비처럼
쏟아진다 하여 ‘녹우당’이라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연못에 우주를 심다 - 백련지와 소나무 숲
선조들은 연못을 작은 우주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하늘을 뜻하는 동그란 작은 섬과 땅을 상징하는 네모난 섬을
연못 안에 함께 조성했다.
녹우당 연못은 성리학적 이상을 추구했던 해남윤씨 집안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백련지 옆의 소나무 숲은 연못을 조성할 때 나온 흙으로 조성했다고 한다. 소나무숲과 연못의 형태는 마음심(心)자를
이룬다.
녹우당 연동마을은 본래 ‘하연 연꽃이 피는 마을’ 이라고 하여 ‘백련동’이라 불렀다.『동국여지지』에도
“해남 백련동은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얀 연꽃이 많이 피어 백련동이라 한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 연지에서 백련동의 이름도 연유한 것으로 보고 있다.
연지는 어초은 윤효정 때부터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 연못을 파고 연을 심은 것은 어초은이
덕음산의 장중한 덕을 통해 선비의 지조와 절개의 의미를 담고 있는 연꽃을 심어 성리학적 이상세계를 구현하고자
조성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풍수지리학적으로 연동마을의 터는 불(火)의 기운이 강한 녹우당 종가의 집터에 불과 바람을 거두고
부족한 물을 얻는 장풍득수(藏風得水)의 비보(裨補)적 기능으로 만들어 졌다고 할 수 있다.
연지와 함께 소나무 숲 또한 마을의 허한 곳을 막아주는 전통적 비보의 기능을 갖추고 있어 연지와 소나무 숲의
조성이 이러한 풍수적 기능에 의해 녹우당을 더욱 완벽한 형국으로 만들기 위해 조성한 것으로 보고 있다.
과학적으로 해석할 때 이 연지와 송림은 마을 아래에서 불어오는 여름철의 습한 기운을 걸러서(정화) 녹우당 일대가
맑고 청정한 기운을 갖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보기도 한다.
연지는 연못을 파고 난 흙으로 동산을 마음심(心) 형태로 조성하였다고 하며 이는 성리학적 이상향을 추구하고자
했던 어초은의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소나무가 심어져 있는 연지 가운데 섬은 정자가 있었다고 하며 녹우당
원림에서도 핵심적인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비자나무숲
어초은 묘소를 지나 호젓한 숲속 산책길을 따라가면 덕음산 자락에 자라한 천연기념물 제241호로 지정된
비자나무숲을 만난다. 가장 큰 나무가 높이 20m, 가슴 높이의 지름이 1m 이상이나 된다.
명품 숲으로 지정된 덕음산 비자나무숲은 500여 년 전 해남윤씨 종택의 선조가 '마을 뒷산에 있는 바위가 노출되면
이 마을이 가난해 진다'하여 심었다고 전해진다.
이곳 비자나무에서 나오는 비자 열매는 비자강정으로 종가의 전통음식으로 전해 내려온다.
*서울양반가 닮은 건축 - 고산윤선도 고택
해남의 민가건축으로는 가장 대표적인 고산 윤선도 고택(사적 제167호)은 조선중기에 건립된 호남지방의 대표적인
상류주택으로 그 규모도 크며 구조 및 양식이 풍부하여 한국 상류주택연구의 중요한 대상이 되는 고가이다.
*서울,경기 양반가 닮은ㅁ자 모양 고택 -녹우당
녹우당은 안채와 사랑채가 경기, 서울지방 양반가 고택 처럼 건물모양이 ㅁ자이다. 추운지방도 건물모양이 ㅁ자이다.
처음에는 ㄷ자 모양이었는데 이후 녹우당 사랑채가 더 지어지면서 ㅁ자가 됐다.
남쪽지방 집모양은 -자형이나 ㄴ자이다. 녹우당은 서쪽을 바라보고 있어 처음에 ㄷ자로 했다.
사랑채의 상량문에 「함풍8년무년4월병오초8일계축시중주 상목양 」이란 기록이 있어 철종 9년(1858)에
대대적인 수리를 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사랑채
사랑채는 녹우당에서 핵심적인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채는 사대부가에서 남자들의 활동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공재의 절친한 친구였던 옥동 이서가 써준 ‘녹우당’ 현판이 붙어 있어 더욱 상징성을 띠게 한다.
이곳에는 ‘녹우당’을 비롯 이광사의 글씨인 ‘정관(靜觀)’, ‘운업(芸業)’등의 현판도 함께 걸려 있다.
더욱이 사랑채는 고산이 수원에 있을 당시 효종임금이 사부였던 고산에게 하사한 집이어서 그 의미를 더하게 하는데
고산은 봉림대군(효종)의 스승이었다. 녹우당 사랑채는 수원에 건립했던 것을 고산이 82세 되던 1669년 뱃길로
옮겨와 현 위치로 이건한 것이라고 하며 옥동 이서가 쓴 '녹우당' 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사랑채 건축 구조
고산고택의 사랑채는 ‘ㅡ’일자형 평면이나 좌측의 정면 2칸이 한단 낮게 아래로 내려와 있고 서로 동선의 연결도
안 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2구간으로 분리되어 진다. 우측의 사랑본채는 전면과 우측면에 퇴를 둔 4칸 집으로
좌 우 측에 각각 2간씩 사랑방과 대청을 배치하였으며 사랑방 뒤편으로는 반칸 폭의 골방을 꾸몄다.
좌측구간은 1간방과 전면 툇마루 좌측으로 1간 마루를 설치하였다.
사랑채의 앞쪽은 겹처마 양식의 차양(遮陽)을 하고 있어 특징을 띠고 있다.
구조는 다듬돌바른층쌓기의 비교적 높은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방주(전면과 우측면의 퇴주는 두리기둥)를 세운
4량집이며 도리는 장설로 받혀진 납도리를 사용하였다. (후면의 도리밑은 장설받침 없음)
이 건물의 전면에는 반가(斑家)의 사랑채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도형을 설치하였는데 이러한 구조물 역시 흔하게
볼 수 없는 구조물이다.
*녹우당에는 여자 남자 공간이 따로
사랑채(남성들의 공간) - 사랑채는 남성들의 공간이다. 조선시대에는 남녀와 양반과 상민과의 차이가 건물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사랑채는 주인집 남자와 손님들이 기거하는 공간이다. 찾아오는 사람들과 또 사랑채와 마주보고
있는 행랑채 때문에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동적 공간이다.
*안채(여성들의 공간)
여성들의 공간이자 정적인 공간이다. 조선시대 양반가옥의 안채들은 모두 안쪽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으며
사랑채를 통해 연결돼 있지만 안채를 향하는 문이 따로 있다. 사랑채와 안채의 문을 따로 둬 여성과 남성공간이라는
의미를 확실히 했고 또한 서로 붙여있으면서도 문을 따로 둬 독립성을 두고 있다.
*처음에는 99칸 집 지금은 55칸 남아
녹우당은 고산 윤선도 선생이 수원에 있을 당시 효종대왕이 스승이었던 고산에게 하사한 집으로 고산이 82세
되던 1668년 이 사랑채를 뱃길로 해남까지 옮겨와 다시 지은 집이다.
현재 이 집에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 헛간, 안사당, 어초은 사당, 고산사당 등이 있다.
원래 호남 양반집의 건축양식은 ‘ㄱ’자이거나 ‘ㄴ’자 집인데 녹우당이 들어서면서 서울지방 양반가와 같이
'ㅁ'자 집이 되었다. 이 집은 아흔 아홉 칸이었다고 하는데 별채가 불에 타 없어지고 지금은 55칸만 남아 있다.
*안채
안채는 현재 종손이 거처하고 있는 곳으로 사랑채 옆으로 들어서면 서쪽으로 트인 ‘ㄷ’자형 평면으로자리 잡고 있다.
건물은 서쪽으로 중앙에 3간의 대청을 두고 그 좌, 우측 아래로는 방과 부엌, 창고 등을 적절히 배치하였다.
그리고 툇마루는 대청 전.후면, 안방 전면, 건너방 전 후면 등 비교적 여러 곳에 설치하였다.
구조로는 막돌바른층쌓기의 비교적 낮은 기단상에 막돌초석을 놓고 방주(대청과 안방 전면의 퇴주는 두리기둥)를
세웠으며 가구는 4량가로 되어 있다. 도리(道里)는 납도리를 썼으나 종도리(宗道里)만은 굴도리를 사용하였고
대양위에는 사다리꼴의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게 했다.
그리고 대청 전면의 퇴주상부에는 장설밑으로 밑면을 굵게 조각한 보아지를 두었다. 창호는 대청에 4분합의 띠살문을
달아 들쇠에 매어 달게 하였으며 각 방에는 밖으로 띠살덧문을 달은 미닫이문을 설치하였다.
안채의 건물에서 특히 주목되는 시설물로는 안방의 아래쪽 부엌과 건너방 부엌 상부에 설치한 솟을지붕형태의
환기용 시설물이다. 이러한 설비는 우리나라 전통가옥에서는 흔치 않은 시설물이라 이다.
안채의 마당 가운데에는 굴뚝과 함께 작은 화단이 만들어져 있어 단아한 느낌을 갖게 하며 여러 가지 화초들이
심어져 있다. 안채는 성종3년(1472년)에 지어진 것으로 전하여진다.
*녹우당(綠雨堂) 현판
사랑채에 걸려 있는 현판으로 공재 윤두서와 절친한 사이였던 옥동 이서가 써준 것으로 이로 인해 이곳이
‘녹우당’이라는 당호로 불리게 되었다.
녹우당의 당호가 유래된 것은 여러 이야기가 있는데 그중 ‘녹우당 앞의 은행나무 잎이 바람이 불면 비처럼 떨어지기
때문’에 유래됐다는 이야기와 ‘집 뒤의 대나무 숲에서 부는 바람을 표현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옥동 이서는 녹우(綠雨)가 옛 선비들의 절개나 기상을 표현할 때 자주 사용하였기 때문에 해남윤씨가와
공재의 철학 및 학문적 사고에 견주어 ‘옛 선비들의 절개와 기상을 담아 신록의 대지에 성장과 동력의 영양분을 갖게
해주는 푸른 비’를 뜻하는 ‘녹우’를 당호의 이름으로 정한 것으로 보고 있다.
녹우는 절기상 4월 20일 경의 곡우에서 6월 20일경 내리는 비를 말하고 있어 녹우당의 원림을 옥동 이서의
철학적 사고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정관(靜觀)
이 글은 ‘선비는 조용히 홀로 있을 때에도 자신의 흐트러진 내면의 세계를 살펴 고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원교 이광사의 글씨이다.
원교 이광사는 ‘동국진체’를 완성하였는데 동국진체는 공재 윤두서와 옥동 이서가 개발하여
백하(白下) 윤순(尹淳, 1680~1741)을 거쳐 원교로 이어졌다.
*운업(芸業)
운(芸)은 ‘잡초를 가려 뽑아 숲을 무성하게 한다’는 의미가 있고, 업(業)은 ‘일이나 직업, 학문, 기예의 뜻’을
지니고 있어 ‘늘 곧고 푸르며 강직한 선비’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어 녹우당 선대 당주들의 이상과 뜻을 담고 있다.
❍솟을 대문과 행랑채
*행랑채(하인의 공간)
조선시대에는 하인들이 거주하는 공간이 따로 있었다. 녹우당도 하인들이 거주한 행랑채가 있다.
*행랑채 건축
행랑채는 솟을 대문을 가운데로 하고 ‘ㄱ'자형과 우측 아래쪽에 건립된 ‘一’자형의 2채가 있다.
솟을 대문을 사이로 방과 곡간, 마굿간, 부엌 등을 적절하게 배치하고 있다.
본 가옥에서 행랑채는 사랑채 앞쪽의 ㄱ자형 문간행랑채로서 1간의 솟은 대문간을 내었으며 우측 아래쪽에 건립된
일자형의 2채가 있다. 구조는 막돌초석위에 방주를 세운 3양가의 민도리집이다. 1자형은 우진각지붕의 민도리집으로
구조는 ㄱ자형과 같은 구조이다.
❍ 건물 안에 여름도 있고 겨울도 있다
우리의 한옥 건물에는 여름과 겨울 공간이 따로 있다. 온돌방은 겨울 공간이고 나무 마루 거실은 여름 공간이다.
❍ 정원은 뒤뜰에
한옥 건축에 있어 정원은 건물 뒤편에 자리한다. 건물 앞마당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동적 공간이기에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할 수가 없다. 사람의 왕래가 없는 뒤뜰에 정원을 만들고 방안에 조용히 앉아 뒷문을 통해 자연을 감상한다.
❍정원수는 낙엽수
우리 선조들은 유난히도 자연을 사랑했다. 집안에 심은 나무도 활엽수 보다는 낙엽수를 심었다. 봄에는 잎이 나는
나무를 보고 여름에는 잎이 무성한 나무를, 가을에는 단풍, 겨울에는 새하얀 눈에 쌓인 나무을 보기 위해서다.
사철 변화지 않는 사철나무나 인공적인 연못은 마당에 두지 않았다.
*사당(죽은 사람의 공간)
집안에 선조를 모시는 사당이다. 조상을 중히 여겼던 조선시대에는 산자와 죽은 자의 경계가 없었다. 따라서 집안 안에
사당을 두어 4대조까지 모시고 5대조가 되면 산으로 이장, 시제로 제사를 대신했다.
사당은 주로 집 맨 뒤쪽에 위치한다. 순조 22년(1822)에는 어초은 사당을 중수하였다.
*안사당
현존 5대봉사를 하고 있는 안사당은 순종 21년(1821)에 세웠으며 안사당은 정면 3간, 측면 1간 반의 맞배집으로
측면 반간폭에는 툇마루를 설치하였으며 그 안쪽으로는 우물마루를 깐 마루방을 두었다.
구조는 막돌허튼돌쌓기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그 위에 방주(정면 퇴주만은 원주를 세운 4양구조의 납도리집이다.
*고산사당
어초은 사당 아래쪽에 자리하고 있는고산 사당은 영조 3년(1727년)에 불천지위(不遷之位)로 지정되어 모셔지고 있다.
불천지위는 4대조를 모시고 묘로 가는 대신 영구히 모실 수 있게 하고 있는데 보통 국가에서 공이 인정될 때 불천지위로 지정되어 모시게 된다.
고산사당은 전면에 3개의 문이 있는 정면 3칸, 측면1칸의 맛배집 건물로, 매년 이곳에서 고산에 대한 기제사를 지낸다.
*어초은사당
어초은사당은 정면 3간,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 건물로 전면 반간폭에는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구조로는 막돌허튼층쌓기의 낮은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전면의 퇴주초석은 상부를 원형으로 가공하였음)
방주를 세웠으며 (퇴주는 원주임) 기둥머리는 창방으로 결구시켰다. 가구는 1고주 5양가이며 도리는 장설사이에는
같은 간격으로 소루를 배치하였으며 공포는 쇠서의 상면이 복잡하게 층된 2익공양식이다.
*추원당
추원당(追遠堂)은 이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고산선생의 고조부(4대조) 어초은 윤효정의 재각으로 현 종손의 조부인
윤정현(1882~1950)이 1935년에 발의하여 추원당을 건립하였으며, 묘비를 조석(鳥石)으로 세웠다.
시향(時享)은 음력11월 15일 어초은사당에서 지내고 이곳 추원당에서는 제관과 참배하는 후손들이 숙식(宿食)을 하며
문중회의를 한다. 추원당 역시 녹우당 사랑채 건물처럼 처마에 이어 설비한 겹처마의 양식이 특이하다
추원이라 먼 조상이나 부모를 추모하여 정중히 공경을 다함을 뜻 한다.
어초은은 녹우당에 처음 터를 잡고 해남윤씨가를 중흥시킨 인물로 녹우당 뒤 묘와 함께 녹우당 공간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녹우당의 북쪽 숲에 위치하고 있다.
*고산 윤선도 유적지
이 곳은 조선조의 문신(文臣)이요, 국문학상 대표적인 시조시인으로 일컫는 윤선도尹善道(1587-1671) 선생의
유적지(遺蹟地)이다. 선생의 자(字)는 약이(約而), 호(號)는 고산(孤山)또는 해옹(海翁)이다.
선생은 광해(光海)4년(1612)에 진사(進士)되고, 4년후 성균관 유생(成均館儒生)으로서 권신(權臣)의 횡포를 지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벽지에 유배되었다. 광해 15년에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자 석방되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에
취임하였으나 곧 사직하고 이곳 향리(鄕里)에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인조6년(1628) 별시문과(別試文科)의 초시( 初試) 에 장원한 후 봉림(鳳林)과 인평(麟坪)을 모시는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고 한성서윤(漢城庶尹)과 예조정랑(禮曹正郞)을 역임하는 등 수차에 걸쳐 나라에 중용되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후에는 주로 완도(莞島)의 보길도(甫吉島)와 해남(海南)의 수정동(水晶洞) 및 금쇄동(金鎖洞)에
은거하여 자연에 들어 원림(苑林)을 경영하고 산중신곡(山中新曲)과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등 불후(不朽)의 명작을
이루어 조경문화(造景文化) 및 국문학(國文學)의 발전에 큰 공을 남겼다.
그 사이 효종(孝宗)의 부름으로 벼슬에도 나아갔으나 당쟁으로 다시 유배당하는 등 많은 파란을 겪다가
현종(顯宗) 12년에 85세로 졸(卒)하였는데 숙종(肅宗)원년에 신원되어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종되고 시호를
충헌(忠憲)이라 하였다.
*참고문헌
해남의 문화유산, 해남군, 목포대학박물관, 1986.해남 정윤섭, 향지사, 1997.
해남군문화유적길라잡이(김승기), 해남군, 2001. 땅끝해남, 해남윤씨 5백년요람지 녹우당, 고산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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