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윤탁 고택
- 상류층 별당채 갖춘 한옥건축을 보다
넓은 들판을 앞으로 하고 있는 현산면 초호 마을 앞 어귀에는 늙은 사장나무들이 줄지어 서있다.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마을의 중간쯤에 기와집 여러 채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곳이 윤탁가옥이 자리한 초호리마을이다.
이 마을은 현재도 10여 가구의 해남윤씨 후손들이 세거하여 살고 있는데 현산면 백포와 함께 한때 번성했던
해남윤씨 들이 일족을 이루고 살았던 마을이다.
이곳은 공재 윤두서(1668~1715)의 7째 아들 후손들이 모여 산 곳으로 이들이 남겨 놓은 유산들이라고 할 수 있다.
윤탁가옥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윤탁의 작은 아버지가 살았던 고택이 있고 오른쪽에는 윤탁의 조부 동생인
윤양하가 지어 살았던 고가가 있다.
❍ 이웃과 한 집처럼 왕래 - 고가의 구조
윤탁 씨는 서울에서 30여 년간 문화공보부에서 일하였으며 한때 영화진흥공사 사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윤탁고가는 옛 사대부 집의 모습을 원형 그대로 볼 수 있어 지난 1984년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15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집은 안채와 사랑채는 윤씨의 증조부 때인 1906년 무렵에, 그리고 행랑채는 1912년경인 조부 때에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안채의 상량문에는 1906년에 건립되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윤탁 고가는 전체적으로 완만한 경사지형을 3단으로 정지한 후 솟을대문부터 안채까지 정지된 지형에
직선 축으로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따라서 솟을대문을 거쳐 위쪽으로 계단을 오르듯 진입하게 되어있다.
윤탁 고가에서 한 가지 눈여겨볼 수 있는 것은 담을 사이로 옆집과 통하기 위해 만든 작은 쪽문과 목욕공간이다.
이곳은 윤탁 고가를 중심으로 3채의 고택이 집과 집 사이를 오갈 수 있는 작은 쪽문이 나있으며
3집 모두 실내에 목욕공간이 공통적으로 있음을 볼 수 있다.
보통 옛 상류주택의 공간 구조를 보면 안채와 사랑채 문간채, 그에 딸린 집들이 복잡하게 얽혀있어 서로의 공간을
연결해주기 위한 중간 문이나 자그마한 쪽문이 나있다.
별당채 뒤에는 왼쪽 윤탁씨 작은 아버지 댁으로 통하는 작은 문이 나있다. 이 문을 통해 수시로 쉽게 오갈 수 있게 되어
각각의 세 고택은 사는 영역이 다르지만 서로 한 집처럼 왕래하며 살았음을 알 수 있다.
❍ 지형 이용한 건축 - 공간 구조
윤탁 고가가 있는 초호 마을은 뒷산을 배경으로 경사진 지형에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윤탁 고가도 이러한 지형을 잘 이용해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경사면을 크게 3단으로 나누고
행랑채와 사랑채 안채가 들어서 있다.
이에 따라 행랑채에서 사랑채를 거쳐 안채까지 진입하는 과정이 계단을 오르듯 매우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있다.
전통고가들이 보통 풍수적 관점에서 이러한 주변의 지형을 잘 이용하여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윤탁 고가도 마찬가지다.
안채까지 오르는 과정을 살펴보면 솟을대문은 전면에 사방으로 개방된 바깥마당을 두고 정면에 ‘ㄴ’자로 구부러진
문간채가 자리 잡고 있다.
여기서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사랑마당이 나타나며, 1.4m 가량의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자리한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 앞은 여러 가지 나무가 심어진 정원으로 되어 있어 행랑채를 들어서면 바로 나타나는 사랑채의 전면을
어느 정도 가려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여기서 사랑채의 서쪽 모퉁이를 돌아 뒤꼍으로 가면 다시 2.4m 가량의 높은 축대 위에 안채와 별당채가 자리 잡고
있는데 안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오른쪽으로 돌아 중문(中門)을 지나야 한다.
이곳에는 안채가 ‘ㄱ’자 형태로 배치되어 있으며, 안마당 서쪽 맞은편에는 ‘ㄴ’자형의 별당채가 있다.
또한 안채 동쪽은 샘과 함께 가사 노동공간이 있으며 뒷마당은 다시 축대를 만들어 넓은 후원으로 조성하고 있다.
(이하 글자료 : 해남군청)
❍ 내부 공간
*행랑채와 사랑채
윤탁고가도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좌우에 늘어선 행랑채의 위세가 만만치 않다.
행랑채는 전체적으로 ‘ㄱ’자형으로 되어 있으며 상양문에 「壬子十月二十一日乙西柱立二十七日上樑」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1912년에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솟을대문 옆으로는 헛간과 일하는 사람들의 기거하는 방 등이 좌우로 배치되어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나오는데 이 사랑채는 다른 곳에서 보기 드물게 우진각 지붕으로 된
일자형 평면의 정면 7간 집이다.
우측으로부터 2간은 방, 2간은 대청, 2간은 사랑방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남향을 하고 있는 ‘ㅡ’자형 집으로 사랑채에 흔히 보이는 누마루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평범하게 보이는
사랑채다.
*문간채 건축
건물은 1912년에 건립된 'ㄱ'자형의 문간채이다. 평면구성은 집 안쪽에서 보아 맨 좌측에 2간은 뒷간으로(후면은 광)
그다음 2간은 광으로 꾸미고 다음 1간은 대문간으로 하였으며 그다음 1간은 광으로 하고 다음은 꺾어지면서
부엌을 드리고 맨 끝으로 1간방을 드렸다.
지붕은 대문간은 솟을대문이며 좌측지붕은 둘로 나누어서 층단으로 끼웠으며 끝은 우진각으로 처리했다.
우측은 중앙을 모임으로 하고 맨 머리는 박공으로 처리했다. 초석은 막돌초석이며 기둥은 방주를 사용하였고
바깥벽면은 막돌로 반화방장 처리하였다.
*사랑채 건축
사랑채 건물로는 보기 드물게 우진각 지붕으로 된 일자형 평면의 정면 7간 집이다.
건물 전·후로는 퇴(退)를 두었으며 평면구성은 우측으로부터 2간의 건너방, 2간 대청, 2간의 사랑방 순으로
배치하였으며 맨 좌측 1간은 겹형으로 방을 앞뒤로 2개 배치하였다. 사랑방에서 우측끝까지의 퇴부분에는 툇마루를
설치하였고 뒷 퇴에는 각 간마다 골방을 설치하였다.
기단은 3척 높이의 막돌 허튼층쌓기 구조이며 초석은 막돌초석이고 기둥은 모접기를 한 방주를 사용하였다.
기둥 위에서는 장혀로 받혀진 납도리와 퇴보로만 결구 되었으며 퇴보 밑에는 퇴보머리와 같은 선으로 잘리고
기둥 안쪽으로는 빗 잘린 보아지를 두었다. 가구는 2고주 5양구조로 도리는 모두 납도리이고 대양 위의 대공은
동자주형(童子柱形)으로 종도리를 받게 했다.
*목욕공간
사대부 건축에 특이한목욕공간이 있어 주목된다.
사랑채 옆에는 독립 건물로 된 목욕공간이 있으며 처음 지을 때는 사랑채 내에 있었다고 한다.
*안채와 별채
보통 넓은 평면에 자리 잡고 있는 건물에 비해 단을 쌓고 높은 곳에 자리 잡은 건물이 더 훨씬 위용이 있어 보인다.
윤탁고가의 안채는 이러한 경사지면의 제일 위쪽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안정감이 들기도 하지만 멀리서 보면
집의 위용이 잘 느껴진다.
안채 상량문에는 「光武十年內牛 十日月 二十七日 庚申堅柱 同十二月 初三日 乙丑 辛巳時 上樑 丑坐」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1906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사랑채와 별당채도 같은 연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안마당의 정원에는 적 벽돌로 쌓은 굴뚝이 높게 세워져 있어 장식적인 효과도 느껴지며 정원에는 자연석을 이용한
원형의 화단이 조성되어 갖가지 꽃이 피어있다.(근래에 철거됨)
*안채건축
윤탁고가의 안채는 팔작지붕에 ‘ㄱ’자형 집으로 중부지방 주택의 평면구조를 하고 있다.
별당채까지 포함한다면 전체적으로 ‘ㄷ’자형을 하고 있다.
가로간은 전면에 퇴를 두고 중앙에 3간 대청을 꾸미고 좌측으로는 건너방을 배치하였으며 세로간은 전, 후로
퇴를 두어 앞쪽에 2간 부엌을 두고 뒤쪽으로는 2간 안방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꺽어진 모퉁이에는 골마루를 설치하여
안광으로 이용하게 하였다.
큰방 앞퇴에서부터 건너방 끝까지는 툇마루를 설치하였으며 마루가 꺽어지는 부분에는 통행의 편의를 위해
세모마루를 덧붙였다. 기단은 네모난 화강석으로 바르게 1벌대로 쌓았으며 초석은 막돌초석이며 기둥은 툇마루를
설치한 전면에만 두리기둥을 사용하였고 그 외는 모두 방주를 썼다.
구조는 1고주 5양으로 기둥상부에서는 퇴보와 납도리로 결구시켰으며 퇴보밑면에는 기둥안쪽으로는 사선으로
바깥쪽으로는 직선으로 잘린 보아지를 끼웠다. 안마당에는 대청 앞으로 적벽돌 굴뚝이 높게 세워져 있으며
중앙에는 자연석으로 갓을 돌린 원형의 화단이 조성되어 있다.(근래에 철거됨)
*별당채
별당채는 팔작지붕 와가이다. 가로간과 세로간 모두 앞쪽에 퇴를 두어 툇마루를 설치했다.
가로간 2간에는 셋방을 배치하였으며 가로간은 앞쪽으로 2간 대청을 두고 맨 끝에는 머리방을 두었으며
머리방 북쪽의 퇴부분에는 높은 누마루를 시설하였다. 기단은 안채와 같은 형식이며 초석은 막돌초석이나
가로간 퇴부분의 우측끝과 그 뒷편의 것만은 8각단면의 장초석을 사용하였다.
기둥은 전면의 퇴부분만 두리기둥이며 그외는 모두 방주를 세웠고 기둥머리에서는 안채와 동일한 기법으로 보아
도리를 결구시켰다. 가구는 1고주 5양가이며 도리는 모두 납도리를 사용하였고 도리밑면에는 장설로 받쳤다.
❍ 상류주택에는 별당과 산정사랑이 있다.
별당은 안사랑으로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주인이 사용하면 안채에 준하고 바깥주인이 사용하면 사랑방에 준한다.
산정사랑은 경치 좋은 곳에 세우는 별도의 사랑으로 집 안에 두기도 하고 본채와 떨어져 가까운 산에 세우기도 한다.
해남지역에서 별당이 남아있는 고가는 거의 없는 상태이다. 따라서 윤탁고가에서는 당시 상류층 고택의 별당채가
어떤 형태로 남아 있는 가를 알 수 있다. 이곳은 안채에 준하는 역할로 별당채가 있는 경우로 볼 수 있다.
이곳 별당 채는 남쪽에서 보았을 때 ‘ㄴ’자를 뒤집어 놓은 형의 팔작지붕이다.
별당채는 제일 높은 기단 위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앞쪽으로 멀리 들판을 바라볼 수 있어 잘 가꾸어진 정원과
함께 별당 채에서 바라보이는 전경이 아름답다.
*참고문헌
해남군의 문화유적길라잡이(김승기), 1986. 해남, 정윤섭 향지사, 1997. 해남군사, 해남의얼, 해남의문화유사,
땅끝해남
*문화재정보
- 유형 : 중요민속문화재
- 지정번호 : 153호
- 지정일자 : 1984년 1월 14일
- 시대 : 조선시대
- 종류/분류 :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 수량면적(보유종별) : 일곽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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