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전통건축 갤러리 ■/경 북

경주 안강 독락당-3 ( 2014.07. )

 

 

 

 

 

옥산서원 부근에 있는 독락당(獨樂堂)은 회재가 살던 집의 사랑채로,

보물 제413호로 지정된 건물이다.

벼슬길에서 밀려나 고향으로 내려온 회재는 옥산계곡에서 자연과 책을 벗 삼으며

수도(修道)하는 은둔자의 삶을 살았다.

독락당을 지은 것은 그의 나이 42세가 되던 해인 1532년. 회재는 자신이 기거할

사랑채를 지어 ‘독락당(獨樂堂)’이라 이름 붙였다.

이듬해 독락당의 별당으로 ‘계정(溪亭)’을 지었다.

 

주변의 청산과 계곡을 사랑했던 그는 독락당에 살면서 경관이 뛰어난 곳에

이름을 붙였는데 이른바 ‘사산오대(四山五臺)’이다. 마을을 둘러싼 네 개의 산을

화개산(華蓋山), 자옥산(紫玉山), 무학산(舞鶴山), 도덕산(道德山)이라 부르고,

계곡 주변의 넓직한 암반석들이 품고 있는 수려한 경관들은 세심대(洗心臺), 관어대(觀漁臺),

탁영대(擢纓臺), 징심대(澄心臺), 영귀대(詠歸臺)라 불렀다.

 

자옥산에서 흘러내리는 계류를 따라 자리 잡고 있는 독락당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복잡하게 되어 있는 구조다. 세상을 등지고 은거하는 선비의 의지를 보여주듯

바깥의 사람들은 집 안을 쉽게 들여다 볼 수 없도록 하고, 출입도 어렵게 한 것인 듯하다.

 

여기에도 퇴계와 아계, 석봉 등의 글씨 편액이 곳곳에 걸려 있다.

‘옥산정사(玉山精舍)’와 ‘양진암(養眞庵)’은 퇴계의 글씨이고, ‘독락당’은 아계의 글씨다.

정자에 걸린 ‘계정’은 석봉의 글씨다.

(글출처 : 영남일보 김봉규기자)

 

 

 

 

 

 

 

 

 

 

 

 

 

 

 

 

 

 

 

 

 

 

 

 

 

 

 

 

 

 

 

 

 

 

 

 

 

 

 

 

 

 

 

 

 

 

 

 

 

 

 

 

 

 

 

 

 

 

 

 

 

 

 

 

 

 

 

 

 

 

 

 

 

 

 

 

 

 

 

 

 

 

 

 

 

 

 

 

 

 

 

 

 

 

 

 

 

 

       홀로 됨을 즐기는 고독의 집, 독락당 20120310

 

 

경북 안강에 "독락당(獨樂堂)"이라는 옛집이 있다.

조선 중종 때 성리학의 거두 회재 이언적(1491-1553)이 정쟁에 휘말린 후 낙향하여

지은 집이다. 원래는 태어나고 자란 양동마을로 돌아가야 했으나, 불혹의 나이로

중앙정치무대에서 쫓겨난 초라한 몸은 처가살이가 싫었을까, 둘째 부인이 사는 자옥산 기슭의

집으로 돌아간다.

이 집은 둘째 부인이 지은 안채와 숨방채, 아버지가 지은 작은 정자가 있었는데,

회재는 주변의 경관을 끌어들이는 탁월한 건축수법으로 이 집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증축하여 독락당이라 이름하며 중앙정치로 복귀할 때까지 7년을 '홀로 즐기며' 살았다.

 

내가 오래 전 이 집을 처음 갔을 때 우선 그 집 높이가 몹시 낮아 의아했다.

담장도 낮지만 그 안에 있는 집들은 마치 땅으로 꺼진 듯 낮았다.

필경 후대에 세웠을 솟을 대문 만이 높아 본채와 부조화를 이루는데,

당혹스러운 것은 대문을 들어서 앞마당을 지난 다음 어디로 가야 할지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세 개의 입구가 있는데, 오른쪽 하나는 계곡으로 연결되는 좁은 통로였고,

나머지 두 개의 문 중에서 왼쪽 하나를 열고 들어가니 깊고 길다란 마당이 있었다.

좌우 집의 높낮이가 달라 낮은 왼편은 하인들이 기거하던 숨방채고 오른 편은 안채다.

돌아보면 방금 지나온 문이 이 큰 집의 정문인 셈인데 그 크기가 너무도 작다.

아마도 이 좁은 마당을 가두기 위함일 게다.

안채의 마당은 그래서 더 비밀스런 세계로 보였다. 이곳을 나와 다시 그 입구 오른편 문을 열고

들어가면 너른 마당이 나오는데 사랑채인 독락당의 영역이다.

위엄 있는 다른 집의 사랑채와는 달리 불과 한 단 위에 세워진 네 칸의 독락당은

집 자체가 그리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담장으로 구획된 마당이 중심이고

이 마당은 담장너머 주변의 산들을 경계로 삼는 세계의 중심이 되어있었다.

문제는 이런 마당이 여기 하나가 아니라 이 집의 곳곳에 널려 있는 것이다.

맨 뒤편 사당은 영혼의 안식을 위해 두 개의 마당을 겹쳐 전혀 다른 세계를 만들고 있었으며,

창고로 쓰이는 공수간 마저 은밀한 마당으로 독립되어 있다.

 

가장 놀란 것은 이 집의 정자인 계정이었다. 사진으로 보던 아름다운 풍경을 두리번거리며

찾는데 뒤편 마당 구석의 건물이 계정이라고 했다.

그럴 수가...집의 동쪽 밖 계곡을 흐르는 자계천 너머에서 그토록 아름답게 보였던 건축이만,

놀랍게도 이 정자는 집안에서는 마당을 형성하기 위한 벽체의 일부로서만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 집의 모든 건물은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철저히 마당을 형성하기 위한

한낱 도구였으며, 각기 다른 마당은 각기 독립된 세계였다. 불혹을 넘어 지천명을 앞둔 회재는

그런 마당 어디에서도 은둔하며 '독락'하려 한 것이다.

 

 

이와 극명하게 비교되는 집이 독락당과 같은 시대에 서양 땅에 지어진다.

서양건축의 역사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만들면서 지금에 이르도록 가장 중요한 텍스트가 된

"빌라로툰다"라는 집이다. 회재보다 17년 후에 태어난, 르네상스 최고의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1508-1580)가 은퇴한 사제를 위해 설계한 이 집은,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 비첸차의 교외에 세워졌다. 비첸차는 팔라디오가 설계한 올림피코 극장을 비롯한

여러 건축으로 "팔라디오의 도시"로 불리며 도시전체가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르네상스의 도시이다.

한적한 동네의 가장 높은 언덕 한 가운데에 세워진 이 집은 정방형의 평면을 십자로 가른 다음

가운데 둥근 홀을 두어 이를 로툰다라고 불렀다. 이 로툰다 홀의 둥근 천정과 벽면에 그려진

프레스코 그림에는 신들로 둘러싸인 우주가 묘사되어 있다.

홀의 중앙에 서면 동서남북으로 뚫린 통로를 통해 밖의 풍경이 한 눈에 파악되는데,

정점에서 내려오는 빛을 받으며 나는 세상에서 가장 중심 된 자인 듯 존재감을 드높이게 된다.

그러니 이 집은 자연과 대립적 관계이며 그 지배의 우월을 나타내기 위해 언덕 위에

우뚝 솟는 게 당연했다.

나의 존재를 세계의 지배자로 만들어 주는 이 기념비적 집은 열광적 반응을 얻었다.

그 후에 생긴 수 많은 집들이 이 집을 모사하였고 심지어 20세기 최고의 건축가 르코르뷔제를

비롯한 현대의 건축가들이 지은 집들도 이의 번안이었다. 그럴 만큼, 이 집은 수백 년 동안

서양건축의 핵심적 위치에 있어왔고 어쩌면 지배체계를 따지고 종속관계를 중요시해 온

서양문화의 중심가치를 상징한 집이었다.

집은 그저 주변의 풍경과 마당을 경계 짓는 수단일 뿐이라는 독락당과 정반대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빌라로툰다가 혼자 사물을 지배하며 즐기는 집이니 한자로 쓰면 역시

독락당 아닌가. 그렇다면 이 집과 전혀 달리 회재가 지은 독락당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마음이 홀로 서야 이(理)가 생긴다"는 회재에게 독락의 뜻은

'혼자서 즐기는 집'이 아니라 '홀로 됨을 즐기는, 고독의 집'이었다.

(글 : 건축가 승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