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17] 경주 안강 ‘옥산서원’
글 = 영남일보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퇴계 이황(1501~1770)은 조선 성리학의 최고봉이자
조선 성리학을 세계적 철학의 반열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공자나 주자처럼 ‘이자(李子)’로도 불리던 퇴계는 타고난 자질에다 깊은 사색과
충실한 연구로 뚜렷한 스승 없이 학문을 대성한 위인이다.
물론 간접적으로 사숙(私淑)한 선배들이 없을 수 없다.
그중 회재(晦齋) 이언적(1491~1553)은 퇴계가 각별히 존숭한 인물이다.
회재의 학설은 퇴계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회재는 퇴계가 각별히 존경하며
챙겼기 때문에 그 학문이 빛을 발하고 명성도 더욱 높아질 수 있었다.
퇴계와 회재의 이런 관계는 회재의 서자(庶子)인 잠계(潛溪) 이전인의 각별한 효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잠계는 부친인 회재가 유배지인 평안도 강계에서 별세하자
극심한 고난을 겪으면서 직접 그 시신을 고향인 경주까지 운구해 장례를 치른 일화로
유명하다. 잠계는 효심이 각별함은 물론, 퇴계를 비롯한 선비들을 찾아 부친의 학문과 사상을
선양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퇴계가 회재의 행장(行狀)을 쓴 것도 그 덕분이다. 그래서 ‘무잠계무회재(無潛溪無晦齋)’,
즉 ‘잠계가 없었다면 회재가 없다’라는 말이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회재의 성리설(性理說)은 누구에게 특별히 배운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으로 정립한
독창적인 이론으로, 퇴계 등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한국 성리학사에서 높이
평가할 만한 것이다.
퇴계는 이런 회재에게 행장에서 보기 드물게 ‘선생(先生)’이라는 호칭을 붙였다.
회재와 퇴계의 학설을 이은 학자들은 ‘회퇴학파’라고도 불린다. 그리고 회재와 퇴계는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와 함께 ‘동방오현’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런 회재를 기리는 옥산서원(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의 대표적 편액들을 살펴본다.
퇴계가 회재와 각별한 관계를 맺어서 그런지 옥산서원과 그 부근에 있는,
회재가 벼슬에서 물러난 뒤 마련해 살았던 독락당에는 퇴계 글씨 편액이나 석각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추사, 석봉 등 조선의 명필 편액이 즐비한 옥산서원
회재는 24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벼슬길에 올랐으나 1530년 김안로 세력에 밀려나게 되자
낙향, 안강 자옥산 기슭에 독락당을 짓고 은둔하며 성리학 연구에 몰두한다.
당시 호를 자계옹(紫溪翁) 또는 자옥산인(紫玉山人)으로 짓기도 했다.
자계는 독락당 옆으로 흐르는 하천의 이름이다.
김안로가 사사(賜死)된 후 중종이 회재를 다시 불러들여 여러 벼슬을 하게 되나,
명종 즉위 후 문정왕후 섭정 시절(명종 2년) 양재역벽서사건(1547년 9월 문정대비의
수렴청정과 이기 등의 농권을 비방하는 내용의 양재역 벽서가 발견된 사건)에 연루돼
평안도 강계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옥산서원은 회재가 별세한 지 20년 뒤인 1572년(선조 5),
경주부윤 이제민이 사림의 뜻에 따라 회재가 은둔했던 곳을 서원 자리로 정하고,
그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한 사당을 세웠다. 2년 후인 1574년 경상도 관찰사 김계휘의
제청에 의해 선조로부터 ‘옥산서원’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사액서원이 되었다.
계곡 가에 위치한 서원의 정문인 역락문을 들어서면 누각이 나온다.
‘역락문(亦樂門)’ 편액은 조선의 명필 석봉 한호(1543~1605)의 글씨다.
이곳에는 석봉의 글씨 편액이 곳곳에 있다.
누각 아래를 지나 마당에 오르면 서원 강당 건물인 구인당(求仁堂)을 마주하게 된다.
뒤로 돌아 통나무 계단으로 누각에 오를 수 있다.
누각 안에 걸린 누각 이름 ‘무변루(無邊樓)’ 편액 글씨도 석봉이 썼다.
전형적인 석봉체 글씨다. ‘무변루’라는 당호는 ‘무변풍월(無邊風月)’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이 편액 좌측에 작은 글씨로 ‘모자람도 남음도 없고, 끝도 시작도 없다. 빛이여, 맑음이여!
태허에 노닐도다(靡欠靡餘 罔終罔始 光歟霽歟 遊于太虛)’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소재 노수신(1515~1590)이 나중에 따로 추가한 것으로, 무변루 이름의 의미에 관한
주석 글이다.
소재는 무변루뿐만 아니라 다른 편액(亦樂門, 求仁堂, 體仁廟, 兩進齋, 偕立齋)에도
이 같은 주석 글을 달아 놓아 눈길을 끈다.
소재는 회재보다 24세 연하이나, 회재와 함께 을사사화로 인해 19년간 유배생활을 한
인물로 회재의 성품과 학문을 잘 알았다. 그는 회재를 ‘당세무비(當世無比)의 학자’로 믿었다.
◆두 번이나 나라에서 ‘옥산서원’ 편액 내려
구인당을 바라보면 건물 처마에 걸린, 굳세고 강직한 느낌을 주는 글씨의
대형 편액 ‘옥산서원(玉山書院)’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건물의 한 칸을 꽉 채우고 있다.
추사 김정희(1786~1856) 글씨다. 이 편액은 서원 창건 때 단 것이 아니다.
편액 왼쪽에 작은 글씨로 쓴 ‘만력갑술사액후260년기해실화개서 선사
(萬曆甲戌賜額後二百六十年己亥失火改書 宣賜)’라는 글귀가 있어 추사가 이 편액 글씨를 쓴
연유를 알 수 있다.
1574년(선조 7) 사액 후 266년이 지난 기해년(1839)에 화재로 구인당이 소실돼 중건하면서
다시 써서 왕(헌종)이 하사한 편액이라는 내용이다.
1839년이면 추사가 54세 때 쓴 것임을 말해준다.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되기 직전의 일이다.
추사는 1840년부터 9년간 제주 유배생활을 했다.
추사의 이 글씨에 대해 유홍준 교수(명지대)는 완당평전에서 “전서의 굳센 맛을 살려내
이른바 ‘솜으로 감싼 쇳덩이’ ‘송곳으로 철판을 꿰뚫는 힘으로 쓴 글씨’라고 이야기되는
추사체의 힘이 그대로 느껴진다”고 평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편액을 직접 보니,
전체적 느낌은 그렇다고 할 수 있으나 몇 번 덧칠한 때문인지 몰라도 칠이나 각의 상태가
좋지 않아 그런지 그 평에 크게 공감이 가지 않았다.
강당 마루에 오르면 추사 편액 뒤쪽에 걸린 또 하나의 ‘옥산서원’ 편액을 만날 수 있다.
추사 글씨 편액보다 크기가 작은데, 이것이 처음에 나라에서 내린 글씨로 된 편액이다.
글씨는 아계(鵝溪) 이산해(1539~1609)가 썼다. ‘토정비결’의 저자인 토정(土亭) 이지함의
조카이기도 한 아계는 영의정까지 지낸 문신으로 명필로도 유명했다.
6세 때부터 붓글씨를 쓴 아계는 어릴 때부터 글씨가 뛰어나 명종에게 불려 가 그 앞에서
글씨를 쓰기도 했다고 한다.
편액의 왼쪽을 보면, 옛날 편액 글씨를 베껴 써 만들어 걸었다는 의미의
‘구액모게(舊額摹揭)’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로 보아 건물이 불탈 때 편액은 다 타지
않았거나, 아니면 그 글씨 원본이 남아 있어 그것으로 다시 새겨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계가 이 편액 글씨를 쓰게 된 것과 관련해 일화가 전한다.
선조가 옥산서원에 사액할 때 누구에게 글씨를 맡길 것인가를 두고 어전 회의를 했다.
당시 석봉이 글씨로 이름을 날릴 때여서 다들 그를 암묵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석봉의 나이가 젊어서, 선조 본인도 그의 글씨를 좋아했지만 예의상 대신들에게
글씨를 쓰고 싶은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의외로 아계가 쓰겠다고 나섰다.
아계의 지위 등으로 보아 누가 뭐라고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어서 그가 결국 편액 글씨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석봉은 여러 다른 건물의 편액 글씨를 썼는데, ‘역락문’ ‘무변루’와 함께
‘구인당’도 그의 글씨다.
한편 두 개의 ‘옥산서원’ 편액은 보통 편액과 달리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되어 있는데,
이는 임금이 하사한 편액이라서 그렇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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