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취암은 산청군 소재지에서 동남 방향 약 10km에 위치한 대성산(일명:둔철산)의
기암절벽 사이에 자리한 사찰로 그 상서로운 기운이 가히 금강에 버금한다 하여
옛부터 소금강이라 일컬었다.
신라 신문왕 6년(병술, 서기 686년)에 동해에서 장육금신(부처님)이 솟아올라
두 줄기 서광을 발하니 한줄기는 금강산을 비추고, 또 한줄기는 대성산을 비추었다.
이때 의상조사께서 두 줄기 서광을 쫓아 금강산에는 원통암을 세우고
대성산에는 정취사를 창건하였다.
정취암에서 북쪽으로 약 4km에 위치한 율곡사는 원효스님께서 창건하셨는데,
정취사와 율곡사에 각기 주석하고 계시던 의상 스님과 원효스님께서는 수시로 왕래하며
수행력을 서로 점검하고 탁마 수행한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조선 중기의 기록에는 정취사로 사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조선후기에서 구한말 사이에 조성된 불화에는 정취암으로 기록되어 있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취암은 정취관음보살을 본존불로 봉안하고 있는 한국유일의 사찰이다.
신라 헌강왕 2년(무인, 858년) 굴산 범일선사가 낙산사에 봉안했던 정취보살상을
고려 고종 41년(갑인, 1254년)에 명주성이 몽고병에 함락될 때 야별초 10인과
사노인 걸승이 땅속에 묻어 난을 무사히 피하게 되었다.
그 후 기림사 주지스님 각유선사가 이 정취보살상은 국가의 신보이니 어부(궁궐)에
모실 것을 왕에게 아뢰어 왕의 명을 받아 어부에 모시게 되었다.
고려 공민왕 3년(갑오, 1354년)에 화경, 경신 두 거사가 정취사를 중건한 후
어부에 봉안되어 있던 정취보살상을 정취사로 이운하여 봉안하게 되었다.
정취사는 고려 공민왕의 개혁 의지를 실현하고 원나라와 이후의 명나라로부터
관섭을 극복하려는 개혁 세력의 주요한 거점이 되었는데, 산청군에 전해지는
문가학과 정취암에 얽힌 설화는 당시 보수 세력과 개혁 세력간의 갈등을 설화로
각색 것으로 사료된다.
정취암은 창건 이래 고승납자들의 요결처가 되었으며, 조계종 종정을 역임하신
고암 대종사와 성철 대종사께서도 한때 주석하시며 정진 하셨다.
(글자료 :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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