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충사(表忠寺)는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재약산에 있는 사찰이다.
654년(태종무열왕 1)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죽림사(竹林寺)라 하였다.
1286년(고려 충렬왕 12)에는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一然) 국사가
1,000여 명의 승려를 모아 불법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839년(조선 헌종 3) 사명대사의 법손(法孫)인 월파선사(月坡禪師)가
사명대사의 고향인 무안면에 그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세워져 있던 표충사(表忠祠)를
이곳으로 옮기고 절 이름도 표충사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글출처 : 위키백과)
표충사와 표충비
임진왜란 때 나라를 분연히 앞장섰던 승병대장 사명대사의 구국의지를 기리기 위해
조선조 선조대왕은 명을 내렸다.
『사명대사에 고향에 전각을 세우고 그곳에 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여
훗날까지 스님의 충혼을 모시도록 해라.』
임금의 명이 떨어지자 사명대사의 출생지인 경남 밀양군 무안면 산강리에는 사당이 세워지고
스님의 영정이 봉안됐으며, 선조는 이 전각을 「표충사」라 사액했다.
『누구든 이 표충사 근처를 어지럽히거나 신성시 하지 않을시는 엄히 다스리도록 하라.』
친히 사액한 선조는 고을 원에게 이처럼 신신당부하여 사명 스님의 호국정신을 치하했다.
그로부터 관료는 말할 것도 없고 백성들까지도 그 사당 앞을 지날 때는
늘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를 올렸다.
그렇게 백 여 년의 세월이 흘러 당우가 퇴락하자 사명 스님의 5대 법손인 남봉선사는
표충사를 중수하는 동시에 스님의 공적을 기리는 표충비를 세웠다.
때는 영조 14년, 1738년이었다.
표충비를 세울 돌을 고르기 위해 경상도 경산까지 가서 높이 3.9m, 폭 97cm, 두께 70cm 크기의
돌을 구해온 남봉 스님은 당시 정승 이익현에게 비문을 부탁했다.
『내 본시 승려의 부탁으로 글짓는 것을 즐기지 않았으나 오직 대사님의 사정이 간절하여
이를 물리치기 어려워 특례로 곧 비에 글월을 새기는 것입니다.』
배불숭유 정책으로 불교를 탄압했던 당시의 정승 역시
사명대사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외면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표충비가 세워지고 다시 백 년 후, 그러니까 조선 제24대 헌종 5년(1839),
사명대사의 8대 법손인 월파선사는 표충사를 밀양 영정사로 옮기고
절 이름을「표충사」로 바꿨다.
표충서원을 옮겨 가자 사명 스님의 고향엔 표충비만 남게 됐다.
지방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어 지난날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는 이 비석은
현재 몸체에 금이 간 채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 글출처 : 불교 교양강좌, 통권 제 49 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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