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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건축 갤러리 ■/경 남 . 부 산

[스크랩] 위계서원 - [함안인물]충간으로 일생을 바친 이인형

 

 

 

 

 함안이 본관인 매헌 이인형은 조선조 오백년 동안에 있어서 정치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연산군 때 충간(忠諫)으로 일생을 마친 인물입니다. 백성들을 위한 어진 마음을 가졌을 뿐 아니라, 잘못된 임금의 행동을 바로 잡고자 했던 의로운 인물 이인형의 일생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이인형은 1436년(세종18) 대사성(大司成) 이미(李美)의 큰아들로 함안(咸安)에서 태어났습니다. 11세가 되던 해에 진양군 진성면 가좌촌으로 이주했고, 부친이 지방 자제 교육을 위해 지은 육영제(育英齊)에서 수학하였습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학문에 열중하였으며, 1455년(세조 1)에 20세로 진사시에 합격하여 재지를 인정받았으나, 젊은 나이에 출사하는 것은 교만한 성품을 기른다고 하면서 집에서 문을 닫고 독서하였습니다. 그 후 1468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전교(傳敎)에 임명되고 이어서 부교리‧응교 등을 지냈으며, 연산군 5년에는 정조사(正朝使)로 중국 명나라에 가서 외교 활동을 하였습니다.

 

 연산군 원년 12월 3일에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으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영남의 사림 출신으로서 대개 연소기예(年少氣銳)하여 대간(臺諫) 홍문관(弘文館)에 관직을 맡았습니다. 그는 보수적인 중앙 기성 벌열세력을 소인 속배라 공격했고, 그런 연유로 정치적 알력이 생겨 대옥사(大獄事)가 일어났습니다.

 또 연산군은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의 교자(驕恣)와 황음(荒淫)을 일삼아 문신의 직간을 기피하려 하는데도 이인형은 그의 지조를 굽히지 않고 충간으로서의 임무를 다 하였습니다.

 

 

 

 

 

 선왕조실록 연산군 일기 2년 1월에 적힌 내용 중 이인형에 관련된 일화가 있습니다. 연산군이 폭군의 길로 들어섰을 무렵, 그가 연산군의 실정을 바로잡기 위해서 21회에 걸쳐 설득한 일입니다.

 

 연산군 2년 정월에 유점사와 낙산사에 소금을 공급하는 일에 대하여 대사간으로서 차자(箚子:간단한 서식의 상소문)로 간청을 했으나, 연산군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일에는 대소와 경중이 있는데 임금은 그 대소경중(大小輕重)의 적의를 잘 살펴서 때에 맞추어 거조(擧措)하여야 합니다. 땅을 개간하여 이랑을 만들고 바닷물을 달여서 소금을 만드는 것입니다. 소금 고는 괴로움이 농상(農商)보다 고되므로 비록 국용(國用)만으로도 소민(小民)이 오히려 원망하옵는데, 하물며 저 승도(僧徒)에게 공급합니까? 승도는 부역을 벗어나서 놀고 먹으며 태평세대의 한민(閒民)이 되었으니, 은혜를 입은 것이 이미 두터운데 하물며 백성을 여위게 하여 그들을 살찌게 함이십니까?

 무릇 폐단을 제거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것과 함부로 소비하여 중을 구휼하는 것 중 어느 것이 크고 어느 것이 작은 일입니까? 승도에게 그릇된 은혜를 베풀기 위해 백성을 못살고 떠돌게 한다면 작은 것을 기르다 큰 것을 잃는 셈이 되지 않습니까?"

 

 그가 이런 상소를 올린 이유는 백성들의 고된 심정을 헤아리고, 폭정과 교자한 정치로 기울어져 가는 연산군을 올바른 군주로 인도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공의 관직 생활은 항상 보국제민(輔國濟民)의 단충(丹衷)으로 내직에 있어서는 충간(忠諫)을, 외직에 있어서는 해이된 사회기강을 바로 잡고 백성의 신고(辛苦)를 덜게 하는 백성의 평안을 위한 선정(善政)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연산군의 실정을 충간으로는 불가함을 직시하고 연산군 9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향년 68세를 일기로 별세하였습니다.

 

 

 연산군 10년에 갑자사화가 일어나 무오사화 때 죄없이 죽어가는 선비들을 구하고자 수 많은 직간 상소를 올린 수창자(首唱者)라 하여 관직을 박탈하고, 부관참시(이미 매장된 사람의 무덤을 파내 관을 부수고 그 시체를 참수하는 형벌)를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중종반정(中宗反正)이후 신원복관의 국령이 내려지면서 시신을 거두어 고향땅에 개장(改葬)하고, 예조판서(禮曹判書)의 증직이 내려졌습니다. 이처럼 이인형의 의로운 마음은 후세에도 길이 빛나고 있습니다.

 

 

 

 

- 출처 : 함안문화관광

출처 : 행복과 희망이 넘치는 더 큰 함안
글쓴이 : 함안지기 원글보기
메모 :

 

 

 

 

 

 

 

 

 

     위계서원 (葦溪書院)

 

 

 

이인형·이의형·이영·이현·이허·이응성을 추모하기 위한 서원이다.

 

매헌 이인형(1436∼1498)은 조선 전기 문신으로 김종직의 제자이다.

세조 1년(1455)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젊은 나이에 벼슬하는 것이 교만한 성품을 기른다 하여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 뒤 세조 14년(1468)에 장원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치고,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예조판서의

직함을 얻었다.

 

조선 현종 10년(1844)에 세운 위계서원은 고종 6년(1869)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66년에 다시 세웠다.

1963년에는 이제·이규·이예형·이지형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이 공간은 배우는 공간으로 훌륭한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사당인 숭덕사는 앞면 5칸·옆면 3칸의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해마다 9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글 출처 : 문화재청)

 

 

 

 

 

 

 

 

 

 

 

 

 

 

 

 

 

 

 

 

 

 

 

 

 

 

 

 

 

 

 

 

 

 

 

강 당

 

 

 

 

 

 

동 재

 

 

 

 

 

 

 

 

 

 

 

 

 

 

 

서 재

 

 

 

 

 

 

 

 

 

 

 

 

 

 

 

 

 

 

사 당

 

 

 

 

 

 

 

 

 

 

 

 

 

 

 

 

 

 

 

 

 

 

 

 

 

 

 

 

 

 

 

 

 

 

 

 

 

함안 이씨(咸安 李氏)의 내력 

 

 

 

지금의 함안은 옛날 삼국시대에는 "아라가야" 였습니다

 

忠烈公 李芳實 장군 묘소는 춘천 가평군 가평읍 하색리 산81 에 있고

 

충렬공 이방실 장군의 기마동상은 경남 함안군 가야읍 말산리

 

함안공설운동장 앞에 세워져 있습니다.

 

 

고려 증 금좌광록대부 행 중서평장정사 추성협보공신

 

상장군 원수 충렬공 이방실 장군의 영정은 경남 함안군 군북면 소포리(남강

 

서원 충렬사) 에 모셔져 있고,

 

함안이씨 선조들을 모신 위계서원은

 

경남 고성군 마암면 석마리의 마을 뒷편 조용한 골짜기에 있습니다.

 

 

 

 

1. 咸安 李氏의 뿌리

 

 

함안 이씨의 뿌리는 800여년이 되었고, 우리들의 집안에 傳해 내려오는

 

족보(族譜)와 史料들에 의하면 咸安李氏의 시조(始祖)는

 

고려(高麗) 高宗때에 큰 功을 세운 尙할아버지시다.

 

尙할아버지는 光祿大夫(광록대부)를 지내셨고, 邑山君에 封해졌다.

 

邑山은 地名으로 오늘날의 咸安이다.

 

......

 

尙할아버지는 그 무렵 아마 대대로 邑山 땅에서 사셨던 것 같다.

 

 

 

邑山은 원래 아라가야阿羅加倻다. 아라가야阿羅加倻는

 

六加倻중의 重要한 하나로 당시의 伽倻文化는 지금에 와서

 

더욱 그 實體가 重要視 되고 있다. 新羅23代 法興王(562年)때

 

新羅에 흡수(吸收)되고 말았다. 咸安 李氏의 원조(遠祖)들은

 

아마도 伽倻人 이었을 可能性이 크다.

 

 

아무튼 우리는 시조(始祖)를 尙할아버지로 삼는다.

 

정확(正確)한 기록(記錄)으로 우리가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면 지금으로부터 약 800年 程度 歷史를

 

거슬러 올라간 시점(時點)이다.

 

800年 家門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집안도 그리 흔한 것은 아니다.

 

특히 世界的으로 보면 이것은 대단(大端)한 일이며, 놀라운 일이다.

 

世界의 수많은 民族들 中에 그 속에서도

 

自己 家門의 歷史를 몇 百年씩이나 거슬러 올라갈 때까지

 

알고 있는 家門은 별로 많지 않기 때문이다.

 

 

 

 

 

2. 咸安 李氏의 발자취

 

 

尙할아버지는 두 아들을 두셨다. 兄 되시는 분이 淸이신데,

 

(門下侍郞)平章事(평장사-正二品)를 지내셨고, 아우는 원(源)이신데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내셨다. 판도사(版圖司)는 호조(戶曹)를

 

가르키며 六曹中의 하나다. 판서(判書)는 으뜸벼슬로

 

지금의 財務長官쯤을 지내신 셈이다. 청(淸)께서는 아들 弘(홍)을 두셨다. 弘

 

(홍)은 門下侍中(문하시중)을 지내셨다. 이 벼슬은

 

종일품(從一品)의 높은 지위(地位)이다. 그리고 원(源)께서는

 

아들 방실(芳實)을 두셨다.

 

방실(芳實)은 弘과 四寸間이다. 다 같이 尙할아버지의 孫子들이다.

 

芳實은 高麗 恭愍王때 여러 차례의 큰 功을 세운 上將軍이셨다.

 

특히 紅巾賊 二十萬 大軍을 물리친 功은 高麗朝를 累亂의 危機에서

 

求했던 것이다. 이 때의 고려 삼원사(三元師)는

 

芳實할아버지를 비롯해서 金得培(김득배), 安祐(안우) 세분이었다.

 

이때 紅巾賊을 물리친 芳實할아버지의 功은 高句麗 瓔陽王때 隨나라의

 

百萬大軍을 물리친 乙支文德 將軍이나, 朝鮮朝 宣祖때 壬辰倭亂을

 

平定한 李舜臣將軍의 業績에 버금가는 큰 功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芳實將軍할아버지는 敎科書에도 실려 있다.

 

高麗 恭愍王은 世子때 元나라로 볼모로 잡혀가 있었고,

 

왕이 되어 高麗로 돌아왔을 때는 元으로부터 自律과 獨立을 찾겠다는

 

결심(決心)에 차 있었다. 이때 芳實將軍 等 智將을 거느리고,

 

젊은 정몽주(鄭夢周) 等 신진을 모아 國力을 쌓아가고 있었다.

 

 

 

芳實할아버지는 용감(勇敢)한 將軍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공민왕(恭愍王)9年(1360) 3月에는 추성협보공신(推誠協輔功臣)이 되고,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任命(임명)되셨다. 추밀원(樞密院)은

 

國王의 命令이나 결재 (決裁)를 중개하고 궁중(宮中)의 경비(警備)를

 

맡아보던 기관(機關)이다. 말하자면 임금의 비서실(秘書室)과

 

경호실(警護室)을 합친 機關이 추밀원(樞密院)이다.

 

 

 

그러니까 방실(芳實)할아버지는 一線에서

 

전투(戰鬪)를 지휘하는 將軍(장군)뿐이 아니고,

 

나라의 중추부(中樞部)에 계셨던 분이시다.

 

아무튼 방실((芳實)할아버지는 여러 많은 공(功)으로

 

왕(王)으로부터 옥대(玉帶), 옥영(玉纓)을 하사(下賜)받으시고,

 

벼슬은 추성협보공신(推誠協輔功臣)

 

금자광녹대부행 (金紫光祿大夫行)

 

중서평장정사(中書平章政事) 상장군(上將軍) 원사(元帥)이시다.

 

 

 

그러나 芳實할아버지는 그의 공(功)을 시샘한 간신(奸臣)김용(金鏞)의

 

모함(謀陷)으로 살해(殺害)되고 만다. 王의 부름을 받고 전장

 

(戰場)에서 돌아오던 중 김용의 심복(心腹)인 자객(刺客)

 

박춘 等에 의해서였다.

 

그 후(後) 충열(忠烈)이란 시호(諡號)를 받으셨다.

 

따라서 교과서(敎科書)에는 “충렬공 이방실 장군

 

(忠烈公 李芳實 將軍)”으로 나온다.

 

고려(高麗) 삼원사(三元師)가 다 같이 金鏞의 간계에 의해서

 

피살되는데 이 원통한 참사를 보고 비분강계한 분이 청년 직한림(直翰林)

 

鄭夢周였다. 鄭夢周는 王에게 간청하여 삼원사(三元帥)의 시신(屍身)을 수습

 

(收拾)하여 장사(葬事)지냈다. 이때의 제문(祭文)이 오늘에 전하나 여기서는

 

생략(省略)하기로 한다. 金鏞은

 

결국(結局) 왕궁(王宮)까지 범하려다가

 

실패(失敗)하니 1363년 4월에 처형(處刑)되었다.

 

 

 

다시 1世, 始祖 尙할아버지로 돌아간다. 2世 청(淸), 3世 홍(弘),

 

4世 자수(滋秀-護軍)5世 운길(云吉)로 이어진다. 운길(云吉)

 

할아버지가 活動하시던 時代는 高麗王朝도 이미 그 수명(壽命)을 다해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특히 왜구(倭寇)의 침입(侵入)은

 

해를 거듭할수록 심해져서

 

그 피해(被害)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때

 

운길(云吉)할아버지도 왜구토벌(倭寇討伐)에 출정(出征)하셨고,

 

격전(激戰)끝에 분사(憤死)하고 마셨다. 돌아가신 후에 좌찬성

 

(左贊成)으로 추증(追贈)되셨다. 6세 즐(騭)할아버지는 우왕(禑王) 3年(1377)

 

에 진사 (進士)가 되고 18歲에 문과(文科會試)에 1等, 전시(殿試)에서는 6等

 

으로 양과(兩科)에 급제(及第)하셨다.

 

 

 

대구현령(大邱縣令-從五品)을 지내셨고,

 

통훈대부(通訓大夫-正二品) 사복시정(司僕時正)으로

 

추증(追贈)되었다.

 

7世 원로(元老)할아버지를 거쳐, 8世 美할아버지에 이른다.

 

 

 

이때는 이미 고려왕조(高麗王朝)가 무너지고

 

조선왕조(朝鮮王朝)로 세상(世上)은 바뀌었다.

 

美할아버지는 단종(端宗) 1年(1453)에 문과(文科 : 增廣試甲科-

 

증광시갑과)에 급제(及第)하고 진해현감(鎭海縣監)을 지내셨으며, 통정대부

 

(通政大夫-正三品)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唯一한 國立大學의 總長

 

格)을 지내신 분이다. 美할아버지는 당시(當時) 조선조(朝鮮朝)의

 

통치이념(統治理念)이었던 성리학(性理學)의 대가였으며,

 

전국 士林中에서 秀才들을 뽑아 성균관에 모아 놓고

 

나라의 인재를 養成했었다. 美할아버지의 號는 창강(滄江)이고,

 

諡號는 思簡이다. 美할아버지는 전국의 人材뿐만 아니라,

 

자기의 아들들도 참으로 훌륭하게 키우셨다. 네 분의 아들은

 

仁亨(인형), 義亨(의형), 禮亨(예형), 智亨(지형)이시다.

 

仁, 義, 禮, 智 참으로 좋은 이름이시며 9世孫 된다.

 

 

 

梅軒 仁亨할아버지는 1468년(世祖 14)에 文科(春場試甲科)에

 

壯元及第하시고 司憲府 大司憲(從二品)을 지내시고,

 

또한 漢城府 左尹(從二品)을 歷任하셨다

 

 

司憲府는 百官, 즉 모든 官吏들을 監察하고 紀綱을 바로 잡으며,

 

政策遂行이 올바로 進行되고 있는가를 살피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사헌부(司憲府)는 사간원(司諫院), 홍문관(弘文館) 더불어 이른바

 

言論三司(언론삼사)중의 하나다.

 

이 三司의 官員들을 言官이라고 하여

 

이들은 다른 일반관료(一般官僚)들과는

 

다른 직책(職責)을 맡아있었다.

 

 

......

 

 

 

仁亨할아버지는 그러한 司憲府의 長으로써 지금의 監査院長

 

格이였다.

 

仁亨할아버지가 벼슬길에 올랐던 것은 世祖때의 일이나.

 

주로 活動하시던

 

時期는 成宗때부터 燕山君(연산군)에 이르는 期間이다.

 

成宗께서는 世宗大王을 본받아서 文治(문치)에 主力하고

 

世祖代에서 去勢되었던 官員들이나, 士林들을 重用(중용)하여

 

鼓舞(고무)하고 王道政治를 이룩하는데 勞力하였다.

 

 

 

그러나 成宗 다음에 들어선 燕山君(10代-1495. 12~1506. 7)은 歷史에 記

 

綠된 暴君(폭군)이였다. 燕山君은 저 유명한 戊午士禍와 甲子士禍를 일으킨

 

張本人 이다. 戊午士禍는 한마디로 金宗直을 核心으로 한 士林派가 柳子光을

 

中心으로 한 勳舊執權勢力(훈구집권세력)에게 肅淸 當한 事件이다.

 

成宗임금은 士林(當時의 知性人들)을 키워야 王道政治가

 

이룩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言論三司를 中心으로

 

優秀한 士林을 配置했던 것인데, 그러다보니

 

性理學의 正統을 이어받은

 

金宗直이 中心이 되어 士林派가 形成되기에 이르렀다.

 

派가 形成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勢力化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意味한다. 士林派는 주로 嶺南과 畿湖 出身의 兩班 土豪 子弟들로서, 그들은

 

말하자면 地方의 中産層 出身들이었다.

 

 

특히 그들은 王道政治의 理念인 性理學을 徹底(철저)히 信奉함으로써 그들의

 

理念을 現實化 하는데 온 精誠을 기울이고 있었다.

 

當時의 執權勢力 속에는 首陽大君 世祖가 어린 조카 端宗을 죽이고

 

王位를 簒奪하는 課程에 빌붙었던 者들이 섞여 있었다. 말하자면 勳舊執權勢

 

力들은 私利私慾(사리사욕)과 旣得權(기득권)만을 움켜쥐고 保守와 安易에

 

安住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理念에 불타는 士林派들은 勳舊執權

 

勢力의 無爲無能(무위무능)과 非理(비리)를 批判하고, 政策과 制度를 革罷(혁

 

파)할 것을 强力히 主張하였다. 勳舊執權勢力들은 理論에 있어서나

 

名分에 있어서나 恒常 士林派에 밀리고 있었다.

 

 

 

그들의 士林派에 대한 鬱憤(울분)과 적개심은 날이 갈수록 쌓여만 갔다. 이

 

러던 차에 金宗直의 “弔意帝文(조의제문)”

 

이 發見된 것이다. 金宗直의 弔意帝文은 中國의 項羽(항우)가 楚(초)나라의

 

懷王(회왕)을 죽이고 자기가 왕위에 오른 古事에

 

빗대어서 首陽大君이 어린 조카 端宗을 죽이고 自己가 王位에

 

오른 것을 꾸짖은 名文이었다.

 

史草에서 이것을 發見한 柳子光 一黨은 이것을 구실로 삼아,

 

燕山君을 衝動질해서 士林派를 一擧에 肅淸했던 것이다. 이때

 

金宗直은 이미 故人이 되었으나, 剖棺斬屍(부관참시) 當했다.

 

수많은 士林들이 處刑되고 귀양 갔으며 자리에서 쫓겨났다.

 

 

燕山君이 王位에 오른지 불과 二年 八個月 만의 일이다.

 

(1498年 7月) 이러한 肅淸의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仁亨할아버지는

 

士禍의 不當함을 直諫하는 上疎文을 올리고 迫害를 받다가

 

끝내는 甲子士禍(1504年 10月)때, 剖棺斬屍의 極刑을 당한다.

 

士禍는 仁亨할아버지 한분에게만 미친 것이 아니라, 온 집안에

 

寒波를 몰고 왔다. 그러한 것은 當然(당연)히 覺悟(각오)한

 

氣槪(기개)였던 것이다. 燕山君은 甲子士禍를 일으킨 지

 

3年을 지탱 못하고 中宗反正으로 물러나고 만다.

 

 

 

中宗은 다시 士林派를收拾, 保護하게 되니 이때 中宗 2年에 仁亨할아버지는

 

伸寃, 즉 名譽回復이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漢城府判尹(판윤)에 追贈되고 다

 

시 禮曹判書로 높은 벼슬을 받았다.

 

 

四兄弟中 둘째인 義亨할아버지는 1477年(成宗 8)

 

文科(春陽試 丙科)에 及第하고 慶尙道 暗行御史를 거쳐서

 

司憲府 執義 (從三品)를 지내시고, 通訓大夫로 승급해서

 

南原府使를 지내셨다.

 

義亨할아버지는 字는 勇夫며, 號는 杏軒(행헌)이시다.

 

亦是 典型的인 士林이셨다. 司憲府 言官에 暗行御史 出身이 아닌가.

 

 

셋째인 禮亨할아버지 禮曹佐郞(예조좌랑)과 牧使

 

(목사-正三品-地方官廳의

 

으뜸벼슬을 지내셨다. 할아버지의 號는 梧軒(오헌)이다.

 

 

넷째인 智亨할아버지도 氣槪가 大端한 분이셨다. 1477年(成宗 8)

 

文科(春場試丙科)에 及第하고 司諫院의 大司諫을 지내셨다.

 

士林中에서도 가장 剛直(강직)하고 氣槪가 높은 精銳만이 司諫院에 몸을 담

 

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이러한 司諫院의 長이셨다.

 

亦是 甲子士禍에 連累되자, 더러운 勳舊勢力의 손을 빌릴 것 없이 自決하셨

 

다. 號는 菊軒이시다.

 

 

 

8世, 美할아버지와 그의 네 아들로 五父子는 成均館 大司成,

 

司憲府 大司憲, 司諫院 大司諫 등 특히 맑고 高潔한 職責을

 

遂行하고 계셨다.

 

朝鮮朝 前期 士林집안 中에서도 가장 典型的인 집안이라 할 수 있다.

 

美할아버지와 아들 四兄弟분들은 性理學的 價値觀(가치관)의

 

貫徹을 위해서 진력하시다, 士禍로 極刑까지 당했는데

 

美 할아버지의 孫子들 또한 가만히 있지 않았다.

 

 

 

仁亨할아버지의 3男 翎(령-10世)은 弘文館 修撰(수찬-正六品)으로 있을 때

 

己卯士禍가 일어났다. 己卯士禍는 1519年(中宗 14)에

 

南袞(남곤), 沈貞(심정), 洪景舟(홍경주) 等 勳舊執權勢力이

 

趙光祖(조광조) 等 新進士林派를 謀略하여 肅淸한 事件이다.

 

 

中宗은 燕山君 때 去勢당했던 士林을 重用하고 新進士類들을

 

育成하였다. 이때 10世 翎 할아버지도 弘文館에서 活動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한 때에 스승인 趙光祖와 그의 同志 士林들이 터무니없는 謀略으로

 

走肖爲王 이란 四字를 나뭇잎에 글로 써서, 벌레로 하여금 구멍을 내게 하

 

고, 그것을 하느님의 啓示라고 했다. 走肖는 趙氏이며,

 

곧 趙光祖를 가리킨다. 趙光祖가 大逆謀議를 꾸미고 있다는 것이다. 士禍에

 

휘말리자, 翎할아버지는 從지 希閔(희민-11世 사曹正郞)과 함께 하루에 세

 

번씩이나 上疏文을 올리다가 끝내는 모진 惡刑끝에 龍門에서 被殺되고 말았

 

다.

 

 

 

아버지 仁亨이 剖棺斬屍된 지 18年 만의 일이었다.

 

 

이리하여 翎할아버지는 스승 趙光祖와 더불어

 

己卯明賢이 되셨다. 希閔은 大司諫 智亨할아버지의 孫子이다.

 

 

義亨할아버지의 큰아들 翿(도-10世)는 학문에 열중하고

 

進士가 되었으나 벼슬의 험한 길을 버리고 향리에서

 

學問과 子弟敎育에 정열을 쏟았다.

 

이 당시의 朝鮮朝 社會는 士禍 等, 世上이 混亂(혼란)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뜻있는 士林들 中에는 地方에 隱遁하는 분이 많았다.

 

 

이들을 “山林”(숲을 뜻하는 것이 아님) 이라 하였다.

 

義亨할아버지의 三男에 허(10世 敬齊公)라는 분이 계셨다.

 

 

 

이분 또한 兄任 翿(도)와 마찬가지로 故鄕에 은거하여 學問과

 

人格陶治에 熱中하셨다. 특히 孝誠이 돈독하고

 

友愛가 깊었다. 이 분은 1494年(成宗25) 司馬試에 合格하여

 

生員이 되었고 특히 文章과 經書에 정통하셨다. 學究派에 性品이 高潔하여

 

험상궂은 世上에 뛰어들기를 拒絶했던 것이다.

 

義亨할아버지의 넷째 아들 翊-(10世 月菴公), 이분은

 

 

 

1501年(燕山君 7年)에 文科에 及第하고 司諫院 正言, 兵曹正郞,

 

司諫院司諫(從三品) 等을 지내셨다. 亦是 典型的인 士林家門의

 

子弟로써 王에게 直諫하는 司諫의 職分의 맡았던 것이다.

 

 

8世 美할아버지로부터 9世 네 분, 10世 네 분 三代에 걸쳐서

 

아홉 분의 行跡을 살펴보았지만 여기서 우리들은 咸安李氏 家門의 體質과

 

성품의 原形(원형)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참으로 典型的인 士林家門이며 선비중의 선비를 우리들은 이 三代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우리들은 여기서 숨을 잠깐 돌리고,

 

다시 한번 始祖 尙할아버지로 돌아간다.

 

尙할아버지는 아들 두 분을 두셨다. 큰 아들이 淸할아버지고,

 

둘째 아들이 源할아버지였다.

 

源할아버지의 아들이 敎科書에 나오는 저 有名한

 

忠烈公 芳實할아버지다. 그래서 芳實할아버지의 子孫을

 

忠烈公派라고 한다.

 

 

 

이 忠烈公派 中에 歷史的인 人物이 또 한 분 배출된다.

 

그 분이 9世 世應할아버지다. 이 할아버지는 1501年(燕山君 7)에

 

식년文科에 及第했다. 世應할아버지는 中宗反正 때 큰 功을

 

세워 靖國功臣(정국공신)이 되신 분이다.

 

中宗反正은 1506年(燕山君12) 9月에 暴君 燕山君을 폐하고

 

晋城大君을 王으로 세운 事件이다.

 

 

이 事件의 主謀者들이 朴元宗(박원종), 成希顔(성희안), 柳順汀(유순정) 等이

 

다. 世應할아버지도 이 때 參與해서 큰 功을 세웠던 것이다. 이 功으로 해서

 

世應할아버지는 咸安君에 封해졌다. 世應할아버지는 司諫院에서 司諫으로

 

活躍하실 때 燕山君, 中宗 兩大에 걸쳐서 저 惡辣한 奸臣 柳子光을 彈劾해서

 

실각시키는 데 큰 役割을 했던 것이다. 그 뒤 世應할아버지는 江原,

 

忠淸, 平安道의 觀察使와 吏曹, 禮曹에서 參判을 지내셨다.

 

돌아가신 後에는 吏曹判書로 追贈되었다.

 

 

 

이 世應할아버지에게는 아들 세분이 계셨는데,

 

큰 아들이 驪州牧使 震 (진-10世), 둘째가 大司諫 霖(림),

 

셋째가 忠勳府經歷(충훈부경력) 霽(제), 이렇게 三兄弟분이다.

 

 

이 三兄弟분 亦是 기개가 높고 正義感이 강해서

 

결국 己卯士禍(기묘사화)에 犧牲되고 만다.

 

그리하여 세 분은 己卯士禍의

 

名賢(명현)들이다. 여기서 우리들은 앞에서 이야기 한

 

9世 大司憲 仁亨할아버지와 그 아들 翎(령), 弘文館 修撰할아버지,

 

그리고 翎할아버지의 從姪 吏曹正郞(이조정랑)

 

希閔(10世)할아버지를 다시 머리에 떠올리자,

 

이 분들 또한 甲子士禍와 己卯士禍에 犧牲된 분들이시다.

 

 

 

그렇다면 仁亨할아버지, 翎할아버지,

 

希閔할아버지와 世應할아버지 및 그 세 아들들과의 關係는

 

어떻게 되는가?

 

仁亨할아버지 쪽은 始祖 尙할아버지, 큰아들 凊할아버지, 3世 弘할아버지에

 

서 비롯됐고, 世應할아버지쪽은 始祖 尙할아버지, 둘째 아들 源할아버지,

 

三世 芳實할아버지께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렇게 비롯된 줄기가 다르다손 치더라도 咸安李氏의 氣質은

 

선비와 士林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咸安 李氏家門은 恒常 선비만 輩出한 것은 아니었다.

 

達(달-13世,1561~1618, 明宗 16年~光海 10年,字 明淑,號 雲圃)은,

 

世廉(세렴-12世)할아버지의 次男이시다. 達할아버지,

 

우리는 이 분을 흔히 雲圃公할아버지라고 부른다.

 

雲圃公이 成長하고 活動하던 시기는 주로 宣祖(14年, 1567~1608)時代였]

 

다. 이 時期의 特色은 沈義謙(심의겸), 金孝元(김효원)等이

 

東西黨爭(동서당쟁)을 일으키고 林巨正(임꺽정) 等이 亂을 일으키며, 나라는

 

점점 混亂에 빠져 들어갔다.

 

 

 

......

 

 

 

아무튼 雲圃公할아버지가 32歲때, 1592年(宣祖25) 4月에

 

日本은 大軍 21萬을 이끌고 쳐들어 왔다.

 

雲圃公은 固城에서 義兵을 일으켜, 泗川, 鎭海, 昌原, 態川

 

.等地에서 猛活躍을 하다가 그 해 10月 晋州城 戰鬪에서

 

큰 功을 세운다. 이것을 계기로 訓練院副正에서 점점 級이

 

높아졌으며, 드디어 折衝將軍 (절충장군-正三品, 堂上官)이 되셨다. 그 後

 

雲圃公은 唐浦(당포-慶南 統營郡 山陽面 앞바다) 海戰에서 倭軍을 大破하여

 

큰 戰勝을 거둔다.

 

이 功으로 해서 宣祖께서 賞加敎書- 戰功의 勞苦를 稱讚하고

 

慰勞하는 親書)를 내리시고 또한 唐浦前洋勝捷之圖

 

(당포전양승첩지도)라는 記錄畵(기록화)를 내리시기도 했다.

 

그후 雲圃公께서는 咸鏡南道 兵馬虞候(병마우후) 宣傳官(선전관), 三道統制虞

 

侯(삼도통제우후),同知中樞府事(동지중추부사-從二品),嘉善大夫(가선대부)를

 

지내시고 돌아가신 後에는 資憲大夫 兵曹判書(正二品)로 追贈되셨다.

 

壬辰倭亂(1592年), 丁酉再亂(1597年) 동안에 民族愛를 發揮하고

 

戰功을 세운 咸安李氏 는 비단 雲圃公 한 분에 그치지 않았다.

 

 

五衛(오위-軍隊組織)의 司果(正六品)로 계시던 檣(장-13世)은

 

伯父 遇春(우춘-敦寧府僉正), 仲父 應春(응춘-生員), 季父 諱得春(득춘-守門

 

將), 아버지 諱 成春-濟用監判官)과 함께

 

晋州서 義兵을 이끌고 일어나 晉陽 大防山城을 지키는 데

 

큰 功을 세웠다. 아버지와 그 兄弟 네 분은 다같이 宣武原從功臣(선무원종공

 

신) 二等에 올랐고, 檣 自身은 一等을 받았다.

 

 

松巖(송암) 福(복-12世)할아버지는 固城에서 義兵을 일으켰고

 

蓮華山 (연화산)을 根據로 게릴라戰을 修行, 눈부신 功을 세웠다.

 

宣武原從功臣 二等을 받았고, 돌아가신 後에는 兵曹參判으로

 

追贈되었다. 12世 諱 日工(강)은 趙憲(조헌)과 함께 義兵을 일으켜 錦山戰鬪

 

에서 激戰을 치르면서 敵의 進路를 遮斷하고,

 

끝내는 七百義塚(칠백의총)에 묻히고, 司憲府持平으로 追贈되었다.

 

 

그리고 그의 功을 기리는 旌閭(정려-忠臣 孝子 烈女 等을 기리기 위행 마을

 

어귀에 세우는 紅門)가 세워졌다. 12世 新川齊 應星(응성)은 農圃 鄭文孚(정

 

문부)와 함께 義兵을 일으켜 큰 功을 세우고 宣武原從功臣 二等, 高原郡守

 

를 지냈다. 兵曹參判으로 追贈되었다.

 

 

한편 武科에 及第하고 宣傳官을 지낸 折衝將軍 慶尙道 水軍虞侯

 

(수군우후) 12世 曄(엽)은 여러 번 큰 功을 세웠으나

 

끝내 加騰淸正(가등청정)에게 捕虜가 되고 말았다. 日本의 關伯

 

豊臣秀吉(풍신수길)에게까지 끌려갔다. 그는 굴하지 않고 倭의

 

非理를 추궁하다 끝내 割腹(할복)하여 自決(자결)하였다.

 

 

 

이리하여 曄의 功績과 行績은 國朝人物志(국조인물지)와

 

國朝人物考에 실려있다. 11世 塵事 碩亨(석형)은 歙谷縣令

 

(흡곡현령)으로 있을 때,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아들 旻(민), 昇(승), 晏(안)

 

三兄弟와 더불어 四父子가 激戰을 벌이다가 旻, 昇과 自己 三父子가

 

戰死하고 말았다.

 

 

旻의 妻(全州 李氏)는 目前에서 男便의 죽음을 보고 그 자리에서 自決하고

 

말았다. 昇의 妻(晋州 姜氏)는 豊德親庭에서 戰死 消息을 받고 바다에 投身

 

하여 烈女의 貞節을 지켰다.

 

 

이리하여 兩代에 걸쳐 三旌閭(삼정려)가 세워지고,

 

忠孝烈의 義를 한 집에서 이루었다.

 

멀리 高麗朝에서는 忠烈公 芳實 할아버지가 北쪽의 紅巾賊을

 

물리치고, 朝鮮朝에 들어와서는 雲圃公을 비롯한

 

여러 어른들이 倭敵을 물리치는 데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참으로 咸安李氏의 祖上들은 外敵의 侵入을 보고서는 참지 못했다. 民族과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지키는 精神이 自己에 于先하고 있는 것이다.

 

 

 

 

 

3. 선비精神과 氣槪의 집안

 

 

壬辰倭亂, 丁酉再亂 等 日本과의 戰爭이 끝나는 것은

 

1598年, 지금으로부터 約 四百年前의 일이다.

 

咸安李氏의 발자취를 더듬는 일을 이번에는 이 時點에서 끝내는 것으로 한

 

다. 壬辰倭亂 以後 四百年 동안에도 咸安李氏 家門은 면면히 이어져 왔으며,

 

훌륭한 인물과 尊敬받는 가문을營爲해 왔다. 특히 近世의 日帝 植民地下에서

 

도 民族愛에 불타는 많은 젊은이들이 獨立運動에 加擔한 바 있다.

 

 

여기서 우리들은 咸安李氏 家門이 선비精神과 氣槪로 특정 지워 진다는 事

 

實을 알 수 있게 되었다.

 

8世 滄江公 美할아버지와 그 아들 四兄弟분, 그리고 그 아들들의 行蹟에서,

 

그리고 世應할아버지와 그 아들 三兄弟분으로부터 우리들은 참으로

 

고매한 人品과 칼날 같은 節義를 볼 수 있었고

 

3世 忠烈公 할아버지, 13世 雲圃公 할아버지

 

그리고 그 외의 많은 할아버지들로부터 民族愛와

 

正義感을 불사른 痕迹을 엿볼 수 있었다.

 

참으로 咸安李氏 家門은 典型的인 선비 집안이요,

 

문신과 무신을 배출한氣槪로 가득 찬 집안이다.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에 있는 숭의전에는

 

고려 오백년 역사를 지킨 4성군과 16공신 중의 한 사람으로서

 

고려 태조(왕건)를 비롯하여 현종, 문종, 원종의 위패와

 

고려조 국가에 큰 공을 세운 16분의 공신[복지겸(卜智謙),

 

홍유(洪儒), 신숭겸(申崇謙), 유금필(庾黔弼), 배현경(裵玄慶),

 

서희(徐熙), 강감찬(姜邯贊), 윤관(尹瓘), 김부식(金富軾),

 

김취려(金就礪), 조충(趙沖), 김방경(金方慶),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김득배(金得培), 정몽주(鄭夢周)]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국가에서 춘추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

 

( 출처 : 함안 이가 송암공파 21대손 http://blog.daum.net/sunbeamle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