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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이야기 ■/전통건축 이야기

주거건축-030. 함안 무기연당 - 학처럼 살다

 

 

 

 

하환정도 (함안박물관에서 촬영)

 

 

 

 

 

 

          주거건축-30. 함안 무기연당舞沂蓮塘

          - 학처럼 살다 -

 

 

 

 민족의 영산 지리산에서 발원하여 함양, 산청, 진주를 거쳐 도도히 흘러 온 남강南江이, 태백산에서

발원하여 종착지를 향해 쉼 없이 달려온 낙동강과 합류하는 그 들판에, 지리적으로는 경상남도의 중앙부에 해당하는 지점에 아라가야의 옛터, 함안군咸安郡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일찍부터 농경문화가 꽃피었음을 보여주는 선사시대의 유물과 유적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고,

군청 뒷산의 도항리고분과 말산리고분의 거대한 왕릉들이 시가지를 굽어보고 있는, 천오백 년 전

후기가야연맹을 이끌었던 베일 속의 왕국 - 한때는 광개토왕비와 일본사기에 기록될 정도로 일본과의

교류를 주도하며 세력을 떨쳤던 - 아라가야의 도읍지로서 유서 깊은 고장이다.

 

 함안의 지형은 남쪽에 최고봉인 여항산을 두고 북쪽으로 남강과 낙동강이 흐르는 남고북저南高北低형으로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지세와는 상반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물이 임금이 있는 북쪽 방향으로

거슬러 흐른다 하여 예로부터 '역수의 고장, 반골의 고장'이라고 오해를 받기도 했고,

낙동강과 남강의 빈번한 범람으로 인해서 오랜 세월동안 홍수의 피해를 겪어왔던 탓에 전국에서 가장 긴 제방(둑)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곳도 함안군인데, 지금은 훌륭한 생태습지로 변모했고, 봄에 야생화가 만발하면 이곳에서 전국 규모의 ‘둑방 마라톤 대회'가 열린다.

 

 

 

 

 

말산리 아라가야 왕릉 고분군 ( 2004. 01.)

 

봄이 오는 악양루 ( 2008. 04.)

 

남강과 낙동강이 합쳐지는 합강정에서 본 풍경 ( 2008. 05.)

 

반구정에서 본 창녕군 남지와 낙동강( 2012. 11.)

 

1. 악양루                                                                  2. 반구정

3. 합강정                                                                  4. 무진정

 

 

 

 

 반면에 사시사철 풍부한 강줄기는 산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남강과 낙동강이 합쳐지는 용화산

자락에는 합강정合江亭이라는 정자가 있고, 칠북면에는 광심정廣心亭, 군북면에는 와룡정臥龍亭이 있다. 아울러 반구정伴鷗亭의  아름다운 일출과 악양루岳陽樓의 장엄한 일몰 풍광은 두고두고 가슴에

남을만큼  감동적이다.

 

 함안군의 북쪽에 자리 잡은 군북면郡北面은, 남강변 주위로 비옥한 충적평야가 넓게 발달하여  대규모

시설재배 하우스농사가 발달하였고, 면의 중심에는 백이.숙제의 정절을 간직한 백이산伯夷山이 있다.

 그 백이산의 서쪽에 단종임금 때의 생육신 조려 선생을 모신 서산서원이 있고, 북쪽 소포리에는 고려말

홍건적으로부터 풍전등화의 나라를 구한 충렬공 이방실 장군을 모신 남강서원이 있다.

그리고 이웃한 산인면에는 고려가 멸망하자 조선을 등지고 절개를 지킨 600년 역사의 ‘고려동마을’이 있어서 이곳 함안이 충절과 선비의 고장임을 말없이 이야기해 주고 있다.

 

 또한, 마산과 고속도로에 인접해 있어 사통팔달의 교통요지인 칠원면에는, 조선시대 서원의 창시자 주세붕 선생을 모신 무산사를 비롯한 덕연서원과 우리나라 민간정원의 진수를 보여주는 무기연당舞沂蓮塘이 청룡산 아래에 자리를 잡고 있다.

 

 

 

 

1. 서산서원                                                              2. 남강서원

3. 무산사                                                                 4. 고려동

 


 



 방어산에서 본 백이.숙제봉 ( 2008. 05.)



반구정에서 본 낙동강( 2012. 11.)

 

 

함안박물관 앞 시배지에 700년만에 꽃을 피운 아라 홍련 ( 2012. 08. 24.)

 

 

 

 

 

 함안에서 마산 쪽으로 난 국도 5호선을 따라 가다가, 구고사 이정표가 보이는 구성교 앞에서 좌회전하여 무기천을 거슬러 안쪽으로 들어가면 청룡산 자락의 아담한 마을, 무기리舞沂里가 나온다.

지금은 마을 주위로 공장들이 무분별하게 들어서서 동네 분위기가 많이 망가졌지만 칠원면 무기리는 상주 주씨의 집성촌으로, 국담菊潭 주재성 선생을 모신 종가집과 별서정원인 연못, 무기연당이 마을 뒤쪽으로 자리잡고 있다.

 

‘국담 선생은 조선 영조 때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사재를 털어 영남지방의 의병을 모아, 관군과 함께 민란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웠고, 관군들은 선생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마을 입구에 ‘창의사적비倡義事蹟碑’를 세우고, 기양서당 앞마당에 연못을 새로 만들어서 국담 선생에게 선물한 것이 무기연당의 유래이다' 라고 문화재청 홈페이지와  일반자료에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무기연당의 유래에 대해서는 명확한 사료가 남아있지 않고, 국담 선생의 의병활동에 대해서는 일부 반론도 있기에 ‘이인좌의 난’이후 논공행상 과정에서, 일부 미담이 인위적으로 첨삭되었을 가능성도 고려해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이인좌의 난'은 1728년(영조4년) 3월에 일어났다.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의 일부 세력과 남인세력이

연합하여 무력으로 영조임금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으려고 했던 쿠데타인데, 무신년에 일어났다고 하여‘무신난’이라고도 한다.

 서울·경기·충청·강원·전라·경상·평안·함경도 등 나라의 반쪽이 가담하였는데 영남지방에서는

정온 선생의 4대손인 정희량과 조성좌 등이 가담하여 거창에서 함양을 거쳐 전라도를 돌아 충청도의 반군과 합류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진압되었다.

 

 이 반란에 분개한 영조임금은 대구 입구에 ‘영남을 평정한 비'란 뜻의‘평영남비平嶺南碑'를 세우고 영남지역을 반역의 원흉으로 지목해 일체의 과거시험 응시를 금지하는 강경 조치를 취하게 된다.

 이로써 합천과 진주, 거창, 함안, 고령, 성주를 비롯한 경상우도 지역은 이후 상당히 오랫동안 차별과 소외를 당하는 시련의 세월을 겪게 되었는데 그 빌미를 제공하였던 사건이 이인좌의 난이라고도 보는 시각도 있다.

 

 

 

 

  

 

 

 

좌측이 종가집 몸채이고 우측이 무기연당이다 ( 2012. 12. 22)

 

1. 주씨 종가집 충효쌍정려문                                        2. 충효사와 영정각

3. 감은재                                                                  4. 풍욕루

 

주씨 종가집의 좌측 사랑채(감은재)와 안채 출입구인 중문채 ( 2012. 11.)

 

 

 

 

 무기리의 주씨 종가집은 대문채, 사랑채, 안채, 사당 등의 주거영역과 연못에 딸린 하환정何煥亭, 풍욕루風浴樓 등의 별당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문에는 주재성 선생의 충신정려忠臣旌閭와 선생의 아들인 주도복 선생의 효행을 기리는 선홍빛의 효자정려孝子旌閭가 나란히 걸려있고, 대문채는 일반 살림집에서는 볼 수 없는 삼문형식을 취했고 화려하게 단청까지 하였다. 이는 정려각旌閭閣을 겸하기 때문에 대문채의 격을 높인 특별한 사례에 해당된다.

 

 충신정려를 받은 주재성 선생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서 본관은 상주尙州, 호는 국담菊潭이다.

이인좌의 난 때 의병을 일으켜 영호남의 요새인 분치령分峙嶺을 방어하였고, 가산을 팔아 군량을 공급하여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다. 난이 평정된 뒤 관찰사 황선과 암행어사 박문수가 조정에 선생을 천거하였으나 등용되지는 않았다.

 사후에,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추증되었으며, 1783년 정조임금 때 충신정려旌閭를 받았고, 1788년 마을 뒤편 기양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용학강의 庸學講義>, <경의집록 經義輯錄>, <거가요범 居家要範> 등을 남겼다.

 

 

 주도복 선생은 국담 선생의 장남이다. 이인좌의 난 때 부친과 함께 참전하였고, 모친의 병세가 위독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피를 마시게 하여 80일을 더 연명케 한 대단한 효자로 알려져 있다.

 영조임금이 승하하자 3년 동안 북쪽을 향하여 절하고 통곡하니 조정朝廷에서 이 소식을 듣고 지극한

충효를 가상히 여겨 방상도方喪圖를 그려 길이 보존토록 하였는데 현재 함안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선생은 임금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그의 서재를 감은재感恩齋라 이름 짓고 자신의 호號로 삼았다. 1859년에 나라에서 증조봉대부사헌부지평을 증직하고 효자정려旌閭를 하사하였다.

 

 

 

 

 

 

안 채 - 1 ( 2012. 11.)

 

안 채 - 2 ( 2012. 11.)

 

사 당 ( 2012. 11.)

 

 

 

 

 대문을 들어서면서 만나게 되는 좌측의 주거영역과 우측의 별당영역은 상당히 대조적이다. 우아한

별당공간에 비하여 사랑채와 안채는 너무나 소박하다. 그래서 오히려, 살림채를 별당채의 부속채로 보려는 시각도 있지만, 근검절약을 미덕으로 삼았던 선비정신의 결과물로 해석되고 있다.

 

 중앙에 대청을 둔 3칸 규모의 단촐한 감은재感恩齊는 주도복 선생의 서실書室이자 사랑채이다. 선생의 문집과 책판이 보관되어 있고 북쪽벽에는 초상화를 모셔 두었던 영정각이 남아 있다.

 

 안채는 단순한 맞배지붕의 ‘-’자형 건물이나, 실생활에 편리하게 후대의 잦은 개보수로 인하여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고, 안채의 텃밭 뒤로는 국담 선생을 모신 불조묘 사당이 있다.

 

 

 

 

 

 

 

 

 주씨 종가집의 자랑인 무기연당은 종가집 곁에 조성되어 있는 별서정원을 이르는 말로, 사랑채 오른쪽

낮은 담장너머에 꼭꼭 숨겨져 있다. 그래서 방문객에게 전혀 모습을 보여주지 않다가 작은 문(한서문)을

열고 들어서면 일순간 그 정갈하고 단아한 자태를 갑자기 드러낸다.

순간 방문객은 뜻밖에 마주친 이 작은 신세계에 짧은 감탄사와 함께 인간이 사는 세상이 아니라 별천지에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그 정결하고 관조적인 분위기에 점점 도취되어 복잡한 세상사를

잊고 한순간 상념에 빠지게 된다.

 

 현재 함안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하환정도何換亭圖’에는 무기연당의 초기 모습이 잘 남아 있다.

그림 속에는 하환정, 풍욕루, 영귀문(한서문) 등의 건물이 나오고, 봉황석, 탁영석, 석가산, 행단, 귀두석 등의 위치와 주변 산세까지 잘 나타나 있다.

수려했던 주변환경은 격세지감을 느끼게도 하지만, 무기연당 내부는 그림이 그려질 당시의 모습과 크게 변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무기연당의 봄 - 1 ( 2005. 03. 25.)

 

무기연당의 봄 - 2 ( 2005. 03. 25.)

 

 

무기연당의 봄 - 3 ( 2005. 03. 25.)

 

 

무기연당의 봄 - 4 ( 2005. 03. 25.)

 

 

무기연당의 봄 - 5 ( 2005. 03. 25.)

 

 

 

 

 

 무기연당은 연못과 하환정, 풍욕루 등 2개의 정자와 최근에 지은 충효사忠孝祠와 영정각影幀閣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당은 장방형( 20M x 12.6M )의 연못으로, 가공하지 않은 투박한 자연석으로 2단의 석축을 쌓고 연못의 중간에 석가산을 섬처럼 배치하여 양심대養心臺라 하였다.

 네모난 연못에 원형의 석가산을 쌓아 도교에서 말하는 삼신산의 하나인 봉래산蓬萊山이라 이름 짓고, 신선이 사는 무릉도원을 추구하였다.

 석가산의 북측과 서측에는‘백세청풍百世淸風’과‘양심대養心臺’라고 쓴 괴석을 배치하여, 의연하게 세상을 등지고 절의를 지킨 백이. 숙제를 본받고자 하는 정신과 어진 마음을 함양하고자 했던 선비의 세계를 대변해 주고 있다.

 

 

 

 

풍욕루

 

 

하환정

 

 

                                                                       양심대

 

 

 

 

 

 무기연당의 2개의 정자 중, 하환정何煥亭은 연못의 북쪽에 자리를 잡아 연못의 축선과 정확하게 일치시켜서 봉래산 너머 안산과 조산과의 연결을 의도하였고, 후대에 지어진 풍욕루風浴樓는 중심에서 벗어나 우측 북동쪽에 한단 높게 자리를 잡았다.

 

 하환정은 정면과 측면 모두 2칸이며, 뒤쪽에 방 1칸이 있는 소박한 규모의 정자이고, 1860년경에 지어진 풍욕루風浴樓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양측으로 방을 배치하고 가운데 중심에 마루를 둔 아주 개방적인 구조의 정자이다.

'바람으로 목욕을 한다'는 운치있는 이름은, 풍진으로 오염된 속세의 묵은 때를 청룡산 깊은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깨끗한 바람이 말끔히 씻어가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았으리라!

 

 무기연당의 남단 끝에 있는 충효사는, 청룡산 아래에 있었던 국담 선생을 모신 기양서원이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철거된 이후, 자리를 옮겨 1971년에 일부 새로 복원한 건물이고, 영정각과 기양서원 중건기념비가 나란히 서 있다.

 

 

 

 

무기연당의 여름 - 1 ( 2010. 07. 28.)

 

무기연당의 여름 - 2 ( 2010. 07. 28.)

 

무기연당의 여름 - 3 ( 2010. 07. 28.)

 

무기연당의 여름 - 4 ( 2010. 07. 28.)

 

무기연당의 여름 - 5 ( 2010. 07. 28.)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 국담 주재성 선생은 청룡산 물 맑은 골짜기 무기리에 무기연당과 기양서원을

짓고, 세속적인 욕망보다는 자연과 더불어 안빈낙도하며 후학을 가르치는 유학자의 삶을 몸소 실천하며 살았다.

 

  국담 선생의 정신과 철학이 담겨있는 무기연당은, 조선시대의 3대 민간정원 - 담양의 소쇄원, 보길도의 부용지, 영양의 서석지 - 과 비교해도 결코 손색이 없어서 '4대 민간정원'으로는 능히 불릴만하고,  천원지방天圓地方의 기하학적 질서를 바탕으로 절제미와 정갈함이 조화를 이루었고,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민간정원으로서의 기품을 잘 간직하고 있다.

 

 

 

 

 

 

 

무기연당의 가을 - 1 ( 2012. 11. 25.)

 


무기연당의 가을 - 2 ( 2012. 11. 25.)

 

 

무기연당의 가을 - 3 ( 2012. 11. 25.)

 

무기연당의 가을 - 4 ( 2012. 11. 25.)

 

 

 

 

 끝으로,  무기연당의 아름다움을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잘 노래한 국담 선생의 후손 주진갑 할머니의 글이 있어 소개한다.

 

“석가산을 바라보니 삼층으로 되어 있고, 물 가운데 괴석怪石들은 기묘하고 기이하다.

수 백년 묵은 은행나무는 연못에 차일(遮日:햇빛을 가리려고 치는 포장)치고,

남풍南風, 춘풍春風 휘어잡아 우쭐우쭐 춤을 출 때,

비금(飛禽 : 날아다니는 새)이 노래하니 춘색春色이 완연하다.

물가에 누운 향나무, 구불 구불 천수天壽를 누리는 듯.

 

풍욕루 올라가 경물(景物 : 철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의 경치)을 살펴보니

연못가에 온갖 화초 창창(蒼蒼 : 바다나 호수 따위가 파랗다는 뜻)한

푸른 물에 옥록홍황(玉綠紅黃 : 옥색, 푸른색, 붉은색, 누른색 - 온갖 색깔) 낙화落花되니

하환정 기둥 앞에 선비들 글 읽는 소리가 귓전을 울리는 듯,

붉은 소나무 두 그루는 천상天上을 향하여 여의주를 다투는 듯,

푸르고 맑은 물에는 잉어 떼가 먹이를 찾느라고 지느러미를 세워 마치 전쟁하는 형색이다.

이 좋은 우리보물 자손만대 보존하세!

- 2003. 2. 2. 음력 설 이튿날 주진갑 적다.”

 

 어깨너머로 겨우 한글만 익혔다는 할머니의 시인데 후손으로서의 긍지와 무기연당을 조성한 조상에 대한 고마움이 절절이 묻어나는 글이다.

 

 

 

 

 

 

 

 

 

 

 

무기연당의 겨울 - 1 ( 2012. 12. 22)

 

 

무기연당의 겨울 - 2 ( 2012. 12. 22)

 

무기연당의 겨울 - 3 ( 2012. 12. 22)

 

 

무기연당의 겨울 - 4 ( 2012. 12. 22)

 

무기연당의 겨울 - 5 ( 2012. 12. 22)

 

 

무기연당의 겨울 - 6 ( 2012. 12. 22)

 

 

 

 

 

 

 

 

 

 

‘무기舞沂’라는 말은 <논어>의

 

“浴乎 風乎雩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쐰다)”

 

라는 글귀에서 따왔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장래의 희망을 묻자, 다른 제자들은 모두 벼슬에 대한 포부를

이야기했지만, 증점이라는 제자만은 벼슬보다는 '친구들과 함께 자연과 벗하며 유유자적하게 살고 싶다' 고 대답하자, 공자께서도 증점처럼 살고 싶다고 한 고사에서 나왔다.

 

무기마을과 무기연당의 어원語源인 셈이다.

 

 정자의 이름인 하환何煥에도 다음과 같은 뜻이 숨어 있다.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이 즐거움을 어찌 벼슬자리와 바꾸겠는가!”

 

 

 그 옛날 국담 선생은 경남 함안의 무기마을에서 평생을 학처럼 살았다.

 

 

 

 

 

                                                                                                                               

                                                                                                                           2012. 12.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