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문화재청 ‘청도 운강고택 및 만화정 기록화 보고서’ 4p.)
28. 청도 운강고택 및 만화정
- 조화로움 속에서 꽃이 핀다 -
‘맑고淸 바른 길道’이라는 좋은 이름을 가진 청도淸道군은, 산과 물 그리고 인심이 맑아서 ‘삼청三淸의 고을’로도 불릴 정도로 주민들의 긍지와 자부심이 높은 지역이다.
경상북도의 최남단으로 대구 바로 밑에 위치한 청도는, 운문산과 가지산, 문복산 등 해발 1,000m이상의 고봉으로 둘러싸여 있어 자연재해로부터 비교적 안전하며, 영남의 알프스라 불리는 가지산 자락에서 발원한 맑은 동창천이 운문호를 거쳐 시내로 흘러들어, 청도읍 쪽에서 내려오는 청도천과 합류하여 밀양강이 되고 낙동강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산자수명한 이곳에 예로부터 여러 명문집안들이 뿌리를 내렸는데, 김해 김씨, 밀양 박씨, 여흥 민씨, 창녕 성씨, 의흥 예씨, 고성 이씨, 재령 이씨 등이 이 고장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아왔다.
삼족당 김대유 선생이 세운 동창천변의 삼족대 ( 2012. 11.)
신지리 마을 풍경 ( 2012. 11.)
운문호 아래쪽으로 동창천(금천錦川, 비단내)이 휘감아 도는 금천면 신지리 일대에는, 밀양 박씨 일족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400년 동안 대대로 살아왔다.
‘섶말’이라고도 불리는 이 마을은, 마을을 대표하는 운강고택과 운암고택, 섬암고택, 도일고택, 명중고택 등을 비롯하여 서당으로 쓰였던 선암서원, 그리고 만화정 정자까지 마을 안에 두루 잘 갖추어져 있고, 주변 논밭에는 고인돌과 선돌들이 수도 없이 널렸고, 강가에는 수 백 년 된 소나무, 느티나무, 버드나무가 즐비한 유서 깊은 전통마을이다.
그러나, 20년 전쯤에 국도가 마을을 관통하여 뚫리면서 고택들의 일부가 뜯겨 나가고, 마을이 아래 위, 두 개로 쪼개져서 옛 자취와 정취가 많이 사라진 것은 두고두고 개탄할 일이나, 소요당逍遙堂 박하담(1479~1560) 선생이 이곳에 정착한 이후, 삼족당三足堂 김대유 선생과 함께 조선시대 청도의 양대 기둥으로 자리 매김하며 지역사회의 중심이 되어 헌신해 왔다.
선암서원 앞의 어성산이 바라 보이는 동창천 ( 2012. 11.)
동창천변의 만화정 전경 ( 2012. 11.)
신지리의 고택들
소요당 선생은 사마시에 합격한 후 잠시 관직에 몸을 담았으나, 무오사화와 을묘사화를 목격하고는 벼슬길을 단념하고, 일생을 초야에 묻혀 학문과 저술, 그리고 후학양성에 전념한 순수한 선비요, 학자였다.
항시 당시의 유명한 석학들과 학문을 교류하였고, 특히 남명 조식 선생과 삼족당 선생과는 절친한 친구이자 학문적 동지였었다.
학문뿐만 아니라 주변과 이웃에도 관심을 기울여, 삼족당 선생과 함께 청도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운문산 아래에 사창社倉을 지어서, 흉년과 굶주림에 고생하는 백성들을 위한 빈민구제사업을 펼치기도 하였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는 이조판서에 증직되었고, 삼족당 선생과 함께 선암서원에 배향되셨다.
현재 금천 초등학교 위쪽, 용두소 바위위에 자리 잡은 선암서원은, 금천 주변의 수려한 풍광과 드불어
청도 제일의 명승지로도 이름이 높은 곳인데, 선암서당으로 오랫동안 쓰이다가 지금은 체험형 고택민박시설로 활용되고 있다.
선암서원의 구조는 서원과 민가가 결합된 독특한 형태로서, 살림채는 ‘ㅁ’자 형태로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와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다.
살림채의 마당을 가로질러 행랑채의 중문을 지나야 서원으로 연결되는, 특이하고도 조금 불편한 동선체계를 가지고 있고, 서원 마당에는 2백년 된 백일홍 나무 2그루가 힘겹게 가지를 지탱하고 있다.
강당의 뒤쪽 장판각에는 보물로 지정된 배자예부운략판목排字禮部韻略板木과 지방문화재인 해동속소학판목, 14의사록판목 등이 소장되어 있었으나, 2005년에 안동국학진흥원으로 옮겨가고, 현재 장판각은 비어있는 상태이다.
선암서원 전경 -1 ( 2012. 11.)
선암서원 전경 -2 ( 2012. 11.)
운강고택 진입부 고샅 ( 2006. 06.)
운강고택 솟을대문 ( 2006. 06.)
섶말을 대표하는 운강고택은, 소요당 선생이 벼슬을 사양하고 낙향하여 서당을 지어 후학을 양성하였던
그 옛터에, 1809년(순조9), 선생의 11대손 박정주 선생이 살림집으로 가옥을 처음 신축하였다.
시간이 흘러 운강 박시묵 선생이 1824년(순조24)에 대규모로 증축하여 고택의 체계를 갖추었고, 1905년에 박순병 선생이 다시 개보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소유자는 박정주 선생의 6대손이다.
운강고택(중요민속문화재 106호)은 대지 1천770평에 9동의 건물을 거느린 80칸 규모의 사대부집이다.
사랑채와 안채는 넓고 넉넉한 마당을 대칭적으로 가지고 있고, 두 개의 마당은 상호 별개의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있지만 세련된 동선처리로 부드럽게 연결된다.
건물의 전체적인 배치는 사당을 제일 뒤쪽에 두고, 그 앞에 두 개의 튼‘ㅁ’자형 건물군인 안채와 사랑채를 좌우로 앉혀서 전체적으로는 ‘ㅁ’자형 건물군 3개가 모여서 ‘品’자형 구조를 완성하였다.
가장 일반적이고 단순한 ‘一’자 모양의 구조에서 출발하여, 재산이 불어나면 본채의 좌우와 앞에 건물을 덧붙여 ‘ㅁ’자형태가 되고, 다시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사당채군의 ‘ㅁ’자 3개가 모여 ‘品’자형 구조를 이루게 되는 전형적인 재력가집안의 구조를 띠고 있다.
운강고택 고택의 가을 ( 2012. 11.)
운강고택 큰사랑채 뒤편의 후원 ( 2012. 11.)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대문간채, 큰사랑채, 중사랑채, 고방채등 4동의 건물이 사랑채 영역을 형성하고,
좌측으로 안마당을 가운데 두고 안채, 행랑채, 곳간채, 중문채 4동이 안채 영역을 형성하면서 좌우로 자리를 잡았다. 사당채는 중사랑채의 후원인 백류원 뒤쪽, 조용한 곳에 자리를 잡았고, 안채와 큰사랑채 뒤에도 비교적 여유 있는 후원이 조성되어있다.
‘운강고택雲岡故)’이라 쓴 편액이 걸려 있는 대문간채는 6칸으로 이루어졌고, 문간방이 2칸이고, 곳간과 외양간이 각각 1칸씩이다. 솟을대문 바로 좌측에 옥외 화장실인 측간을 두었는데, 집안의 어른과 손님들이 사용하는 공간이라 화장실이지만 공을 많이 들였다. 벽체 칸막이에 그림을 넣고 투각하여 기능적인 면과 장식적인 면을 함께 살린 센스가 돋보이는 운강고택의 명물 중 하나이다.
대문간채. 오른쪽이 측간이다 ( 2006. 06.)
대문간채의 측간 ( 2006. 06.)
대문간채의 측면 모습 ( 2005. 10.)
큰사랑채는 대문의 왼쪽에 이중기단 위에 당당히 자리를 잡고 있다. 큰사랑방과 대청이 나란히 이어지고 큰사랑방의 뒤쪽으로 뒷사랑방 2칸을 덧붙였다. 뒷사랑방은 안곳간채와 연결이 되어 있는데, 안채의 여인들이 친가에서 온 남자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유일한 장소로 쓰였다.
그리고 큰사랑채의 대청 좌측에 후원과 연결된 조그만 쪽문이 하나 있는데, 후원의 통로 역할도 하지만, 대문을 들어선 부녀자들이 굳이 사랑채 앞을 지나지 않고도 이 문을 통해서 후원을 거쳐 안채로 바로 갈 수 있도록 동선을 연결해 놓았다. 안채 거주자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이 작은 쪽문 하나에서도 잘 읽을 수 있다.
큰사랑채 - 1 ( 2006. 06.)
큰사랑채 - 2 ( 2006. 06.)
좌측 끝이 안채로 갈 수 있는 큰사랑채의 쪽문이다 ( 2006. 06.)
현재는 보수공사 중인데 내년 봄에 끝날 예정이다.( 2012. 11.)
대문에서 정면으로 마주보이는 ‘ㅡ’자형의 건물이 중사랑채인데, 서당으로 쓰였다고 한다. 툇마루를 둔 2칸의 온돌방과 마루가 있고, ‘백류원百榴園’이라 쓴 편액이 걸려 있다.
중사랑채 후원의 이름이 원래 백류원으로 옛날에는 석류나무가 가득했으나, 지금은 흔적도 없고 측백나무만 잔뜩 심겨져 있다.
중사랑채의 우측 편에는 7칸의 고방채가 있는데, 옛날에 마굿간과 가마, 인력거 등을 수납하는 창고로 쓰였던 곳이다. 마굿간 뒤편에는 하인 전용의 화장실을 따로 두었다.
대문에서 본 중사랑채 ( 2006. 06.)
담장너머로 본 중사랑채 ( 2005. 10.)
중사랑채 우측의 고방채 ( 2012. 11.)
안채 후원에서 본 사랑마당 ( 2006. 06.)
운강고택의 넓고 여유로운 사랑마당 안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는데, 큰사랑채와 중문간채 사이를 이어주는 꽃담이 바로그것이다. 이 꽃담은 ‘길吉’이라는 글씨와 꽃잎 모양과 기하학적인 무늬를 교대로 기와를 사용하여 새겨 넣었는데, 집 안에서 유일하게 화사하게 꾸민 곳이다.
‘길吉’자의 뜻은 ‘선비(士)의 말(口)은 참되고 옳으니 좋은 일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올바른 삶을 지향하는 선비 정신과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마음을 함께 새겨 넣은 것으로 보인다.
꽃담의 앞면(사랑채쪽)과 뒷면(안채쪽) ( 2006. 06.)
서쪽을 보고 자리 잡은 안채는 길이가 7칸이며, 왼쪽부터 부엌, 안방, 대청, 작은방이 차례로 배열되어 있다. 안방과 부엌이 접하는 부엌 귀퉁이에는 작은 찬마루를 두고, 안방에서도 바로 드나들 수 있게 문으로 연결하였다.
대청마루 아래에는 별도의 디딜마루를 설치해 여자들이 오르내리기에 편리하도록 신경을 썼고, 뿐만 아니라, 며느리가 거주하는 작은방은 측면의 후원쪽으로 비밀 통로를 별도로 만들어, 남편이 은밀히 왕래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안 채 - 1 ( 보수공사 중일때의 모습 2006. 06.)
안 채 - 2 . 대청 앞의 디딜마루가 보인다 ( 2012. 11.)
안 채 - 3 . 후원 ( 2012. 11.)
안 채 - 4 ( 2012. 11.)
안채 왼쪽에 있는 행랑채는 왼쪽부터 방앗간, 곳간, 마루, 방, 부엌이 차례로 배열되어 있고, 방앗간 뒤쪽으로 2칸의 뒷간을 설치하여, 주인과 하인이 따로따로 쓸 수 있도록 구분해 두었다.
안채의 정면에 가로 놓인 곳간채는 곡식창고인데, 뒷사랑방과 만나는 부분에 출입문을 달아서, 큰사랑채 후원을 통하여 대문으로 직접 연결될 수 있게 하여 실생활의 편리성을 도모 하였다.
안 채 행랑채 - 1 ( 2012. 11.)
안 채 행랑채 - 2 ( 2012. 11.)
안 채 곳간채와 사랑채는 1년째 보수공사중이다 ( 2012. 11.)
안채 후원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남겨 둔 청도의 명물 반시이다 ( 2012. 11.)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당시의 운강고택은 그 규모나 내용면에서 실로 대단한 집안이었음 잘 알 수 있다.
규모적인 면에서는, 곡식 등을 보관하는 곳간이 두 군데, 안채와 행랑채 등에 딸린 부엌이 세 군데, 신분별로 구분된 화장실만도 네 군데나 되는 쌍‘ㅁ’자형의 몸채를 가진 대저택이었다.
내용적인 면에서는, 엄격한 위계질서와 남녀차별의 신분질서도 곳곳에 나타난다.
집안의 어른이 기거하는 건물은 기단의 높이와 재료에서 차이를 두었고, 화장실도 신분별로 나누어 따로 설치를 하여, 남자 어른들이 이용하는 행랑채 화장실은 측간, 여자들이 쓰던 안채 방앗간 뒤 화장실은 뒷간, 하인들이 쓰던 마굿간 뒤쪽 화장실은 통시라고 불렀다 한다.
그리고 담장의 장식적인 면에서도 사랑마당은 꽃담으로 치장하고, 안마당 쪽은 흙담으로 일반적으로 마무리하여, 남녀가 사용하는 공간의 격을 확실히 구분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실생활의 부분에 있어서는 약자인 여자들을 배려하는 세심함도 또한, 집안 곳곳에 숨어있다.
1. 대문간채의 측간 - 1 ( 입구의 투각 장식) 2. 대문간채의 측간 -2 ( 내부벽체의 투각 장식)
3. 안채 행랑채의 뒷간 4. 마굿간 뒤쪽의 통시
사당채 전경 ( 2012. 11.)
전반적으로, 청도의 운강고택은, 경북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ㅡ’자형 건물들의 결합체로 집 전체가 구성되어 있지만, 남녀와 주종을 명확히 구별한 공간구성, 여성들의 편리한 동선, 그리고 여성 가사공간의 합리적인 배치 등을 통하여, 공간의 질서와 짜임새가 훌륭하고, 조선후기 지방 상류층 주택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사대부의 집으로 평가받고 있다.
운강고택에서 금천교 쪽으로 500M쯤 떨어진 언덕위에는, 운강 선생이 학문을 닦으며, 학생들에게 근대화 교육을 시키던 만화정萬和亭이 있다. 선암서원이 있는 용두소를 거쳐 내려온 동창천이 바위 언덕을 만나 잠시 쉬어가는 곳에 자리를 잡은, 살림채가 딸린 정자이다.
운강고택에서 걸어서 5분이면 충분히 닿을 수 있는 만화정으로 가는 길은, 도중에 이런 이정표를 만나게 된다 - '청도 임당리 김씨고택 10 Km' - 차로 5분이면 충분한 가까운 거리에 있고, 임금을 모시던 내시들이 살았던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택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임당리 김씨고택을 먼저 들른 후, 되돌아 나와서 만화정으로 가곤 했었다.
만화정 전경 ( 2012. 11.)
임당리 김씨고택 ( 2012. 08.)
신지리에 이웃한 임당리에는 임진왜란 직전부터 약 400년간 16대에 걸쳐 내시內侍들이 살아온 김씨고택(중요민속문화재 245호)이 있다. 16대까지 성이 다른 내시를 양자로 들여 대를 이었고 18대 이후부터는 자식을 낳아 대를 이었다.
궁중의 내시로 근무하다 낙향한 김일준 선생은 벼슬이 정3품에까지 이르렀는데,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주변과 이웃에 덕을 베풀고 살았기에, 마을에서 존중을 받으며 대대로 족보가 이어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마을 뒤쪽에 위치한 김씨고택은, 대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사랑채가 비스듬히 자리를 잡고 문간마당을 지배하고 있고, 출입구 옆에 중사랑채를 끼고 있는 안채는, 사방이 높은 담장과 건물로 둘러싸여 있어 아주 폐쇄적인 구조이다.
가족 구성원들의 특성으로 인하여, 일반 사대부집보다 더 엄격하게 안채의 노출을 막았고, 사랑채에서 안채의 출입을 컨트롤할 수 있는 구조를 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내시 가문에 며느리로 들어온 여인은 친정 부모의 상을 당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평생 문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고 한다.
한편으로, 집의 배치는 남향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북서향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것은, 경북 성주 한개마을의 ‘북비고택’의 경우처럼, 임금이 계신 북쪽 방향을 향해서 집을 앉힌 일편단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만화정 -1 ( 2006. 06.)
신지리 마을 입구에 자리 잡은 만화정의 구성은, 정자와 장서각과 숙식을 위한 부속채로 이루어져 있는데, 정자는 ‘ㄱ’자형 평면구조로서 온돌방과 마루, 누마루로 되어 있다.
소요당 선생이 이곳에 서당을 지어 후학들을 가르친 이래로 만화정의 유구한 역사 속에는, 숱한 우국지사의 충정과 학자의 열정이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임진왜란 때, 부산 동래읍성이 함락되고 10여일 만에 청도읍성도 무너지고 군수마저 달아나자, 박씨 집안의 우국지사 열네 분이, 만화정 앞 느티나무 숲에 모여 결사항전을 결의하였다. 14의사는10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어성산 등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수세에 몰리자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로 뛰어내려 순국한 분도 있었다.
만화정 -2 ( 2006. 06.)
만화정 - 3 ( 2006. 06.)
그리고 서구의 열강들이 조선을 침략하던 위태로운 시절에는, 나라의 운명이 오직 근대식 교육에 달렸다는 신념을 가졌던 운강 선생은, 젊은 인재들에게 학비는 물론이고 숙식까지 제공하며 사재를 털어서 교육을 시켰는데, 이런 만화정의 정신은 근대적인 장학제도의 근간이 되기도 하였다.
아울러 운강 선생 자신도 학문에 전념하여 운창일록 13책, 14의사록 등 자주적 민족교육을 위한 저술을 남겼고, 운강 선생의 아들 박재형 선생도, 해동속소학, 해동속고경중마방 등 38권의 귀중한 저서를 우리에게 남겼다. 만화정에서 싹이 튼 근대화교육은 훗날 신명학교를 설립하여 현대화교육으로도 계속 이어졌다.
세월이 한참 흘러 6.25전쟁 때는, 운문들판을 가득 메운 20여만 명의 피난민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청도를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은, 우국충정과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해 교육사업에 헌신하였던 선비혼이 살아 숨 쉬는 이 만화정에서 하루를 묵고 간 역사도 간직하고 있다.
만화정 - 4 ( 2006. 06.)
만화정에서 금천너머 내다보이는 드넓은 운문들판의 원래 이름이 ‘만화평萬花坪’이었다.
그래서 운강 선생은 ‘만화萬花’의 ‘花’자가 ‘和’와 발음이 같은 점에 힌트를 얻어, 정자를 ‘만화정萬和亭’이라 이름 지었다 한다.
‘화和’자의 의미는 ‘조화롭다, 알맞다, 화목하다, 온화하다’라는 뜻을 두루 포함하고 있고, 세상의 모든 일에 통용되는 근본적인 도리와 이치를 담고 있다.
요즘의 각종 선거에서 , '남을 헐뜯어야만 내가 이긴다'는 세태가 판을 치는 정국에서는 더욱 더 절실히 요구되는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지난 주말 TV에서 우연히 본 이 글귀와도 일맥상통 한다.
‘태산은 한 줌의 흙도 사양하지 않고 泰山不辭土壤
강과 바다는 작은 물줄기라도 가리지 않는다 河海不擇細流’
(출전 : 사마천의 사기史記 - 이사열전)
‘만화萬和’ - 즉, 모든 일이 조화롭고 화목한 세상, 그래서 온갖 꽃(곡식)들이 만발한 황금 들판(萬花坪)을 우리세상에 구현하는 것이, 운강 선생이 만화정을 지어 젊은이들을 교육한 진정한 목표였을 것이다.
운문댐이 생긴 이후로 동창천(금천錦川)의 물이 많이 줄어들어 곳곳에 바닥을 보이는 곳이 많이 생겼다.
‘비단내’라는 명성에 걸맞게, 비단결처럼 부드럽게 황금 들판을 적시던 그 옛적을 상상하며 금천교를 천천히 건너왔다.
2012.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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