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예천 권씨 초간종택과 초간정사
- 천년대계의 초석을 놓다 -
예천군은 경북지역의 북쪽 관문이다. 군의 북부지역에는 소백산맥이 뻗어내려 산악지대를 이루었고, 중부와 남부지역에는 저지대 및 분지가 분포하는 북고남저형의 지형으로서, 내성천과 낙동강 유역의 하천변에는 비옥한 평야를 기반으로 농경지가 발달되어 있다.
회룡포를 휘감아 돌아가는 내성천의 도도한 물줄기처럼, 유교문화의 전통을 면면히 이어온 예천은, 안동과 더불어 영남지방의 대표적인 양반고을로서의 문화와 전통을 지켜왔다.
회룡포 ( 2012.11.02.)
예천읍에서 서남쪽 방향으로 지방도를 따라 10여분을 달리면, 예천 마늘의 주산지이며 쌀이 남아돌아 가난을 모른다는 용문면 금당실金塘室 마을이 나온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예언서인 정감록鄭鑑錄에서, 전쟁과 전염병, 자연재해 등이 피해가는 열 곳의 살기 좋은 땅, 십승지지十勝之地의 길지로 꼽았고, 조선을 건국할 때 도읍지로도 유력하게 검토되었던 곳이 바로 이 곳, 금당실마을이었다.
금당실 마을은 15세기 초에 감천 문씨가 먼저 이곳에 들어와 정착을 하였고, 그 뒤 이 마을로 장가 온 사위들인, 함양 박씨와 원주 변씨의 후손들이 번성하여 지금의 금당실 마을을 구성하고 있다.
세월의 이끼가 내려앉은 10여 채의 고택 사이로 미로처럼 끝없이 연결된 돌담길과, 마을을 지켜주는
약 800M에 이르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마을의 정취와 역사를 대변해 준다.
금당실마을 송림 ( 2012.11.02.)
죽림동 마을 원경 ( 2012.11.02.)
죽림동 마을 전경-1 ( 2012.11.02.)
죽림동 마을 전경-2 ( 2006, 08.)
죽림동 마을 입구 ( 2012.11.02.)
금당실 마을 앞 쪽의 드넓은 들녘너머로, 뒷산이 반달모양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있는 죽림동 마을에는, 예천권씨 초간종택과 별당이 있다. 초간종택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을 저술한 초간草澗 권문해(1534~1591년) 선생이 살았던 집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선생의 조부 권오상 선생이 임진왜란 이전에 신축한 수준 높고 품위 있는 건물로서, 초간종택은 중요민속문화재(제201호), 별당채는 보물(제457호)로 지정되어 있다.
건물 배치도
초간종택 전경-1 ( 2012.11.02.)
초간종택 별당-1 ( 2006, 08.)
초간종택 전경-2 ( 2012.11.02.)
초간종택 별당-2 ( 2012.11.02.)
초간종택은 사랑채인 별당과 안채와 사당채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의 구성은, 대문간채와 사랑채의 좌측으로 연결된 행랑채가 있었으나 예전에 모두 철거되었고, 지금은 근래에 지은 서고인 백승각百承閣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종택의 전면으로 툭 튀어나와 마을을 향해 당당하게 자리 잡은 사랑채는, 안채와 복도로 연결되어 있지만 독립된 형태를 취하고 있어 별당이라고도 부른다.
건물의 전면에 ‘대소재大疎薺’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왼쪽에 온돌방 2개가 나란히 붙어있고 오른쪽으로 6칸 넓이의 마루를 두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육간대청’이란 바로 이런 넓이의 마루를 말한다. 밖에서 보면 제대로 느끼지 못하지만, 실제 그 대청에 올라가 앉아 보면, 그 공간의 크기와 깊이에 압도당할 만큼 상당히 넓은 규모의 마루공간임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육간대청’은 웬만한 집이 아니면 보기가 쉽지 않은 규모의 마루이다.
육간대청에서 바라 본 들판과 아미산 ( 2012.11.02.)
초간종택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별당은, 마루를 지면으로부터 적당히 띄우고 주위로 난간을 둘러서 누마루 형식을 취하여 멋을 부렸고, 외관상으로는 매우 간결하고 단순하지만, 일부 천정의 부재 및 조각은 상당히 세련되고 정교하게 마무리하였다.
안동의 예안이씨 충효당의 별당, 쌍수당과 더불어 조선시대 사대부집의 품격을 잘 나타내주는 별당 건물로 평가를 받고 있다.
초간종택 별당-3 ( 2006, 08.)
초간종택 별당-4 ( 2012.11.02.)
초간종택 별당-5 ( 2012.11.02.)
초간종택 별당-6. 연등천정 모습과 부분적으로 우물반자를 설치하였다 ( 2006, 08.)
초간종택 별당-7 ( 2012.11.02.)
초간종택은 비교적 경사가 심한 부지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안채는 뒤쪽과의 심한 경사차를 극복하기 위하여 2단으로 높이 쌓은 축대 위에 건물을 앉혔고, 출입문 앞에는 여러 단의 계단을 두었다. 따라서 건물 전체가 상당히 높게 자리를 잡아서 웅장해 보이며 위엄도 있지만, 안채의 출입에 따르는 실생활에 있어서는 상당한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다.
안채의 정면 3칸 중 좌측이 안방이고 나머지 2칸은 우물마루를 깐 안대청으로 전면이 완전히 개방되어 있다. 안마당은 건물 전체 규모에 비해서 비교적 좁고 폐쇄적인 느낌이고, 다락 밑의 샛문을 통해서 후원 뒷마당과 통할 수 있다.
안채의 오른쪽으로는 별도의 안사랑채가 덧붙어 있다. 넓은 후원을 안사랑채의 마당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공간구성이며, 안사랑채의 마루는 별당의 복도와 연결되어 있어서 서로 내왕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안 채 - 1 ( 2006, 08.)
안 채 - 2. 후원 텃밭 ( 2006, 08.)
안 채 - 3. 대청 ( 2005, 03.)
안 채 - 4 ( 2005, 03.)
안채 출입구 중문에서 바라 본 바깥 모습 ( 2012.11.02.)
안 채 - 5 ( 2012.11.02.)
안 채 - 6 ( 2012.11.02.)
사당은 안채 우측 뒤쪽에 담장을 둘러, 별도의 영역으로 자리 잡고 있다. 사당의 전면에 설치된 삼문의 중앙인, 어칸御間의 양여닫이 문에는 수직으로 선 중간설주가 있는데, 초간종택의 또다른 명물이다.
이 설주의 단면은 'T'자 형으로 문받이를 겸하면서 위쪽으로 밀어 올려서 떼어낼 수도 있도록 만들었는데, 출입문에 중간설주가 있는 사례는 도산서원의 장판각에서도 볼 수 있지만, 붙였다 떼었다 할 수 있는 것으로는 여기가 유일하다고 들었는데, 아직 실제로 구경할 기회는 없었다.
사당채 전경 ( 2006, 08.)
별당의 좌측에, 이 집의 서고이자 유물관인 백승각百承閣이 있다. 이 서고에는 <대동운부군옥> 목판(보물 제878호), 초간일기(보물 제879호), 해동잡록(유형문화재 제170호), 옥피리 등, 집안의 여러 가지 보물들이 보관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대동운부군옥>은 선조 22년(1589년)에, 초간 선생이 완성한 평생의 역작인데, 2008년에서야 그 한글 완역판이 처음 나왔다. 당시 신문 기사의 한 부분이다.
“...... 특히 이 <대동운부군옥>은 임진왜란 이전 조선의 지식과 문물에 대한 방대한 지식이 실려 있어 매우 중요한 문헌으로 평가받고 있다.
단군이래 선조임금까지의 사실(史實) ·인물 ·문학 ·예술 ·지리 ·국명 ·성씨 ·산명(山名) ·목명(木名) ·화명(花名) ·동물명 등을 총망라했다.
이 책의 형식은 중국의 한자 사전인 <운부군옥(韻府群玉)> 체제를 따랐지만 그 내용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조선의 지식을 실었다......
한편 남명학연구소 경상한문학연구회 소속 연구원들이 2001년도에 시작해 8년에 걸쳐 역주했다. 초간이 나온 지 무려 200년 만에 완역에 성공했다.“
(출처 : 경남도민일보 kimjh@idomin.com)
사랑채 뒤로 백승각이 보인다 ( 2006, 08.)
백승각 전경 ( 2012.11.02.)
새로 신축한 유물관 전경 ( 2012.11.02.)
초간 선생은 젊은 시절 퇴계 선생에게서 수학하였고, 27세에 대과에 합격한 후, 대제학, 좌부승지 등을 역임하였고 청렴한 목민관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시대적 상황은 사대주의가 만연하였고, 사대부들이 중국의 역사와 문물에는 해박하면서, 정작 우리의 것은 잘 모르고 소홀히 하는 세태를 보고 크게 개탄한 선생이 <대동운부군옥>의 집필을 시작하였는데, 한 학자의 개인적인 저술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만큼 방대한 작업일 뿐만 아니라, 국가의 지원도 없이, 개인의 영리적 목적도 없이, 학자적 양심과 열정으로만 이룩한 실로 대단한 성과물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초간 선생의 체취와 열정이 스며있는 백승각의 주위와 사랑마당에는 가로등처럼 투박하게 생긴 감시카메라들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백승각 가까이 접근만 해도 갑자기 비상벨이 울려서 깜작 놀란 적도 있었다. 도난과 화재예방을 위해서 불가피한 시설이겠지만, 그 위치와 형태에 대해서는 좀 더 세심한 배려가 필요했었던 부분인데, 최근에 준공된 새유물관으로 백승각이 이전할 예정이라고 하니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새유물관은 볃당의 오른편 가장자리에 아담한 규모로 자리를 잡았는데, 그 규모나 형태 이미지가 초간종택의 주변 분위기와 비교적 어울린다는 점 역시,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초간정으로 가기위해서 차에 올랐다.
초간종택에서 초간정으로 가는 길은 지금은 냇가를 따라 생긴 도로를 타고 돌아가야 하지만, 예전에는 종가집 뒤편의 재 너머로 난 오솔길을 따라서 왕래를 하던, 운치 있는 사색의 길이 있었다고 한다.
초간정사 -1 ( 2012.11.02.)
초간종택에서 용문사 방향으로 멀지 않은 곳에, 문중 소유의 정자 초간정草澗亭이 있다. 소백산에서 흘러내리는 금곡천이, 용문면의 원류마을 앞에서 소나무가 우거진 숲을 만나 못과 계곡을 만들었고, 그 기암괴석 바위 끝에 초간정이 자리를 잡았다.
선조임금 때, 초간 선생이 초가삼간의 규모로 처음 지었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두 차례나 전화를 입어 불에 탔고, 지금의 건물은 초간 선생의 저서 등을 보관하기 위해서 고종7년(1870년)경에 후손들이 기와를 올려 다시 지은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이고, 4칸의 대청마루와 마루 한쪽에 2칸짜리 온돌방을 들였다.
초간정사 -2 ( 2006, 08.)
초간정의 원래 이름은 초간정사草澗精舍였는데, 후대에 잘못 전해져 초간정草澗亭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본래 ‘정사精舍’란 ‘학문에 힘쓰는 집’이란 깊은 뜻을 담고 있는데, 이곳에서 <대동운부군옥>의 집필에 매진했던 초간선생의 자취 뿐만아니라, 부친의 뒤를 이어 최초의 인명사전으로 알려진 해동잡록海東雜錄을 완성한 권별 선생의 뜻을 살려서, 이제라도 초간정사로 이름을 바로 잡는 것이 우리의 도리일 것이다.
초간정사 -3 ( 2012.11.02.)
초간정사의 성격과 위상을 말해주는 이런 일화도 전해져 내려온다. 옛날에는 초간정사 주위를 100바퀴 돌면 과거에 합격한다는 소문이 인근에 자자했었다 한다. 그러던 중, 한 선비가 한밤중에 99바퀴를 돌고난 뒤 현기증을 일으켜 계곡으로 떨어져 죽는 일이 발생한다. 그러자, 그 선비의 장모가 초간정사를 무너뜨리기 위해 도끼를 들고 와서 기둥을 찍었다고 한다. 지금도 낭떠러지 쪽의 모서리 기둥에는 도끼로 찍힌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는데, 그만큼 ‘학문의 요람’으로서의 초간정사의 위상은 각별했었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따라서, 울창한 소나무 숲과 풍광이 수려한 냇가에 자리 잡은 초간정사는 정자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살림집과 안마당, 사랑채의 역할을 하는 정자, 그리고 바깥의 사랑마당이 함께 어우러진 분명한 주거공간으로, 학문을 탐구하던 서재와 서당으로서의 역할을 더 강조했었던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초간정사 -4 ( 2006, 08.)
초간정사 -5 ( 2006, 08.)
초간정사 -6. 부속채 ( 2012.11.02.)
‘학문의 전당’, 초간정사에서 선생이 평생동안 심혈을 기울인 <대동운부군옥>은, 마침내 1589년(선조 22)에 20권 20책으로 탈고하여, 세 벌을 정서해 백승각에 보관하였다. 그 중 한 벌은 1591년 부제학 김성일 선생이 선조임금께 보인 후, 목판을 간행하려 하였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 잃어버렸고, 또 한 벌은 정구 선생이 빌려갔다가 화재로 소실하였다.
우여곡절을 겪은 후, 선생의 아들 권별 선생이 또 한 벌을 정서하여 정산서원에 영구히 보관하게 되었다. 그 후로도 세월이 한참 흘러 1812년(순조 12)에 후손들이 목판으로 간행을 시작하여, 1836년(헌종 2)에 완간을 보게 되었다. 그 뒤, 일제시절에는 일본 순사가 총칼로 위협하며 탈취해 가려 하였으나, 종가에서 죽음으로 항거하여 오늘날까지 지켜낼 수 있었던 소중한 유산이 <대동운부군옥>이다.
그런데 현재, <대동운부군옥>의 목판을 보관하고 있는 초간종택의 백승각百承閣이 원래는 초간정사 옆에 있었다고 한다.
병자호란으로 불탄 후에 복구한 초간정사 주위에는, 연못과 석조헌夕釣軒, 화수헌花樹軒, 그리고 백승각이 있었는데, 세월이 흘러 석조헌과 화수헌은 쇠락하여 사라지고 현판만 남았고, 백승각은 수 십 년 전에 초간종택 안으로 옮겨졌다 한다.
건물의 관리와 유물의 도난방지를 위한 고육책이었겠지만, 이제라도 고증을 통해서 원래의 제자리를 찾는 일이 역사적 순리일 것이며, 아울러 유물의 보전과 관리는 후손들 개인의 몫이 아니라, 국가의 책무라고 봄이 마땅할 것이다.
문화재는 문화와 풍속의 근거이며 민족의 지혜와 삶의 철학이 스며있는 상징이자 아이콘이다. 따라서 개인 집안의 재산이기 이전에, 국가의 역사이자 보물로 보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초간종택 한켠에 새로운 유물관이 신축되었으니, 이제 백승각의 '제자리 찾기'는 우리 세대에서는 불가능 한 일일 것으로 여겨진다.
역사의 복원이라는 의미외에, 새유물관의 입지여건면에서도 초간정사 권역이 훨씬 더 알맞고 바람직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몇 십 년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사려 깊지 못한 행정이, 역사를 바로 세울 기회를 또 놓쳐버렸다는 안타까움을, 초간정사 답사 내내 마음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초간정사 -7 ( 2012.11.02.)
초간 선생의 생애는 <대동운부군옥>의 편찬을 위한 일생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순수한 학자적 열정 하나로 우리 문화와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하여, 선생의 임종 2년 전에야 완성을 본 평생의 작업이었다. 26세에 작심하여 56세에야 끝을 낸, 실로 30년 동안의 지겹고도 긴 투쟁이었을 것이다.
중국을 향한 정신적 사대주의가 온 나라를 휩쓸고 있을 때, 홀로 거센 물결에 저항하며 투철한 자주의식,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우리의 것을 찾아내고 지켜서, 오늘날 우리 문화와 역사의 뿌리이자 지식의 보고인 <대동운부군옥>을 우리에게 남겼다.
백승각百承閣의 의미는 ‘백년을 이어간다’는 뜻으로 성리학의 창시자 주자朱子 선생의 서고 이름에서 따왔다 한다.
예나 지금이나 모두가 눈앞의 이익만을 쫒으며 당리당략과 사리사욕에만 관심을 가질 때, 자신의 모든 일생을 바쳐서 후학들에게 <대동운부군옥>을 선물한 초간 권문해 선생은, 국가의 천년대계를 위하여 초석을 놓은 실로 아름다운 선각자였다.
20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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