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 “명원(茗園)”을 거닐다.
장마가 오락가락하는 6월 마지막 주 토요일.
옅은 안개가 걸린 북한산 정릉계곡의 국민대학교 캠퍼스에
만학의 열기로 가득 찬 고등학교 동기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국민대에 재직 중인 팽 교수가 친구들을 명원으로 초대하여 오늘의 모임이 이루어 졌다.
국민대 후문에 있는 명원은 '서울 8대 한옥’에 속할 만큼 역사가 있는 건물로서 원래는 을지로입구 장교동에 있는 ’한규설 대감 가옥’이었는데 도심재개발로 헐릴 위기에 처하자 주인으로부터 기증을 받아 이곳으로 옮겨와서
지금은 다도 및 예절교육관으로 활용 되고 있다. 정릉에 자리를 잡으면서 본래 배치구조에서 일부 변형이 있었지만 서울에 몇 채 남아 있지 않는 정통한옥이다.
오늘의 호스트, 팽 교수의 안내로
‘명원’의 육중한 솟을대문을 밀고 선비의 세계로 들어섰다.
평일에는 사전예약하면 관람할 수 있지만 주말에는 개방하지 않는 곳이라
내부가 무척 궁금하였는데 팽 교수와 의논했더니 흔쾌히 친구들을 초대해 주었다.
사랑채, 안채, 행랑채, 사당채 등의 각자의 독립된 건물들이 모여서 만들어낸 ‘비움의 공간’, 마당을 거닐며
연결과 폐쇄, 소통과 단절의 유교적 공간구성의 의미도 생각해 보고, 이제는 역사유물관에만 남아있는 우리의 옛 모습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사랑채 앞 쪽 연못에 발을 드리운 운치 있는 정자에 앉아 상념에 잠겨있는데
애꿎은 매미소리만 정릉계곡을 휘감고 다닌다.
계자난간에 기대어 잠간이라도 졸고 일어나면, 일주일의 스트레스가 확 날아가고 신선이 부럽지 않을 것 같은데 벌써 점심시간이 많이 지났는지라
떨어지지 않는 몸을 일으켜 선비의 세계로 부터 현실세계로 돌아 나왔다.
점심식사 후 대학교 뒷산에 올라
싱그러운 풀냄새 머금은 바람과 이끼 낀 돌 사이로 시원스레 옥수가 흐르는 계곡을 산책하고 근처의 팽 교수 아파트로 향했다.
이 때 양평 별장의 수리 관계로 급한 전화를 받은 천 도사가 홀연히 바람처럼 사라졌다.
갈 테면 가라! 재미는 지금부터다!
북한산 자락의 품에 안겨
신혼 살림집처럼 잘 꾸며 놓은 팽 교수의 새 아파트에서
집에 놀러오는 친구들을 위해 장만했다는 안마기에 누워 피로도 풀고
진한 향기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 죽였다는 ‘벽라천’ 이라는 귀한 차도 맛보았다.
식사한지가 얼마 지나지도 않았지만, 팽 교수 모친께서 어릴 때 맛으로 차려 주신 국수도 두 그릇이나 더 먹었다.
우리는 보답으로 팽 선생의 집 이름(당호)을 지어서 선물하기로 약속하고
정릉계곡에 불이 하나 둘 켜질 무렵 일어섰다.
1997.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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