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은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정몽주(1337∼1392)는 공민왕 9년(1360)에 과거에 급제하여 지금의 국무총리격인 정승 자리에까지 오른 문신이다. 왜구 토벌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당시 긴장상태에 있던 명나라에 건너가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하기도 했다. 성리학에 뛰어나 동방이학의 시조로 불리며 시와 글, 그림에도 탁월했다. 특히 시조 단심가는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다는 그의 충절을 표현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유명하다. 기울어가는 국운을 걱정하며 고려를 끝까지 지키려 했지만 이방원(조선 태종)이 살해하였다.
임고서원은 조선 명종 8년(1553) 임고면 고천동 부래산에 세웠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선조 36년(1603)에 다시 지었으며, 이 때 임금으로부터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인조 21년(1643)에는 여헌 장현광을, 영조 3년(1727)에는 지봉 황보인을 추가로 모셨다.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철거되었으나 1965년에 정몽주의 위패만을 모시고 복원하였다.
(자료 : 문화재청)
임고서원(臨皐書院)은 고려말(高麗末)의 충신(忠臣)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先生)을 추모(追慕)하기 위하여 조선(朝鮮) 명종(明宗) 8년(1553) 부래산(浮來山)에 창건(創建)하였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소실(燒失)되어 선조(宣祖) 36년(1603)에 중건(重建), 사액(賜額)되었다. 인조(仁祖) 21년(1643)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先生)을 배향(配享)하고 영조(英祖) 3년(1727)에는 지봉(芝峰) 황보인(皇甫仁) 선생(先生)을 추향(追享)하였으나 고종(高宗) 5년(1868)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훼철되었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先生)은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 복위(復位) 6년(1337) 현 임고면(臨皐面) 우항동(愚巷洞)에서 일성군(日城君) 운관(云瓘)의 아들로 태어나 공민왕(恭愍王) 9년(1360) 문과(文科)에 장원(壯元), 예문검열(藝文檢閱) 등을 거쳐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전법(典法)·판도판서(版圖判書) 등을 역임하였고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왜구토벌(倭寇討伐)에 공(功)을 세웠으며 대명국교(對明國交)에도 큰 공을 세웠다. 지방관(地方官)의 비행(非行)을 근절(根絶)시키고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貧民)을 구제(救濟)하였으며 성리학(性理學)에 뛰어난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시조(始祖)로 추앙(推仰)되었고 시문(詩文),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고려삼은(高麗三隱)의 한 사람으로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국운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으나 공양왕(恭讓王) 4년(1392) 이방원(李芳遠)의 문객(門客)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선죽교(善竹橋)에서 피살되었다. 조선(朝鮮) 태종(太宗) 원년(1401)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다. (자료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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