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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건축 갤러리 ■/경 북

달성 낙빈서원 (2012. 05.)

 

 

 

❏소 재 지: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795

 

❏배향인물: 하위지(河緯地) 박팽년(朴彭年) 이 개(李 塏)

 

성삼문(成三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창건연도: 1679년(숙종 5)

 

❏사액연도: 1694년(숙종 20)

 

❏향 사 일: 불향(육신사에서 제향)

 

 

 

연 혁

 

 

하빈면 묘리 소재의 낙빈서원은 단종조의 사육신을 모시고 있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여 보위에 오르자 하위지(河緯地),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성삼문(成三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등 육신은 절개를 지켜 복귀 운동을 도모하던 중 김질의 고발로 사전에 발각되어 참형과 3족을 멸하는 가혹한 형벌로서 혈손마저 끊어지게 되었다.

 

이들 육신 중 박팽년의 혈손은 모계의 향리인 하빈에 세거하게 되었는데 그의 혈손인 박계창 때에 와서 사우를 세우고 박팽년을 향사하였다. 선조 때 계창(繼昌)이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대문 밖에서 사육신이 함께 오위(五位)를 베풀고는 함께 향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인근 성주의 한강 정구가 “오위를 사삿집에서 한꺼번에 향사하는 것은 제례에 맞지 않으니 마땅히 별묘를 세워 향사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그 후 1679년(숙종 5)에는 사당을 세워 봉사해 오다가 1691년(숙종 17)에는 강당과 함께 하빈사를 완공하였다. 1694년(숙종 20)에는 ‘낙빈’이라고 사액되었다.

 

1869년(고종 6)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가 1924년에 박씨문중에서 재건을 논의하여 1924년 현재의 위치에 건물을 세웠다. 그러나 원래의 위치와는 다르고 또 사당을 세우지 못하고 재실형식의 간단한 건물만 세웠다. 1998년 달성군에서 해체복원하였다. 낙빈서원의 사당은 1971년 육선생 추모사업추진위원회를 조직하고 국고보조 및 도지사, 군수의 지원으로 1982년 별도의 육신사를 만들어 사육신의 위패를 모셨다. 현재 낙빈서원에서는 향사를 드리지 않고 향사는 육신사에서 지낸다.

 

 

 

배향인물

 

 

1)하위지(河緯地, 1387~1456)

 

조선 전기의 문신. 단종을 위해 사절(死節)한 사육신 중 한 명이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천장(天章)·중장(仲章), 호는 단계(丹溪)·적촌(赤村). 선산 출신. 윤(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문하평리(門下評理) 지백(之伯)이고, 아버지는 군수 담(澹)이며, 어머니는 유면(兪勉)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남들이 얼굴을 모를 정도로 형 강지(綱地)와 함께 학문에 정진하였다.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집현전부수찬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자 세종이 약을 내려 고향에 가서 치료하게 하고, 또 경상감사에게도 그를 구료하도록 전지(傳旨)를 내렸다. 1444년 집현전부교리가 되어 ≪오례의주 五禮儀註≫의 상정(詳定)에 참여하였다.

 

1446년 동복현감으로 있던 형 강지가 무함을 당해 전라감옥에 갇혀 병이 깊자 관직을 사임하고 전라도로 내려가서 형을 간호하였다. 1448년 집현전교리로 복직된 뒤 이듬 해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고려사≫의 개찬에 참여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세종 때부터 왕을 보좌해 훌륭한 치적을 쌓은 관계로 장령에 임명되었다. 그는 품성이 강직해 대사간의 직분으로 권세에 굴하지 않고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한때, 대신들의 실정을 적극적으로 공격하다가 왕과 대신들로부터 반격을 받았으나 승지 정이한(鄭而漢)과 정창손(鄭昌孫) 등의 비호로 무사하기도 하였다.

 

문종이 승하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였다. 그 뒤 1453년(단종 1) 장령에서 집의로 승진하였다. 그 해 ≪역대병요 歷代兵要≫와 병서(兵書)의 편찬에 참여했던 집현전학사의 품계를 수양대군 (首陽大君)이 앞장서서 올리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서적의 편찬 사업은 집현전 본래의 업무이므로 품계를 올려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음을 들어 자신의 품계를 올리는 것에 반대하였다. 또한, 이 일을 수양대군이 나서서 처리하는 데 대해서도 반대하였다.

 

즉, 관직을 내리고 상을 주는 것은 국가의 공기(公器)이므로 경솔히 시행할 수가 없고, 그리고 종신(宗臣)의 신분으로 사은(私恩)을 베풀려는 수양대군의 처사는 매우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직책이 의리상 불가하다고 청해 집현전직제학에 전보되었다. 그러자 사직을 한 뒤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경상도 영산(靈山)의 온정(溫井)으로 내려갔다. 1454년 집현전부제학으로 복직되자 대궐 옆에 있는 불당(佛堂)이 왕실에 이롭지 못함을 들어 이를 훼철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해 ≪세종실록≫을 편찬하는 데 편수관으로 참여했고, 경연에서 시강관(侍講官)으로 왕에게 경사를 강론하였다. 이듬 해 집현전부제학에서 예조참의로 전임되었고,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죽이고 영의정이 되자 조복을 던져버리고 선산에 퇴거하였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올라 그를 간곡히 불러 예조참판에 승진되었으며, 곧 이어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을 겸하게 되었다. 세조의 즉위 후 그에게 교서를 내리는 등 잇단 부름을 받아 예조참판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본뜻은 진실로 단종을 위하는 일에 있었다. 세조의 녹(祿)을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세조가 즉위한 해부터의 봉록은 따로 한 방에 쌓아두고 먹지 않았다. 그리고 세조의 강권정치에 맞서다가 추국의 명을 받기도 하였다.

 

세조는 즉위 후 왕권강화책의 하나로 종전부터 시행하던 의정부 본래의 권한인 서사제(署事制)를 폐지시키고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시행해 의정부의 권한을 축소시켰다. 이러한 세조의 조처에 대해 고대 주나라 제도를 들어 의정부서사제의 부활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456년(세조 2) 사예(司藝) 김질(金礩)의 고변으로 단종복위운동이 탄로나 국문(鞫問)을 받게 되었다. 국문을 받으면서도 “이미 나에게 반역의 죄명을 씌웠으니 그 죄는 마땅히 주살(誅殺)하면 될 텐데, 다시 무엇을 묻겠단 말이오.”라며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그는 국문 과정에서 성삼문(成三問) 등이 당한 작형(灼刑 : 불에 달군 쇠로 죄인의 맨살을 지지는 형벌)은 당하지 않았으나, 사육신 등 여러 절신과 함께 거열형(車裂刑)을 당하였다. 그가 처형되자 선산에 있던 두 아들 호(琥)와 박(珀)도 연좌(連坐)되어 사형을 받았다.

 

아직 어린 나이인 작은아들 박도 죽음 앞에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금부도사에게 어머니와 결별하기를 청해 이를 허락하자 어머니에게 “죽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아버님이 이미 살해되셨으니 제가 홀로 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시집 갈 누이동생은 비록 천비(賤婢)가 되더라도 어머님은 부인의 의를 지켜 한 남편만을 섬겨야 될 줄로 압니다.”고 하직한 뒤 죽음을 받자 세상 사람들은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고 하면서 감탄하였다.

 

뒤에 남효온(南孝溫)은 ≪추강집 秋江集≫의 <육신전 六臣傳>에서 하위지의 인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그는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했으며, 말이 적어 하는 말은 버릴 것이 없었다. 그리고 공손하고 예절이 밝아 대궐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렸고, 비가 와서 길바닥에 비록 물이 고였더라도 그 질펀한 길을 피하기 위해 금지된 길로 다니지 않았다. 또한, 세종이 양성한 인재가 문종 때에 이르러 한창 성했는데, 그 당시의 인물을 논할 때는 그를 높여 우두머리로 삼게 된다.”고 평하였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묘는 선산부 서쪽 고방산(古方山)에 있다.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 영월의 창절사 (彰節祠), 선산의 월암서원(月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2)박팽년(朴彭年, 1417~1456)

 

조선 전기의 문신.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인수(仁叟), 호는 취금헌(醉琴軒). 회덕(懷德) 출신. 원상(元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안생(安生)이고, 아버지는 중림(仲林)이며, 어머니는 김익생(金益生)의 딸이다.

 

1432년(세종 14)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고, 1434년(세종 16) 알성 문과(謁聖文科)에 을과로 급제, 1438년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케 하던 휴가 제도)를 하였다. 1447년에 문과 중시에 을과로 다시 급제하였다.

 

1453년(단종 1) 우승지를 거쳐 이듬해 형조참판이 되었다. 그 뒤 1455년(세조 1)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다음 해에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다. 세종 때 신숙주(申叔舟)·최항(崔恒)·유성원(柳誠源)·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 등 당대의 유망한 젊은 학자들과 함께 집현전의 관원이 되었다. 이들은 모두 당대 이름높은 선비들이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그는 경술(經術)과 문장·필법이 뛰어나 집대성(集大成)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특히 필법에 뛰어나 위진 ‧ 남북조시대의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에 버금간다 하였다.

 

1455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울분을 참지 못해 경회루(慶會樓) 연못에 뛰어들어 자살하려 하였다. 그러나 성삼문(成三問)이 함께 후일을 도모하자고 만류해 단념했으며, 이 때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단종 복위 운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내직인 형조참판으로 다시 들어온 뒤 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兪應孚)·김질(金礩) 등과 함께 은밀히 단종 복위 운동을 추진하였다. 그 해 6월 1일에 세조가 상왕인 단종을 모시고 명나라 사신들을 위한 만찬회를 창덕궁(昌德宮)에서 열기로 하자 이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즉, 왕의 호위역인 운검(雲劍)으로 성승(成勝)·유응부·박쟁(朴崝)을 세워 일제히 세조와 추종자들을 처치하고 그 자리에서 단종을 복위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 날 아침에 세조는 연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갑자기 운검들의 시위를 폐지하였다. 이에 유응부 등은 거사를 그대로 밀고 나가자고 했으나, 대부분은 훗날을 기약하며 거사일을 미루자고 해 뒷날 관가(觀稼 : 곡식 씨를 뿌릴 때 왕이 친히 관람하면서 위로하는 권농 의식) 때로 다시 정하였다.

 

이렇게 되자 함께 모의한 김질이 세조에게 밀고해 성삼문 등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혹독한 국문을 받았다. 그는 이미 성삼문이 잡혀가 모의 사실이 드러났음을 알고 떳떳하게 시인하였다. 그러나 세조가 그의 재주를 사랑해 자신에게 귀부해 모의 사실을 숨기기만 하면 살려주겠다고 은밀히 유시하였다. 그런데도 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지라 웃음만 지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세조를 가리켜 나으리 라 하고 상감(上監 : 왕을 높여 부르는 말)이라 부르지 않았다. 세조가 노해 “그대가 나에게 이미 ‘신’이라고 칭했는데 지금 와서 비록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하자, 그는 “나는 상왕(上王 : 단종)의 신하이지 나으리의 신하는 아니므로 충청감사로 있을 때에 한번도 ‘신’자를 쓴 일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세조는 그가 충청감사 때 올린 장계를 실제로 살펴보고 과연 ‘신’자가 하나도 없자 더욱 노기를 띠어 심한 고문을 가하면서 함께 모의한 자들을 대라고 하였다. 그는 서슴없이 성삼문·하위지·유성원·이개·김문기(金文起)·성승·박쟁·유응부·권자신(權自愼)·송석동(宋石同)·윤영손(尹令孫)·이휘(李徽)와 자신의 아버지 중림이라 대답하였다.

 

그는 심한 고문으로 그 달 7일에 옥중에서 죽었으며, 다음 날에는 다른 모의자들도 능지처사(凌遲處死)당하였다. 그의 아버지도 능지처사되고, 동생 대년(大年)과 아들 헌(憲)·순(珣)·분(奮)이 모두 처형되어 삼대가 참화를 입었다. 이와 함께 그의 어머니·처·제수(弟嫂) 등도 대역부도(大逆不道 : 도에 어긋나는 큰 역적)의 가족이라 해 공신들의 노비로 끌려갔다.

 

단종 복위 운동이 있을 당시 나이가 어렸던 남효온(南孝溫)은 성장한 뒤에 이 사건의 많은 피화자 중 충절과 인품이 뛰어난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여섯 사람을 골라 행적을 소상히 적어 후세에 남겼다. 이것이 ≪추강집 秋江集≫의 사육신전(死六臣傳)이다.

 

그 뒤 사육신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꼽혀왔으며, 그들의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 줌)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해오다가 마침내 1691년(숙종 17) 이들의 관작이 회복되게 되었다.

 

그 뒤 1758년(영조 34) 다시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를 받아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1791년(정조 15) 단종에 대한 충신들의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에 올랐다. 그러나 삼대가 화를 입은 멸문(滅門 : 가문이 없어짐)이어서 그에 대한 자세한 행장이나 문집(文集) 등이 오늘날 전하지 않고 있다. 다만 ≪추강집≫의 사육신전이나 다른 글에 간헐적인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는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과 문종의 깊은 총애를 받았을 뿐 아니라, ‘집대성’이라는 칭호를 받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경국제세(經國濟世)의 명문(名文)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므로 문집이 전하지 않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단종이 왕위를 잃게 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대의를 위해 눈앞에 기약된 영화와 세조의 회유책을 감연히 거절하고 죽음과 멸문의 길을 서슴없이 걸어왔으니, 이와 같은 높은 절의는 오늘날까지 온 국민의 숭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묘는 서울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있다. 그의 묘에는 그저 박씨지묘(朴氏之墓)라는 글만 표석(表石)에 새겨져 있다. 그 이유에 대해 허적(許積)은 “성삼문 등 육신이 죽은 뒤에 한 의사(義士)가 그들의 시신을 거둬 이곳 강남(노량진) 기슭에 묻었으며, 무덤 앞에 돌을 세우되 감히 이름을 쓰지 못하고 그저 ‘아무개 성의 묘’라고만 새겨놓았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묘역은 1978년 사육신공원으로 단장되었으며, 장릉(莊陵)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다. 또한 영월 창절서원(彰節書院) 등 여러 곳에 제향되었다. 그의 절의를 기려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회덕박선생유허비 懷德朴先生遺墟碑>가 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3)이개(李塏, 1417~1456)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청보(淸甫)·백고(伯高), 호는 백옥헌(白玉軒). 제6대왕 단종을 위해 사절(死節)한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이다. 색(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중추원사 종선(種善)이고, 아버지는 계주(季疇)이며, 어머니는 진명례(陳明禮)의 딸이다.

 

태어나면서 글을 잘 지어 할아버지의 유풍(遺風)이 있었다. 1436년(세종 18) 친시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고, 1441년에 집현전저작랑으로서 당나라 명황(明皇)의 사적을 적은 ≪명황계감 明皇誡鑑≫의 편찬과 훈민정음의 제정에도 참여하였다.

 

1444년 집현전부수찬으로서 의사청(議事廳)에 나가 언문(諺文:國文)으로 ≪운회 韻會≫를 번역하는 일에 참여해 세종으로부터 후한 상을 받았다. 1447년 중시 문과에 을과 1등으로 급제하고, 이 해에 ≪동국정운≫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48년 지대구군사(知大丘郡事) 이보흠(李甫欽)이 조정에 사창(社倉)의 설치를 주장했을 때 백성들에게 부담을 준다는 점을 들어 반대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문종이 어린 왕세자를 위해 서연(書筵)을 열어 사(師)·빈(賓)의 상견례를 행할 때에 좌문학(左文學)의 직책으로서 ≪소학≫을 진강(進講)했는데, 문종으로부터 세자를 잘 지도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았다.

 

1453년(단종 1) 10월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을 보좌하던 대신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쥔 이른바 계유정난을 일으켜 이 거사에 참여한 공신을 책정할 때, 환관 엄자치(嚴自治)와 전균(田畇)이 공로가 있다는 이유로 공신에 기록하고 봉군(封君)까지 하려고 하였다.

 

집의로서 좌사간인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환관의 폐해가 망국패가에 이르게 한 옛날의 예를 들어서 이들에게는 재백(財帛)으로 상만 내리고 공신과 봉군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힘써 아뢰었다. 이 해 12월에는 글을 올려 근일에 시정(時政)의 몇 가지 일로써 여러 번 임금에게 아뢰었으나 한가지도 윤허를 받지 못하므로 사직하기를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456년(세조 2) 2월 집현전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이 해 6월에 성균관사예 김질(金礩)의 고변으로 성삼문 등 육신(六臣)이 주동이 된 상왕의 복위 계획이 발각되었는데, 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유응부(兪應孚)·유성원(柳誠源)과 함께 국문을 당하였다. 이 때 그는 작형(灼刑)을 당하면서도 태연했다고 한다.

 

성삼문 등과 함께 같은 날 거열형(車裂刑)을 당했는데,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갈 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우정(禹鼎 : 夏나라 우왕이 9주의 쇠를 거두어 9주를 상징해 만든 아홉 개의 솥)처럼 중하게 여길 때에는 사는 것도 또한 소중하지만·홍모(鴻毛 : 기러기의 털, 즉 아주 가벼운 물건의 비유)처럼 가벼이 여겨지는 곳에는 죽는 것도 오히려 영광이네·새벽녘까지 잠자지 못하다가 중문 밖을 나서니·현릉(顯陵 : 문종의 능)의 송백이 꿈속에 푸르고나!” 라고 했다.

 

사후에 남효온(南孝溫)이 당시 공론(公論)에 의거해 단종 복위 사건의 주도 인물인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6인을 선정, <육신전 六臣傳>을 지었다. 이 <육신전>이 세상에 공포된 뒤 육신의 절의를 국가에서도 공인, 1691년(숙종 17)에 사육신의 관작을 추복(追復)시켰다.

 

그의 작품으로는 몇 편의 시가 전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까마귀 눈비맞아 희난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라는 단가(短歌)가 있다.

 

1758년(영조 24)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의 노운서원(魯雲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4)성삼문(成三問, 1418~1456)

 

조선 전기의 문신.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근보(謹甫), 호는 매죽헌(梅竹軒). 충청남도 홍성(洪城) 출신. 개성유후(開城留后) 석용(石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달생(達生)이고, 아버지는 도총관(都摠管) 승(勝)이다. 어머니는 현감 박첨(朴塾)의 딸이다.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에는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했으며, 1447년에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다시 급제하였다. 집현전학사로 뽑혀 세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으면서 홍문관수찬(홍문관修撰)·직집현전(直集賢殿)으로 승진하였다.

 

1442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를 했고, 세종의 명에 따라 ≪예기대문언두 禮記大文諺讀≫를 펴냈다. 세종이 훈민정음 28자를 만들 때 정인지(鄭麟趾)·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이개(李塏) 등과 함께 이를 도왔다. 특히 신숙주와 같이 명나라 요동을 여러 번 왕래하면서, 그 곳에 유배 중인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만나 음운(音韻)을 질문하였다.

 

또한, 명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 제도를 연구해와 1446년 9월 29일 역사적인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1453년(단종 1) 좌사간으로 있을 때, 수양대군(首陽大君 : 뒤의 세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 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스스로 정권과 병권을 잡고는 그에게 정난공신(靖難功臣) 3등의 칭호를 내렸는데 이를 사양하는 소를 올렸다.

 

1454년에 집현전부제학이 되고, 예조참의를 거쳐, 1455년에 예방승지가 되었다. 그 해 세조가 어린 조카인 단종을 위협, 선위(禪位)를 강요할 때, 그가 국새(國璽)를 끌어안고 통곡을 하니 세조가 그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이후 아버지 승의 은밀한 지시에 따라, 박중림(朴仲林)·박팽년·유응부(兪應孚)· 권자신(權自愼)·이개·유성원(柳誠源) 등을 포섭, 단종 복위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던 중 1456년(세조 2) 6월 1일에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잔치를 열기로 하자, 그 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그는 거사일 전날에 집현전에서 비밀 회의를 열고 그의 아버지 승과 유응부·박쟁(朴崝) 등 무신들에게는 세조와 윤사로(尹師路)·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를, 병조정랑 윤영손(尹鈴孫)에게는 신숙주를 각각 제거하도록 분담시켰다.

 

그리고 나머지 중신들은 여러 무사들이 나누어 제거하기로 정하였다. 그리고 김질(金礩)에게는 그의 장인인 정창손(鄭昌孫)으로 하여금 상왕 복위를 주장하도록 설득하라 하였다. 그러나 당일 아침에 갑자기 연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별운검의 시립이 폐지되어 거사는 일단 중지되었다. 이에 거사는 세조가 친히 거둥하는 관가(觀稼 : 임금이 봄에 권농하기 위해 곡식의 씨를 뿌리는 것을 관람하던 행사) 때로 미루어졌다.

 

거사에 차질이 생기자 함께 모의했던 김질이 그의 장인 정창손과 함께 세조에게 밀고하여 모의자들이 모두 잡혀갔다. 그는 세조를 가리켜 ‘나으리’라 호칭하고 떳떳하게 모의 사실을 시인하면서 세조가 준 녹(祿)은 창고에 쌓아두었으니 모두 가져가라 하였다.

 

그는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으면서 세조의 불의를 나무라고 또한 신숙주에게는 세종과 문종의 당부를 배신한 불충을 크게 꾸짖었다. 격노한 세조가 무사를 시켜 불에 달군 쇠로 그의 다리를 태우고 팔을 잘라내게 했으나 그는 안색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 사건에 연루되어 문초를 받고 있던 강희안(姜希顔)을 변호해주어 죽음을 면하게 하였다.

 

그 달 8일 아버지 승과 이개·하위지(河緯地)·박중림·김문기(金文起)·유응부·박쟁 등과 함께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사(凌遲處死)를 당하였다. 그 때 동생 삼빙(三聘)·삼고(三顧)·삼성(三省)과 아들 맹첨(孟瞻)·맹년(孟年)·맹종(孟終) 및 갓난아이까지 모두 죽음을 당해 혈손이 끊겼다.

 

그가 형을 당한 뒤 그의 집을 살펴보니 세조가 준 녹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을 뿐 가재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방바닥에 거적자리만 깔려 있을 뿐이었다. 이처럼 그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절신(節臣 : 절개를 지킨 신하)으로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민들의 숭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육신의 한 사람일 뿐 아니라, 타고난 자질이 준수하고 문명이 높았으며, 조정의 경연(經筵)과 문한(文翰)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특히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공헌한 것은 그의 높은 절의에 뒤지지 않는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뒷날 남효온(南孝溫)은 ≪추강집 秋江集≫의 육신전에서 대의를 위해 흔연히 죽음의 길을 택한 그의 높은 절의를 기록, 후세에 전하였다.

 

1691년(숙종 17)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고,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791년(정조 15) 단종충신어정배식록(端宗忠臣御定配食錄)에 올랐다. 묘는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사육신 묘역에 있으나, 그의 일지(一肢)를 묻었다는 묘가 충청남도 은진에 있다.

 

장릉(莊陵 : 端宗의 능)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으며,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서울 노량진의 의절사(義節祠), 공주 동학사(東鶴寺)의 숙모전(肅慕殿)에 제향되었다. 송시열(宋時烈)이 쓴 <홍주성선생유허비 洪州成先生遺墟碑>와 <연산성선생유허비 連山成先生遺墟碑>가 있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저서로 ≪매죽헌집≫이 있다.

 

 

5)유성원(柳誠源, ?~1456)

 

조선 전기의 문신. 단종을 위해 사절(死節)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태초(太初), 호는 낭간(瑯玕). 수(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滸)이고, 아버지는 사인 사근(士根)이며, 어머니는 윤임(尹臨)의 딸이다.

 

1444년(세종 26)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집현전저작랑으로 당시의 의학 총서(醫學叢書)인 ≪의방유취≫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46년 박사로 승진했고, 1447년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했으며, 춘추관 사관(史官)의 자격으로 ≪고려사≫의 개찬(改撰)에 참여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문종이 어린 왕세자를 위해 서연(書筵)을 열어 사(師)·빈(賓)의 상견례를 행할 적에 좌사경(左司經)으로 선발되어, 세자를 잘 지도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았다.

 

1452년 김종서(金宗瑞)·정인지(鄭麟趾) 등에게 명해 ≪고려사≫를 개찬할 때 여러 사람이 과별로 분담해 찬술하자, 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열전을 담당하였다. 이 해 3월에는 춘추관 기주관으로서 ≪세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또, 1453년(단종 1) 지평(持平)이 되어, 수양대군이 명나라에 갔을 때 수종한 사람을 가자하고 세종 때 ≪역대병요 歷代兵要≫와 병서의 찬정(撰定)에 참여한 사람의 가자를 계청(啓請)한 것은, 조신이 종친에게 아부하고 종친이 사은(私恩)을 파는 일이므로 명령을 모두 회수하기를 청해 관철시켰다.

 

이 해 10월 수양대군이 단종을 보좌하는 영의정 황보 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 등 대신을 살해하고 스스로 영의정부사·이조판서·내외병마도통사를 겸해 정권을 잡은 뒤 백관들을 시켜 자기의 공을 옛날 주나라 주공(周公)에 비견해 임금에게 포상하기를 청하였다.

 

그리고 집현전에 명해 정난녹훈(靖難錄勳)의 교서(敎書)를 기초(起草)하도록 하자 집현전의 학사들이 모두 도망하였다.

 

그러나 집현전교리였던 유성원만이 혼자 남아 있다가 협박을 당해 기초를 하고는 집에 돌아와서 통곡했다고 한다. 11월 장령이 되어 정난공신(靖難功臣)의 책정이 공정하지 못함을 들어 개정을 청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1454년 경복궁 안의 불당을 없앨 것을 소를 올려 주장했으며, 이 해 4월 춘추관기주관에 임명되었고 ≪문종실록≫의 찬술에 참여하였다.

 

이 해 2월 사헌부에서 자기들의 건의가 시행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장령을 사임하자 직집현전(直集賢殿)에 임명되었다.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의 선위(禪位)를 받아 왕위에 올랐는데, 이 해 집의도 겸하게 되었다.

 

1456년(세조 2) 성균관사예 김질(金礩)의 고변으로 성삼문(成三問)·박팽년 등 사육신이 주동이 된 단종 복위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었는데, 그도 이 모의에 참여하였다.

 

일이 발각되어 성삼문·박팽년 등이 차례로 잡혀와서 모진 고문을 당할 때, 그는 성균관에 있다가 여러 유생들에게서 이 일의 내용을 듣고 관대도 벗지 않고서 패도(佩刀)를 뽑아 자기의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뒤에 남효온(南孝溫)이 당시 공론(公論)에 의거해 단종복위사건의 주동 인물인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6인을 선정, <육신전 六臣傳>을 지었다. <육신전>이 세상에 공포된 뒤 국가에서 육신의 절의를 공인, 1691년(숙종 17)에 사육신의 관작을 추복시켰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의 노운서원(魯雲書院),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6)유응부(兪應孚, ?~1456)

 

단종을 위해 사절(死節)한 사육신의 한 사람. 본관은 기계(杞溪, 혹은 川寧). 자는 신지(信之), 호는 벽량(碧梁). 포천 출신. 키가 남보다 크고 얼굴 모양은 엄숙했으며, 씩씩하고 용감해 활을 잘 쏘아 세종과 문종이 모두 사랑하고 소중히 여겼다.

 

일찍이 무과에 올라 1448년(세종 30)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1449년 경원도호부사·경원절제사, 1452년(단종 즉위년) 의주목사를 거쳐 1453년 평안좌도도절제사에 임명되었다. 1455년 4월에 판강계도호부사를 거쳐, 이 해 윤6월에 세조가 즉위한 뒤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임명되었다.

 

1456년(세조 2)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초청 연회하는 날에 유응부와 성승(成勝 : 성삼문의 아버지) 등을 별운검(別雲劒 : 2품 이상의 武官이 칼을 차고서 임금 옆에서 호위하던 임시 벼슬)으로 선정해 그 자리에서 세조를 살해하고 단종을 다시 세우기로 계획을 세웠다.

 

때마침 왕이 운검(雲劒)을 세우지 말도록 명령했고, 세자도 질병 때문에 왕을 따라 연회장에 나오지 아니하였다. 유응부는 그래도 거사하려고 했으나 성삼문과 박팽년이 굳이 말리기를 “지금 세자가 경복궁에 있고, 공(公)의 운검을 쓰지 못하게 한 것은 하늘의 뜻입니다. 만약 이곳 창덕궁에서 거사하더라도, 혹시 세자가 변고를 듣고서 경복궁에서 군사를 동원해 온다면 일의 성패를 알 수가 없으니 뒷날을 기다리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는 “이런 일은 빨리 할수록 좋은데 만약 늦춘다면 누설될까 염려가 되오. 지금 세자가 비록 이곳에 오지 않았지만, 왕의 우익(羽翼 : 보좌하는 신하)이 모두 이곳에 있으니 오늘 이들을 모두 죽이고 단종을 호위하고서 호령한다면 천재일시(千載一時)의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니 이런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오.” 했으나, 성삼문과 박팽년은 만전의 계책이 아니라고 하면서 굳이 말려서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이 때 동모자(同謀者)의 한 사람인 김질(金礩)이 일이 성공되지 못함을 알고서 급히 달려가 장인인 정창손(鄭昌孫)에게 알리고 함께 반역을 고발해 성삼문 이하 주모자 6인이 모두 죄인으로 끌려와서 국문을 받았다.

 

“너는 무슨 일을 하려고 하였느냐?”는 세조의 국문에 그는 “명나라 사신을 초청 연회하는 날에 내가 한 자루 칼로써 족하(足下 : 대등한 사람에 대한 경칭으로 세조를 가리켜 부른 말)를 죽여 폐위시키고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고 했으나, 불행히 간사한 놈(김질을 가리킴)에게 고발당했으니 응부는 다시 무슨 일을 하겠소. 족하는 빨리 나를 죽여주오.” 하니 세조가 노해 꾸짖었다.

 

“너는 상왕(단종)을 복위시킨다는 명분을 핑계하고서 사직(社稷)을 도모하려고 한 짓이지.” 하고 즉시 무사를 시켜 살가죽을 벗기게 하고서 정상(情狀)을 신문했으나 자복(自服)하지 않았으며, 성삼문 등을 돌아보면서 “사람들이 서생과는 함께 일을 모의할 수 없다고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지난번 사신을 초청 연회하던 날 내가 칼을 사용하려고 했는데, 그대들이 굳이 말리면서 ‘만전의 계책이 아니오’ 하더니, 오늘의 화를 초래하고야 말았구나. 그대들처럼 꾀와 수단이 없으면 무엇에 쓰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다시 세조에게 “만약 이 사실 밖의 일을 묻고자 한다면 저 쓸모없는 선비에게 물어보라” 하고는 입을 닫고 대답하지 않았다. 세조는 더욱 성이 나서 달군 쇠를 가져와서 배 밑을 지지게 하니 기름과 불이 함께 이글이글 타올랐으나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천천히 달군 쇠가 식기를 기다려 그 쇠를 집어 땅에 던지면서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 하고는 끝내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효성이 지극해 집이 가난했으나 어머니를 봉양하는 준비는 부족함이 없었다. 사생활은 지극히 청렴해 벼슬이 재상급(宰相級)의 2품 관직에 있으면서도 거적자리로 방문을 가리웠고 고기 반찬 없는 밥을 먹었다.

 

또 때로는 양식이 떨어지기도 하니 처자가 이를 원망했는데, 그가 죽던 날 그 아내가 울면서 길가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살아서도 남에게 의지함이 없었는데 죽을 때는 큰 화를 입었구나.”고 하였다.

 

남효온(南孝溫)이 ≪추강집≫의 <육신전 六臣傳>을 지으면서 단종복위의 거사 주모역은 성삼문·박팽년이고, 행동책은 유응부로서, 이 세 사람이 한 일을 삼주역(三主役)으로 부각시켰다.

 

사육신이라는 명칭은 남효온의 <육신전>이 세상에 공포된 뒤 그대로 확정되어, 1691년(숙종 17)에 사육신의 절의를 국가에서 공인해 성삼문·박팽년·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 등 6인의 관작을 추복(追復)시켰다. 그 뒤 1791년(정조 15)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여러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정(編定)할 적에도 사육신으로 재차 확정되었다.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의 노운서원(魯雲書院), 연산의 충곡서원(忠谷書院),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대구의 낙빈서원(洛濱書院), 의성의 충렬사(忠烈祠), 강령의 충렬사 등에 제향되었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건축물

 

산비탈 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외문을 들어서면 강당만 남아있으며, 비석 1기가 있다. 이 강당 건물은 ‘낙빈서원’의 현판이 걸려있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토기와집이고 중앙의 2칸 마루와 양쪽협실로 되어 있다.

 

(자료출처 : 카페 '한국서원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