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쇄원(瀟灑園)은 양산보(梁山甫)(1503∼1557)가 은둔생활을 하던 조선시대 선비의 별서원(別墅園)이다. 양산보(梁山甫)의 호가 소쇄옹(瀟灑翁)이었기에 원(園)의 이름을 소쇄원이라 한 것이다. 소쇄원의 조성연대는 1520년부터 1557년까지 양산보(梁山甫)의 은둔생활(隱遁生活) 기간 중에 조성된 것이다.
이 원(園)의 조성사상을 보면 주자(朱子)가 중국(中國) 숭안현(崇安縣) 무이산(武夷山)계곡의 경승지인 무이구곡(武夷九曲)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현실(現實)을 도피하여 은둔하는 행동양식이 깔려있다.
원(園)의 구성을 보면 흘러내리는 계류가 암반을 타고 오곡(五曲)으로 흐르다가 폭포로 떨어져 작은 조담(槽潭)을 이루는 3천여평의 공간에 조성되어 있다. 계류를 중심(中心)으로 양쪽 언덕 임간(林澗)에 터를 잡아 광풍각(光風閣), 제월당(齊月堂), 초정(草亭), 화계(花階), 연지(蓮池), 석천(石泉) 등이 배치되고 물레방아와 석가산도 있었다. 그리고 계류 위에는 외나무다리와 죽교(竹橋)가 설치되고 원(園)의 구역은 아름다운토석담으로 구획 지워져 있다.
담벽에는 「애양단(愛陽壇)」, 「오곡문(五曲門)」「소쇄처사양공지허(瀟灑處士梁公之虛)」의 글씨가 석판(石板)과 목판(木板)에 새겨져 박혀 있어 운치를 더한다. 원의 입구는 울창한 죽림(竹林)으로 외부(外部)와 막혀 있으며 원내(園內)의 식생(植生)은 죽(竹) 매(梅) 송(松) 행(杏) 괴(槐) 도(桃) 벽오동 유(柳) 자미(紫薇) 단풍(丹楓) 사계화(四季花) 치자(梔子) 국(菊) 부용(芙蓉) 순채 파초(芭蕉)를 심었던 것이다. 이러한 식생이 조선선비들이 좋아하였던 화목(花木)들이다. 지금도 넓은 소나무와 느티나무 목백일홍(자미(紫薇))의 원림(園林)이 계류와 정자들과 어울려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연지(蓮池)는 방형(方形)들인데 하나는 2.5m의 정방형이며 하나는 세로 5.5m, 가로 4m의 장방형이다. 이들 연못에는 계류의 물을 나무 홈대로 연결하여 넣었던 것이다.
이 소쇄원에는 김인후(金麟厚)가 1548년(명종(明宗) 3)에 지은 오언절구(五言絶句)의 48영(詠) 시(詩)가 남아 있다. 그리고 고경명(高敬命) 이 1574년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광주목사(光州牧使) 임훈(林薰)과 함께 광주 무등산(無等山)을 유락(遊樂)하면서 4월 23일 소쇄원에 들려서 보았던 계원(溪園)의 사실적 묘사가 「유서석록(遊瑞石錄)」에 남아있다.
또 소쇄원의 배치를 목판(木板)으로 새긴 「소쇄원도(瀟灑園圖)」가 남아있다. 이 목판은 가로가 35cm, 세로가 25cm로 양각으로 판각되었는데 1775년 4월 하순(숭정기원후 삼을해년청화 하완간(崇禎紀元後 三乙亥年淸和 下浣刊)에 제작했다는 판각기가 새겨있어 소쇄원의 원형(原形)을 상고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목판에는 위쪽에 김인후의 소쇄원 48제영(瀟灑園 48題詠)이 새겨있고 오른쪽 외곽에는 「창암촌 고암동 소쇄원 제월당 광풍각 오곡문 애양단 대봉대 옹정봉 황금정 유 우암선생필(창蒼巖村 鼓巖洞 瀟灑園 齊月堂 光風閣 五曲門 愛陽壇 待鳳臺 瓮井峰 黃金亭 有 尤菴先生筆)이라 새겨있다. 우암(尤菴)은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호이다. 이 소쇄원도(瀟灑園圖)에는 건물의 명칭 식물의 명칭 지당(池塘) 계류의 조담(槽潭)이나 바위 다리 물레방아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입구 담벽에는 원래 김인후의 소쇄원 48영(詠) 수제(手題)가 편액으로 걸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소쇄원은 우리나라 선비의 고고한 품성과 절의가 엿보이는 문아한 아름다움이 풍기는 조원이다.
(자료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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