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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건축 갤러리 ■/전 남

담양 환벽당과 취가정 ( 2012. 04.)

 

     환벽당

 

광주호 상류 창계천의 충효동 언덕 위에 높다랗게 자리잡은 정자로, 조선시대 때 나주목사 김윤제가 고향으로 돌아와 건물을 세우고, 교육에 힘쓰던 곳이다. 전에는 ‘벽간당’이라고도 불렀다. 송강 정철이 과거에 급제하기 전까지 머물면서 공부했다고 한다.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원래는 전통적 누정 형식이었으나, 다시 세우면서 가운데 2칸은 방으로 하고 앞쪽과 오른쪽을 마루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우암 송시열이 쓴 글씨가 걸려 있으며, 임억령과 조자이의 시가 현판으로 걸려있다.

 

 환벽당 아래로는 조대(釣臺)와 용소(龍沼)가 있는데, 여기에는 김윤제와 정철에 얽힌 일화가 전한다. 어느날 김윤제가 환벽당에서 낮잠을 자다 조대 앞에서 한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난 김윤제가 이상히 여겨 급히 그곳에 내려가보니 용소에서 한 소년이 목욕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 소년의 비범한 용모에 매혹되어 데려다가 제자로 삼고 외손녀와 결혼시켰는데, 그가 훗날 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정철이었다고 한다. (자료 : 문화재청)

 

 

 

 

 

 

 

 

 

 

 

 

 

 

 

 

 

 

 

 

 

 

 

 

 

 

 

 

 

 

 

 

 

 

 

 

 

 

 

 

 

 

 

 

 

 

 

 

 

 

 

 

 

 

 

 

 

 

 

 

 

 

 

     취가정

 

충장공 김덕령(金德齡)이 출생한 곳으로서 환벽당 남쪽 언덕 위에 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의 혼을 위로하고 그의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1890년(고종 27년) 후손 김만식(金晩植) 등이 세웠다. 6·25전쟁으로 불탄 것을 1955년 재건하였다.

 

 주변 정자들 가운데 가장 늦게, 얕으막한 산 위에 누대처럼 지었는데, 대부분의 정자들이 강변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과 달리 넓게 펼쳐진 논과 밭들을 향하여 세웠다. 정자 앞에 서 있는 소나무는 정자의 운치를 한결 더해준다.

 

 정자의 이름은 정철의 제자였던 석주 권필(權糧:1569∼1612)의 꿈에서 비롯하였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김덕령이 꿈에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고 한 맺힌 노래 《취시가(醉時歌)》를 부르자, 권필이 이에 화답하는 시를 지어 원혼을 달랬다고 한다. (자료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