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건축이야기 ■/현대건축 이야기

건축기행- 02 경남 문화예술회관 - 김중업

 

 

 진주는 우리나라 도시 중 가장 아름다운 '강의 도시'다.

'남가람(남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숨막히도록 인상적인 풍광이다.

이름도 진기한 '뒤벼리'절벽을 돌아들어 굽이굽이 남가람을 따라 도시로 들어가면

'새벼리'절벽이 다가서고 진주성의 성벽과 절벽이 강을따라 펼쳐진다.

짙푸른 남가람과 푸르른 진주성 녹음위로 촉석루가 사뿐이 내려앉아 있는 듯 싶다.

누가 설계했는지도 잘 모른다는 진주교와 천수교의 아치 다리는

우연히 그렇게 아름다워졌을까?

 

 

    가장 아름다운 강의 도시, 진주

 

 우리 옛 도시는 산(山)에 기대고 강(江)을 끼지만 천(川)을 도시에 품었다.

물이 풍부한 반면 강의 범람을 걱정하기 떄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강에 바짝 붙은 옛도시는 희귀하다.

도시가 확장되면서 현대 도시는 강을 가슴에 품게된다.

남가람은 진주의 가슴을 두번 휘젓는다.

 

 강변 북측 진주성 안에 있는 국립진주박물관과 강변 남측 경남문화예술회관은

현대건축의 두 거목인 고 김수근, 김중업의 작품이다.

진주 한 문화인의 소갯말이 인상적이다.

"진주에는 김수근과 김중업이 있습니다."

진주박물관이 이 지역 특산 석재를 소재로 하여 땅속으로 파고드는

'고분'같은 형태가 인상적이라면,

경남예술회관은 마치 '전통 매듭'같은 장식적 기둥의 날아오를 듯한

형태가 인상적이다. 하나가 산 속으로 들어가는 형국이라면,

다른 하나는 강에 사뿐히 발을 담그고 있는 형국이다.

 

진주성 내의 촉석루, 북장대, 서장대 등의 아름다운 고건축물보다

낮게 임하려던 박물관 설계,

남가람에 발을 담그며 진주성을 올려보고 싶어한 문화회관 설계

(이 건물 옥상의 야회공연장에서 멀리 진주성을 바라보면 정말 아름답다. 특히 석양 무렵에)는

진주를 빛내주려는 설계였다.

  북측 진주성에서 남측의 죽림과 예술문화회관을 바라보는 경관과,

남측에서 북측 진주성의 기암절벽과 촉석루와 의암을 바라보는 절경.

그 어느 쪽이 더 아름답다고 하기 어려운, 강을 통해 하나되는 진주다.

진주교에는 논개가 끼었다는 쌍금가락지가 아치 상부에 끼워져 있다.

논개는 이윽고 웃으리라.

 

 

   김수근과 김중업

 

 '건축가'로서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고(故) 김수근(1931-1986)과 김중업(1922-1988).

그런데 진주 박물관이나 홍보물에서조차 건축가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속상한 일이다.

생전에 신문 지상을 통해 '전통 논쟁'을 벌일 정도로 치열한 고민을 했던 두 건축가는

그런 열정을 진주의 두 기념비적 건축설계에 바쳤다.

 

 김수근의 <공간사옥>과 김중업의 <프랑스 대사관>은

현대 건축물 중 가장 한국적인 아이콘으로 뽑힌다.

김수근이 '한국 특유의 공간 조영'에 천착했다면,

김중업은 '한국 특유의 형태 조영'에 천착해서 나온 작품이다.

김수근의 <진주박물관> 설계 역시 '공간 조영'의 맥을 따르고 있고,

김중업의 <경남예술회관>은 '형태 조영'의 맥을 따르고 있다.

 이 두 대가의 작품을 가진 것은 진주의 역사적 자산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시민들에게도 회자될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우리도 문화사회라 할 만하지 않을까?

(글출처 : 김진애의 우리도시예찬)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

 

                                                                                  위키백과

 

 

경상남도 문화예술회관(慶尙南道文化藝術會館, Culture & Arts Center of Gyeongsangnam-do)은 경상남도 진주시 강남로 215(칠암동)에 위치한 도립 종합 공연장이다. 1984년에 착공해 1988829일에 개관했으며, 한때 일선학원(2000~2002)과 진주문화예술재단(2003~2006)의 민간수탁 공연장으로 운영되기도 했다. 2007년부터는 다시 경상남도청 직영의 도립 공연장으로 환원되었다.

 

시설 내용

 

대공연장

1564석의 좌석을 갖춘 공연장으로, 오케스트라 피트와 회전무대, 승강무대, 영사막 등을 갖추고 있어 콘서트와 오페라, 발레, 뮤지컬, 영화 상영 등의 다목적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옥상공연장 (놀이마당)

540석의 계단식 좌석을 갖춘 원형 야외 공간으로, 우천시나 동절기를 제외한 기간 동안 특별 야외 공연이 개최되고 있다.

 

전시실

전시 전용 공간으로, 경상남도 지역 작가들의 회화와 사진, 서예, 조각품, 공예품 등의 전시회가 주로 열린다.

회의실

대회의실 1, 소회의실 2로 구성되어 있는 공간으로, 도내 각 기관들의 회의가 열리고 있다.

 

그 외 시설

로비에 이용객들을 위한 휴게 시설이 갖추어져 있으며, 공연자들을 위한 연습실과 분장실 등이 마련되어 있다.

 

 

 

 

 

 

 

 

 

 

 

 

 

 

 

 

 

 

 

 

 

 

 

 

 

 

 

 

건축가 김중업

 

김중업(金重業)은 평안남도 평양시 진향리에서 출생했고, ()는 여천(如泉)이다. 1941년 일본 요코하마 관립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한 후 1949년부터 6·25 전후까지 서울대학교를 비롯 한양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강의를 했고, 1952년에는 세계적 건축가인 프랑스의 Le Corbusier 건축연구소에서 36개월 동안 건축 및 도시계획에 관해 실무적 수업을 했다. 그후 귀국해 1956년 김중업(金重業)건축연구소를 개소하면서 우리나라에 독창적인 많은 건축설계 작품을 남겼고, 건축설계 활동을 하는 동안에도 프랑스 Montpellier 국립건축대학(1973), 미국 Rhode Island 예술대학(1975), Havard 대학(1978) 등에서 강의를 맡기도 했다.

 

그는 평양고보에 다니던 시절부터 러시아 문학에 심취해 시인이 되고자 했으나 부친의 기대는 이와는 달랐고, 화가가 되라는 권유도 받았으나 결국 그의 재능을 알아본 미술교사의 권유에 따라 미술과 가장 가까운 분야인 건축을 전공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시에 대한 애착은 많은 시인, 문인들과 어울리게 했고 그의 건축에도 시적인 취향이 반영되었다.

그가 일본으로 건너가 관립고등공업학교에 다닌 것은 열 일곱살 때였다. 학교를 졸업하면서 건축가로서의 생활이 열려 마쯔다 헤이다(松田平田) 건축사무소에 근무했는데 청년시절부터 일에 열중하는 노력과 재능으로 인정받았다. 해방 후, 그는 부평 미군기지창에서 설계업무를 맡기도 했는데, 그당시 거리에서 우연히 서울공대 김동일 학장을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스물다섯 살의 나이로 전임강사가 되었고 다음해 1948년 조교수로 승진했다.

 

19527월엔 그의 첫 해외 나들이가 있었다. 유네스코 주최 세계예술가회의에 대표로 참가한 것이었는데 그 일이 그의 운명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아방가르드적이고 가장 혁신적인 건축가여서 그가 좋아했던 르 꼬르뷔지에가 의장단의 한 사람으로 와 있었던 것이다.

그는 르 꼬르뷔지에에게 말을 걸어 자기소개를 했다. 꼬르뷔지에는 얼떨결에 얼굴이 동그랗고 정열적인 한국 건축가에게 자신의 사무실로 와보라고 했다. 별뜻없이 한 말이었는데, 김중업은 그 후 파리로 가서 꼬르뷔지에의 제자가 되었고 만 삼년반 동안 함께 일했다.

그 시기는 그가 장차 세계의 건축가로 발돋움할 만큼 자신감을 다진 귀중한 시기였다. 꼬르뷔지에를 찾아 무작정 파리로 간 그는 한 달 뒤부터 월급을 받으며 일하게 됐다. 작은 돈이나마 월급을 받은 것은 사무소에선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르 꼬르뷔지에 사무실엔 월급제도가 없었던 것이다. 꼬르뷔지에가 그의 사정을 알고 호의를 베푼 것이지만 그로서는 스승에게 인정받은 셈이었다.

그는 거기서도 일에 몰두해 다른 사람이 가버린 뒤에도 새벽 세 시까지 공부했다. 그는 열쇠를 인계받기 위해 그 작은 월급을 창고지기에게도 떼주었다고 한다. 창고에 쌓인 옛날 건축도면들을 열쇠만 있으면 꺼내볼 수 있었고 그는 샅샅이 파고 들었다. 하루빨리 스승을 해득해서 졸업하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설계를 한 사람들은 사인을 해서 도면을 남겨두었는데, 뒷날 뮤슈 김의 사인이 제일 많다고 전해졌다. 현대건축의 거장인 꼬르뷔지에가 죽었을 때 미국 건축지에 수제자 다섯 명이 실렸는데 김중업도 그 중에 꼽혔다. 많은 제자들이 있는 데서 꼬르뷔지에는 너는 전생부터 건축가다. 천재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뒷날 주한 프랑스 대사관 설계에 그가 응모하도록 추천해준 것도 르 꼬르뷔지에였다.

 

1956년 그는 꼬르뷔지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국에 돌아왔다. 1956년 귀국해 홍익대 건축미술과 교수가 되었으며 설계실을 내고 건축활동을 병행하며 자기 모색을 시작했다. 부산대학 본관, 건국대학 도서관, 명보극장 등을 설계했다. 그후 서강대학 본관(1958), 드라마센터, 원자력 연구소 등을 이어 내놓는다. 그의 초기 작품에선 꼬르뷔지에의 체취가 풍긴다는 평을 듣기도 했는데, 1961년에 제작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주한 프랑스 대사관은 그의 작품 세계의 길잡이가 되었다. 이 건물 석탑지붕의 옥개석(屋蓋石) 같은 아름다운 곡선은 한국의 전통미가 프랑스적인 우아함과 정교하게 조화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이 작품으로 1962년도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고, 1965년에는 드골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프랑스 국가 공로훈장과 슈발리에(騎士) 칭호를 얻었다.

1964년에 세워진 제주대학 본관도 그가 많은 애착을 느끼는 작품이었다. 이 건물은 비행기 같기도 하고 순결한 배 같기도 한 외관이 환상적이면서 유희정신이 깃든 초현대적 작품이다.

필생의 역작이라는 하늘교회는 미국의 소리를 방송하는 황재경 목사의 의뢰로 설계된 것으로, 예수가 재림한다면 머물고 싶은 장소가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눈과 눈동자에서 착안해 설계했는데, 인체에서 제일 반짝이는 곳이 눈이라는 발상에서였다.

 

1960년도 후반 그는 경주박물관 설계를 맡아 완성했다. 그러나 그것은 제작 도중 폐기 되었는데, 기와지붕을 올리지 않았다는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나중에 평가가 내려지겠지만 그 작품은 박물관다운 동양적 건축이었다고 한다.

그는 또한 건축계의 야당으로 알려져 있었다. 비판을 서슴지 않고 앞장 서서 했기 때문이었다. 그로서는 발전을 위해 비판했고 모두가 후세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비판했다. 그러나 결국 1971년도에 나라를 떠나게 되는데 성남시 사람들의 생업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발언 때문이었다. 그는 프랑스에 간 지 삼개월 후부터 1974년까지 패스포드가 연장되지 않아서 무국적자로 생활해야했다. 그후 7년의 공백을 안고 돌아온 그는 1981년도에만 네 개의 지명현상에 응모했는데 그 중 진주문화회관 설계만이 당선되었다.

1971년에 프랑스의 장 뤼크 고다르 감독이 30분짜리 기록영화 <김중업>을 만들었는데, 이렇게 세계적인 건축가가 된 것도 그의 열정의 소산이었다. 1981년부터 새로운 도약을 기대하며 육사박물관(1981) 등을 설계하며 구성적이면서도 회화적인 건축세계를 펼쳤다. 그는 1988511일 사망했는데 다음해 11월 제3회 동경 크리에이션대상 해외상 부문에서 건축가 김수근과 함께 당선되었다.

 

 

 

 

 

 

 

 

 

 

 

 

 

 

 

 

 

 

 

 

 

 

 

 

 

 

 

 

 

 

 

 

 

 

 

 

 

 

 

 

 

 

 

 

 

 

 

 

 

 

 

 

 

 

 

 

 

 

 

 

 

 

 

주요 작품

 

필그림 홀, 건국대 도서관/1956,

명보극장/1956,

부산대 본관, 자집/1958,

서강대 본관/1959,

주한 프랑스대사관/1960,

청평 설씨산장/1962,

제주대 본관/1964,

서산부인과 의원/1965,

유엔묘지 정문/1966,

한국미술관(주한이태리 대사관), 한남동 정씨댁/1967,

진해공군공관, 한남동 이씨댁, 갱생보호회관/1968,

삼일로 빌딩/1969,

도쿄호텔/1971,

성공회 회관/1974,

서교동 흥씨댁/1975,

한국교육개발원 신관, 한남동 이씨댁. 태양의 집/1979,

방배동 민씨댁/1980. 육군사관학교 박물관/1981,

부산시 충혼탑, 사직동 박씨댁/1983,

성북동 이씨댁/1984,

박시우 치과의원 (욱일빌딩)/1985,

군산여성회관, 군산시민회관/1987,

국제보험(), 평화의 문(올림픽 상징조형물), 경남문화회관, 광주문화방송국, 중소기업은행 본점(선경빌딩)/1988,

군인아파트, 드라마센터, 홍익대 인문관/대학원, 국제방송센터 (I.B.C)/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