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 감포 해국길
감포항 골목 속으로, 4구간의 시작
경주의 동해안 마을 감포에는 '감포 깍지길'이라는 이름의 도보 여행 코스가 있다. 감포항을 중심으로 해안과 마을 등을 잇는 이 길 가운데, 4구간에 해당하는 '해국길'은 옛 골목의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길이다. 화려한 관광지와는 거리가 멀지만, 오히려 그 점이 해국길을 특별하게 만든다. 거대한 건축물이나 인공적인 포토존이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마을의 골목 자체가 여행의 무대가 되는 것이다.
해국길의 출발점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골목은 감포항 앞에 자리한 감포공설시장 건너편에서 시작하며, 벽에는 조그만 간판이 달려 있어 주변 상인에게 물어보면 쉽게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주차는 감포공설시장 주차장이나 감포읍 행정복지센터 주차장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어, 차량으로 방문하기에도 큰 부담이 없다.
좁은 골목, 그리고 보랏빛 해국의 흔적
해국길이라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길의 가장 큰 매력은 골목 곳곳의 벽면을 장식한 해국 벽화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보랏빛 해국 꽃 벽화가 그려져 있어, 아기자기한 감성 사진을 찍기에 최적의 장소로 꼽힌다. 가을철 해안가에 자생하는 들국화의 일종인 해국이 모티프가 된 만큼, 골목을 걷는 동안 곳곳에서 보랏빛과 푸른빛이 어우러진 그림을 만나게 된다.
길의 규모는 거대하지 않다. 전체 길이는 600m 정도로 길지 않지만, 이름처럼 벽마다 그려진 해국을 보며 걷는 재미가 쏠쏠하며, 천천히 걸어도 30분이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 다만 그 짧은 거리 안에 감포의 시간이 켭켭이 쌓여 있다. 골목의 폭은 매우 좁아서,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너비에 불과하며, 몸을 옆으로 돌려야 통과할 수 있는 구간도 적지 않다. 낮은 슬레이트 지붕을 인 옛 건물들이 어깨를 맞대듯 이어진 골목을 따라 걷고 있으면, 마치 수십 년 전의 어느 어촌 마을로 시간 여행을 떠난 듯한 기분이 든다.



일본인 이주 어촌의 흔적, 적산가옥들
해국길이 품고 있는 또 하나의 이야기는 근대사의 흔적이다. 원래 해국길 주변은 1920년대 감포항이 개항한 뒤 일본인 이주 어촌이 형성된 곳으로, 당시에는 이 일대가 가장 번화한 거리였다고 전해진다. 골목 곳곳에 남아 있는 적산가옥들은 그 시절의 풍경을 짐작하게 하는 자료다. 해국길에서 2~3분 거리에는 '다물은집'이라는 일본식 가옥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는 일본 어민들이 촌락을 이루었던 흔적으로 남아 있다.
추천 동선을 따라가면 이러한 역사적 장소들을 자연스럽게 엮어서 둘러볼 수 있다. 해국 골목을 지나 해국 계단, 옛 건물의 지하 창고, 다물은집, 한천탕, 우물샘, 소나무집의 순서로 걷는 코스가 잘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우물샘은 일제강점기에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던 우물이었다고 전해진다. 단순히 예쁜 골목길이 아니라, 한 시대의 생활사가 응축된 작은 박물관과도 같은 셈이다.


계단 위 포토존과 항구의 전망
해국길의 백미로 꼽히는 장소 중 하나는 해국으로 물든 계단이다. 계단 전체에 해국이 그려진 포토존을 놓치지 말아야 하며, 계단 위에서 내려다보는 항구의 풍광 또한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좁은 골목을 한참 걷다가 갑자기 시야가 열리며 감포항 전체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은, 이 길을 걸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에 담아 가는 장면이다. 언덕 위로 올라가면 감포항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뷰 포인트가 펼쳐진다는 점에서, 해국길은 골목 산책과 전망 감상이라는 두 가지 즐거움을 동시에 선사한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살아있는 마을
해국길의 가장 큰 특징은 이곳이 박제된 관광지가 아니라 여전히 사람이 살아가는 마을이라는 점이다.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적산가옥들이 골목마다 남아 시계를 과거로 되돌리는 듯한 느낌을 주는 동시에, 오늘을 살아가는 어촌 마을 사람들의 활력이 골목 구석구석에서 묻어나기도 한다. 빨래가 널린 좁은 마당, 골목에 내놓은 화분, 그리고 분주히 오가는 주민들의 모습은 이 길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의 터전임을 일깨워 준다.
최근에는 이러한 분위기에 새로운 활력도 더해지고 있다. 2026년에 들어서는 오래된 적산가옥을 개조한 카페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독특한 분위기 속에서 스냅 사진을 남길 수 있는 거리로도 주목받고 있다. 옛 골목의 정취를 그대로 간직하면서도, 그 사이사이에 현대적인 감성의 공간이 들어서며 새로운 매력을 더하는 모습이다.
























송대말등대로 이어지는 산책
해국길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주변 명소와 연결해 걷기에도 좋은 위치에 있다. 해국길 건너편 감포항에서 북쪽으로 10여 분 정도 올라가면 송대말등대에 닿을 수 있다. 절벽 끝에 용틀임하듯 휘어진 소나무들 사이로 푸른 동해가 흰 파도를 일으키며 넘실대는 풍경이 펼쳐지고, 소나무 숲을 지나 절벽 가까이 내려가면 새하얀 등대 두 기가 모습을 드러낸다. 등대 아래로는 검은 갯바위와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이 멋스럽게 펼쳐지며, 바위 위에서는 낚시꾼들이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이처럼 해국길과 송대말등대를 함께 묶어 걷는다면, 좁은 골목의 정겨운 어촌 풍경과 탁 트인 바다의 호쾌한 풍광을 한 번의 여정에서 모두 누릴 수 있다. 경주 시가지에서 감포항까지는 약 27km, 자동차로 4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이니, 경주의 고도(古都) 풍경에 익숙한 여행자라면 잠시 짬을 내어 에메랄드빛 바다와 옛 어촌의 정취가 공존하는 이 골목길을 걸어보는 것도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맺음말
해국길은 거대한 자본이 들어간 관광 인프라가 아니라, 한 세기 가까운 시간 동안 켭켭이 쌓인 마을의 기억으로 이루어진 길이다. 600m 남짓한 짧은 골목 안에 일제강점기 어촌의 흔적과 오늘을 살아가는 주민들의 일상, 그리고 보랏빛 해국이 그려진 벽화가 한데 어우러져 있다. 화려함보다는 정겨움, 속도보다는 느림이 더 어울리는 이 길은, 감포를 찾는 이들에게 바다의 풍광 못지않게 마음에 오래 남는 풍경을 선사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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