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MCA 이건희컬렉션: 피카소 도예 — 흙과 불로 빚어낸 거장의 또 다른 세계
세기의 기증, 이건희컬렉션
2021년 4월, 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소장품이 국립현대미술관(MMCA)에 기증되었다. 1,488점에 달하는 방대한 컬렉션 속에는 모네, 고갱, 르누아르, 샤갈, 달리, 미로 등 세계적인 거장들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이 파블로 피카소의 도자 작품들이다. 해외 거장들의 작품이 처음으로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상징적이며, 국내에서도 세계 수준의 문화예술 콘텐츠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가 크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이건희컬렉션 가운데 피카소 도예 107점을 공개하며 도예가로서의 피카소를 본격적으로 조명하는 전시를 마련했다. 이는 회화와 조각, 입체주의의 선구자로만 알려진 피카소의 또 다른 예술적 면모를 국내 관람객에게 처음으로 심도 있게 소개하는 자리였다.


피카소는 왜 흙을 선택했는가
파블로 피카소는 화가로서 부러울 것 없는 성취를 이룬 말년 시기에 지중해 연안 도시 발로리스에서 휴가를 보내면서 도예에 본격적으로 도전했다. 발로리스는 로마시대부터 분홍색 황토로 만들어진 질그릇을 다량 생산해 온 남프랑스의 대표적인 도자기 도시다.
사실 피카소는 젊은 시절부터 도예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06년 스페인 출신 도예가 파코 두리오를 만나면서 처음 도예를 접했으며, 폴 고갱의 도예 작품을 보고 도자의 매력을 발견했다. 1929년에는 도예가 장 반 동겐과의 협업으로 화병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전환점은 1946년에 찾아왔다. 1946년 휴가차 머문 발로리스에서 마두라 공방을 방문하게 되면서 도예에 본격적으로 빠져들었다.
피카소는 마두라 공방에서 화장토, 산화물, 유약 등의 도자 재료와 불과 흙의 특성, 번조의 과정을 익혔다. 초기에는 도자 장인들의 도움을 받아 접시 위에 디자인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었으나 점차 도자의 모양을 변형하면서 피카소만의 조형적 특성을 형성해 나갔다. 2차원 평면에서 표현하지 못했던 3차원적 조형미를 도예에서 마음껏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 매료되어 짧은 기간에 엄청난 수량의 도예 작품을 제작했다.
'피카소 도자 에디션'으로 불리는 도자 작품은 1947년부터 1971년까지 피카소가 마두라 공방에서 제작한 한정판이다. 회화나 조각, 판화에서 다루던 주제들이 다양한 형태와 기법으로 표현된 도자는 그의 조형적 표현의 다양성과 끝없는 예술적 실험을 대변한다.
흥미로운 것은 피카소가 도자에서 '예술의 민주화'를 꿈꿨다는 점이다. 그는 판화의 '에디션' 개념을 도자에 적용하며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일상에서 사용하기를 꿈꿨다. 캔버스 위의 그림은 미술관이나 부유한 컬렉터의 전유물이 될 수 있지만, 도자기는 사람들의 손에 쥐어지고 일상의 공간에 놓일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피카소가 도예에서 발견한 가능성이었다.













전시의 구성과 주제들
피카소의 도자 작품은 여인, 신화, 동물, 올빼미, 얼굴, 투우, 사람들, 정물과 풍경, 도예와 판화 등 아홉 가지 주제로 분류된다. 이를 통해 피카소의 독특한 개성과 도자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엿볼 수 있다.
4전시실에서는 여인, 동물, 얼굴 등 피카소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요 모티프를 중심으로 도예 작품을 소개한다. 이어지는 5전시실에서는 스페인 출신 작가로서의 정체성이 담긴 투우와 그리스·로마 신화 등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특히 여인 시리즈는 피카소의 삶과 예술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소재다. 그가 사랑했던 여인들 — 올가 코클로바, 마리-테레즈 발테르, 도라 마르, 자클린 로크 — 은 그의 회화뿐 아니라 도자에도 고스란히 새겨졌다. 흙의 굴곡과 유약의 색감 속에서 그 여인들의 형상이 살아 숨쉰다.
투우 주제는 피카소의 스페인 정체성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나고 자라며 투우를 예술적 원형으로 내면화했다. 도자 위에 새겨진 황소와 투우사의 역동적인 선은 그 어떤 회화보다도 원초적인 에너지를 품고 있다.
올빼미와 동물 시리즈 또한 흥미롭다. 염소와 비둘기 등의 동물은 그의 초기 회화부터 이어져 온 소재로, 도예 작업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피카소는 발로리스에서 실제로 올빼미를 키우기도 했는데, 그 작고 둥근 눈과 깃털의 질감은 입체주의적 형태 해체를 통해 도자 위에서 전혀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다.







































영상과 사진으로 만나는 창작의 현장
전시는 도자 작품에 그치지 않는다. 3층 전시홀에서는 피카소가 도자를 제작하고 드로잉하는 과정을 담은 루치아노 엠메르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Incontrare Picasso(피카소를 만나다)》를 상영해 피카소의 예술 세계를 보다 생생하게 조명한다. 관람객은 이 영상을 통해 피카소가 마두라 공방의 물레 앞에 앉아 흙을 빚고, 붓으로 즉흥적인 선을 긋는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완성된 작품만큼이나 그 과정 자체가 하나의 예술이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경남에서 만나는 이건희컬렉션: 지역 순회의 의미
경남도립미술관은 3월 18일부터 6월 28일까지 2026년도 'MMCA 지역동행' 사업의 일환으로 특별전 《MMCA 이건희컬렉션: 피카소 도예》를 개최한다. 이건희컬렉션을 지역 공립미술관에 순회 전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박금숙 경남도립미술관장은 "이번 전시는 문화예술 콘텐츠가 수도권에 편중된 현실을 완화하고 경남 도민에게 수준 높은 문화예술 향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국립미술관과 지역 공립미술관이 협력해 마련한 전시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이번 경남 전시는 단순한 순회 전시를 넘어 문화 접근성의 지역 불균형을 바로잡으려는 시도다. 세계적인 거장의 작품을 서울이나 과천까지 가지 않고도, 자신이 사는 고장의 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예술의 일상화라는 피카소의 도예 철학과도 맞닿아 있다.


















































도예가 피카소, 그 유산의 의미
피카소는 평생 5만 점 이상의 작품을 남겼고, 그중 도예 작품만 수천 점에 달한다. 그가 도예에 쏟은 열정은 단순한 노년의 취미가 아니었다. 흙과 불이라는 원초적 재료 앞에서 그는 회화의 거장이라는 권위를 내려놓고, 다시 한번 순수한 탐구자로 돌아갔다. 도예는 그에게 회화와 조소, 판화 등 그동안의 실험을 하나로 엮어내는 새로운 창작의 장이 되었다.
이건희컬렉션의 피카소 도예 작품들이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이 됨으로써, 한국의 관람객들은 세계 어디서나 유수의 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는 그 작품들을 이제 우리 땅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흙과 불로 빚어낸 거장의 손길이 이 전시 공간 속에서 오늘도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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