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 삼릉의 봄
- 솔숲과 봉분 사이, 천오백 년의 봄이 깨어나다
경주 남산(南山)의 서쪽 기슭,
울창한 소나무 숲 속에 세 기의 왕릉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이곳이 바로 삼릉(三陵)이다.
신라 제8대 아달라왕, 제53대 신덕왕, 제54대 경명왕의 능이 모여 있어
삼릉이라 불리는 이 장소는,
경주의 수많은 유적지 가운데서도 특별한 감성을 지닌 공간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경주 역사 지구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삼릉의 진짜 가치는 문화재 지정 번호나 공식적인 설명보다 훨씬 깊은 곳에 있다.
그것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특히 봄이 올 때마다
이 공간이 발산하는 독특한 생명력과 고요한 서정이다.
삼릉 입구에 발을 들이는 순간,
세상의 소음이 한 겹씩 걷혀 나가는 기분이 든다.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은 소나무 향이다.
수십 수백 년을 버텨온 적송(赤松)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삼릉 숲은
경주에서도 손꼽히는 소나무 군락지다.
굵고 붉은 껍질의 줄기들은 저마다 개성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어떤 나무는 비스듬히 기울어 하늘을 향해 팔을 뻗듯 자라고,
어떤 나무는 몸통을 구불구불 비틀며 수백 년의 풍상을 온몸으로 기록해 두었다.
인간의 손으로 다듬지 않은 그 자연스러운 수형(樹形)은
어떤 조각보다 자유롭고 아름답다.
봄이 오면 이 솔숲은 새로운 표정을 짓는다.
겨우내 짙고 어둡게 가라앉아 있던 숲이 봄 햇살을 받아 밝아지기 시작한다.
소나무는 늘 푸르지만, 봄의 햇살은 그 초록에서 다른 빛깔을 끌어낸다.
오전 나절, 낮게 비껴드는 햇빛이 솔가지 사이를 통과하면
숲 바닥에 빛의 그물이 깔린다.
이끼가 덮인 흙길 위로, 소나무 뿌리가 구불구불 드러난 오솔길 위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봄빛이 얼룩처럼 내려앉는다.
그 빛의 조각들 사이를 걷는 일은 그 자체로 작은 명상이 된다.






















솔숲 사이를 조금 걷다 보면 세 기의 봉분이 시야에 들어온다.
처음 마주했을 때의 인상은 의외로 소박하다.
거창한 석물도, 화려하게 장식된 난간도 없다.
그저 둥그스름한 흙의 언덕이 셋, 초록 이끼와 잔디를 두르고 나란히 서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단순함이 오히려 압도적인 무게를 지닌다.
거대한 석조 장식보다 이 소박한 봉분이 더 오랜 시간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흙이 가진 원초적인 힘 때문일 것이다.
봄의 봉분은 살아 있다.
겨울 내내 갈색으로 메마르던 잔디가 연둣빛 새순을 틔우며 조금씩 물을 올린다.
능의 발치에는 이름 모를 봄꽃들이 소리 없이 피어난다.
보라색 제비꽃, 노란 민들레, 하얀 냉이꽃이 봉분 둘레에 옹기종기 모여든다.
화려함을 자랑하지 않는 야생의 꽃들이지만,
천오백 년의 시간을 품은 왕의 무덤 발치에 피어 있는 그 모습은
어떤 정원의 꽃보다 더 깊은 울림을 준다.
생과 사, 과거와 현재가 이 작은 꽃 한 송이 안에서 조용히 만나고 있는 것이다.
삼릉의 봄을 가장 풍성하게 만끽하려면 이른 아침에 찾아야 한다.
해가 막 떠오를 무렵, 솔숲 사이로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삼릉은
이 세상의 풍경이 아닌 것처럼 몽환적이다.
공기는 차갑고 서늘하지만 그 속에 봄의 온기가 섞여 있어,
숨을 들이쉴 때마다 계절이 바뀌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안개가 솔숲을 낮게 감돌고, 그 사이로 봉분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떠오를 때,
이 공간은 신라 천년의 시간을 고스란히 품은 또 다른 차원처럼 느껴진다.
이른 아침의 삼릉을 즐겨 찾는 이들은 사진가들이다.
빛의 질이 완전히 달라지는 이 시간대에,
솔숲을 통과하는 빛 기둥과 봉분의 곡선,
그리고 이끼 낀 흙길이 어우러진 풍경은 어떤 필터나 연출 없이도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카메라를 들지 않은 이라도 이 시간의 삼릉을 걷다 보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고, 눈이 멈추고, 마음이 고요해진다.














삼릉은 단독으로 끝나지 않는다.
능 뒤편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를 따라가면 경주 남산의 깊은 품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남산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야외 박물관이다.
크고 작은 계곡마다 마애불과 석탑, 석불이 숲과 바위 사이에 새겨지거나 세워져 있다.
삼릉계곡을 따라 오르면 삼릉계 마애석가여래좌상,
선각육존불, 삼릉계 석불좌상 등 신라 불교 예술의 정수를 만날 수 있다.
봄의 남산은 연두색 새잎이 돋아나는 나무들 사이로 이 유물들이 숨어 있어,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새로운 발견이 이어진다.
바위 면에 새겨진 부처의 미소는 봄 햇살 아래에서 더욱 온화하고 부드럽게 빛난다.
돌 위에 앉아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잠시 눈을 감으면,
천오백 년 전 이 길을 걸었을 신라 사람들의 발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다.
경주에는 화려한 봄 명소가 많다.
대릉원의 웅장한 규모, 반월성 주변의 벚꽃 터널, 황리단길의 활기찬 풍경.
그러나 삼릉의 봄은 그 어느 곳과도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인파가 없고, 상업적인 소음이 없으며, 과도한 설명도 없다.
솔바람 소리, 새소리, 발밑의 흙을 밟는 소리만이 이 공간을 채운다.
그 고요함 속에서 사람은 비로소 생각하게 된다.
권좌에 앉아 한 나라를 다스렸던 왕들이 지금은 한 줌의 흙이 되어
봄꽃의 자양분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 봄꽃이 지면 또 다른 계절이 오고, 또 다른 봄이 오면 다시 꽃이 핀다는 사실을.
삼릉의 봄은 거창한 감동이 아니라 그런 조용하고 깊은 깨달음을 건네준다.
삼릉의 봄은 소란하지 않기에,
오히려 가장 오래, 가장 깊이 마음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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