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양동마을은
201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역사마을로서
600년의 전통과 때묻지 않은 자연환경, 향토성 등 160여 호에 거주하는
400여명 주민들의 생활상에 전통문화가 고스란히 전승되고 있다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의 양대문벌로 이어 내려온 동족마을로
경주에서 형산강 줄기를 따라 동북 포항쪽으로
40리 정도 들어간 곳에 자리잡고 있다.
넓은 안강평야에 풍수지리상 재물복이 많은 지형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제법 큰 양반 가옥들이 집단을 이루고 있다.
종가일수록 높고 넓은 산등성이 터에
양반들의 법도에 따라 집을 배열하고 있는데 오랜 역사를 지닌
큰 집들을 잘 보존하고 있다.
집들의 기본구조는 대개 ㅁ자형이거나 튼ㅁ자형을 이루고 있고
간혹 대문 앞에 행랑채를 둔 예도 있다.
혼합배치 양식으로 ㄱ자형이나 一자형도 있지만
대체로 집의 배치나 구성 따위가
영남지방 가옥이 지니는 특색을 띠고 있다.
무첨당(보물 제411호), 향단(보물 제412호),
관가정(보물 제442호)를 비롯해 많은 옛 건물들이 귀중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곳이다.
산계곡을 따라 펼쳐진 경관, 자연과 어울려
오랜 전통을 간직한 집들, 양반 계층을 대표할 수 있는 자료들과
유교사상, 관습들 때문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 마을로
평가받고 있다
관가정 (觀稼亭)
조선 전기에 활동했던 관리로서
중종 때 청백리로 널리 알려진 우재 손중돈(1463∼1529)의 옛집이다
언덕에 자리잡은 건물들의 배치는
사랑채와 안채가 ㅁ자형을 이루는데,
가운데의 마당을 중심으로 남쪽에는 사랑채, 나머지는 안채로 구성된다.
안채의 동북쪽에는 사당을 배치하고, 담으로 양쪽 옆면과 뒷면을 둘러 막아,
집의 앞쪽을 탁 트이게 하여 낮은 지대의 경치를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보통 대문은 행랑채와 연결되지만,
이 집은 특이하게 대문이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다
사랑채는 남자주인이 생활하면서 손님들을 맞이하는 공간으로,
대문의 왼쪽에 사랑방과 마루가 있다.
마루는 앞면이 트여있는 누마루로 ‘관가정(觀稼亭)’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대문의 오른쪽에는 온돌방, 부엌, 작은방들을 두었고
그 앞에 ㄷ자로 꺾이는 안채가 있다.
안채는 안주인이 살림을 하는 공간으로,
부엌, 안방, 큰 대청마루, 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채의 사랑방과 연결이 된다.
네모기둥을 세우고 간소한 모습을 하고 있으나,
뒤쪽의 사당과 누마루는 둥근기둥을 세워 조금은 웅장한 느낌이 들게 했다.
사랑방과 누마루 주변으로는 난간을 돌렸고,
지붕은 안채와 사랑채가 한 지붕으로 이어져 있다
관가정은 조선 중기의 남부지방 주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이다
(출처 : 위키백과)
무첨당(無忝堂)
무첨당은 경상북도 경주시 양동마을에 있는
조선시대 건축물로 회재 이언적 종가(宗家) 종택(宗宅)이다.
1964년 11월 14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411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성리학자이며 문신이었던
회재 이언적(1491∼1553)선생 종가의 일부로 조선 중기에 세운 건물이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로 건물 내부를 세 부분으로 구분하여,
가운데 3칸은 대청이고 좌우 1칸씩은 온돌방이다.
대청은 앞면 기둥 사이를 개방하고
누마루에서도 대청을 향한 쪽은 개방되어 있으며,
뒤쪽과 옆면은 벽을 쳐서 문짝을 달았다.
평면은 ㄱ자형을 띠고 있고
둥근기둥과 네모기둥을 세워 방과 마루를 배치하고 있다.
이 건물의 기능은 상류주택에 속해있는 사랑채의 연장 건물로
손님접대, 쉼터, 책읽기를 즐기는 따위의 여러 용도로
쓰이던 곳이다.
소박하면서도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으며
별당건축의 기능에 충실하게 지은 건축물로 회재 이언적 선생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
안채는 현재 보수중
근암고택
경주 양동마을(慶州 良洞마을)
양동마을(良洞마을)은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북쪽 설창산에 둘러싸여 있는 유서 깊은 양반마을로
1984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었고, 2010년 7월 31일 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 제34차 회의에서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한국에서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전통마을인 양동마을은 한국 최대 규모와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대표적인 조선시대 동성(同姓)취락으로써 월성 손(孫)씨, 여강 이(李)씨 양성의 양반가문이 서로 경쟁 및 협동하며
600여년의 역사를 일궈온 마을이다.
이황의 스승이자 영남학파의 선구자인 대(大)유학자 이언적을 비롯하여 지금까지도 주로 학자들을 많이 배출하고 있는
마을로 이 마을에서만 조선시대 과거급제자가 116명에 달했다.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전통가옥의 수는 전국 최다로
이를 포함하여 국보 1점, 보물 4점, 중요민속자료 12점, 경상북도지정문화재 7점 등 도합 24점의 국가지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1992년 영국의 찰스 황태자가 방문한 곳이기도 하다.
한국에는 7개소의 국가 지정 전통마을이 있으나 마을의 역사와 규모 및 보존상태, 문화재의 수와 전통성 및 가치,
그리고 뛰어난 건축과 조경양식,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때묻지 않은 향토성 등의 면에서 한국에서 가장 우수한 가치를 지닌 마을로 평가받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의 가치]
양동마을은 한국인의 전통적인 삶의 공간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을 높이 평가받았다. 첫째, 양동마을은
한국의 씨족마을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조선 전기 씨족마을 형성기의 전형 중 하나인 처가입향 유형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둘째, 양동마을은 전통적인 풍수의 원칙을 잘 지키고 있으며, 한국 씨족마을 입지의 전형 중 하나인 산기슭 입지의
대표적이고 우수한 사례이다.
셋째, 양동마을은 생산영역, 생활영역, 의식영역으로 구성되는 한국 씨족마을의 전통적인 공간구성을 기능적이고
경관적으로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는 매우 드문 사례이다.
넷째, 양동마을은 조선시대의 가장 시기가 이르고 뛰어난 살림집, 정사, 정자, 서원 등의 건축물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
유일한 사례이다.
다섯째, 양동마을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학술적, 문화적 성과물인 고문헌과 예술작품을 보관하고, 전통적인 가정의례와 특징적인 무형의 마을 행사를 오늘날까지 유지하고 있는 가장 훌륭한 사례이다.
[지리 및 규모와 환경]
마을은 경주시에서 동북방으로 20km쯤 떨어져 있다. 양동마을은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전통마을이다. 이 마을은
씨족마을의 대표적 사례인데, 씨족마을은 성씨를 매개로 하는 부계의 혈연집단이 대를 이어 한 곳에 정착해 이뤄진
정주 형태다. 조선 전기 이후 재산과 제사의 장자 상속이 강화되면서 나타나게 된다.
하나 혹은 두 성씨의 양반이 마을주민의 다수를 차지하면서 의사결정의 주도권을 가지는데 벼농사를 경제적 기반으로
삼는다. 양동마을은 조선 전기 씨족마을 형성기의 한 가지 전형, 즉 혼인으로 처가에 들어와 살면서 자리를 잡는
처가입향의 경우다.
양동마을은 풍수의 길지에 입지했다. 마을의 뒷배경이자 주산인 설창산의 문장봉에서 산등성이가 뻗어 내려 네줄기로
갈라진 능선과 골짜기가 여럿 나란히 있는 ‘勿(물)’자 형의 형국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 마을은 조선시대 유명한 지리지인 택리지에서 길지로 언급됐으며 조선의 풍수에서‘삼남의 사대길지’에 포함됐다.
이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많은데 일예로 勿자의 아랫부분에 획 하나를 더하면 血자가 된다하여 일제가
계획한 마을 안으로의 철도통과를 우회시켰고, 남향의 양동초등학교 건물을 동향으로 돌려 앉혔다.
내곡, 물봉골, 거림 하촌의 4골짜기와 물봉 동산과 수졸당 뒷동산의 두 산등성이, 그리고 물봉골을 넘어 갈구덕으로
마을이 구성되어 있다.마을의 진입로 쪽은 경사가 급한 산에 시선이 차단되고, 골짜기 밖에서는 마을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아 마을 입구에서는 그 규모를 짐작하기가 어렵고, 고가들도 접근해야만 볼 수 있다.
양동마을의 가옥과 건물들은 이와 같은 지형에 잘 조화돼 자연과 일체화된 경관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지형의 경사에
기대어 집의 자리를 잡고, 집에서 바라보이는 조망점을 풍수의 원칙에 따라 조정한 결과이다. 아름답고 매력적인
자연환경과 집들이 잘 조화를 이루어 정감어린 모습으로 다가오고, 숲속의 산새소리에 젖어드는 안온한 분위기가
양동마을의 큰 특징이다.
경북 지방 고문서집성(영남대 발간)에 의하면 여강 이씨(驪江 또는 驪州 李氏)인 이광호(李光浩)가 이 마을에
거주하였으며, 그의 손서(孫壻)가 된 풍덕 류씨(豊德 柳氏) 류복하(柳復河)가 처가에 들어와 살았고, 이어서 양민공(襄敏公) 손소공이 540여년 전 류복하의 무남독녀와 결혼한 후 청송 안덕에서 처가인 양동으로 이주하여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아 이곳에서 살게 되었고, 후에 공신이 되어 고관의 반열에 올랐다. 또, 이광호의 재종증손(再從曾孫)으로 성종의 총애를 받던 성균생원 찬성공(贊成公) 이번(李蕃)이 손소의 7남매 가운데 장녀와 결혼하여 영일(迎日)에서 이곳으로 옮겨와서 살고
이들의 맏아들이자 동방5현의 한 분인 문원공 회재 이언적(文元公 晦齋 李彦迪 1491-1553)선생이 배출되면서 손씨, 이씨 두 씨족에 의해 오늘과 같은 양동마을이 형성되었다. 양동민속마을이 외손마을이라 불리는 것도 이러한 연유이며
조선초기까지만 해도 실제 남자가 처가를 따라 가서 사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 풍덕 류씨의 후손은 절손되어 외손인 손씨 문중에서 제향을 받들고 있다고 한다
[학문과 인물]
양동의 전통문화 중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 학문과 교육의 전통으로 오늘날까지 수많은 인물을 배출해 왔다는 점이다. 양동마을의 입향 초기 선조들은 국가와 유림에서 인정하는 불천위로 추대되었기 때문에 마을의 씨족적 결속이 강화,
현대까지 그 맥을 이어올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 영남지방을 순찰하거나 여행하는 선비들에게 이 마을은 주요 방문지 중
하나였다. 흥선대원군도 이 마을을 방문하였다.
조선 중기부터 조선사회와 중앙정계를 지배한 사림들 중에서 매우 앞선 시기인 세조5년(1459년)에 이 마을의 손소공이
문과에 급제하고 중앙정치 무대에 진출하여 이시애의 난을 진압할 때 공을 세워 공신이 되고, 이어서 그의 둘째 아들인
손중돈 선생이 성종 20년(148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 우참찬 등 40여년 동안 요직을 두루 거치고 청백리에
올랐다.
대유학자이자 경세가인 문원공 회재 이언적 선생은 성리학의 이기철학을 이황에 앞서 최초로 이론적 체계를 세우고
조선조 성리학의 기초를 다짐으로서 영남학파의 창시자가 되어 이황에게 영향을 주는 등 해동부자라 불리어 지고
동방5현의 한분으로 추앙을 받으면서 종묘배향과 문묘에 종사되어 역대 임금 및 공자와 함께 위패가 모셔지는 영광을
누렸다. 전국의 향교와 20여 개소의 서원에 배향이되기도 했다. 손씨, 이씨를 합쳐서 문과 26명, 무과 14명, 사마 76명으로 과거 급제자가 총116명이나 되고, 음직은 부지기수였을 정도로 많은 인물이 배출됨으로써 전국에서 가장 이름난 양반마을로 알려지게 되었다.
[건축유산]
마을 전체 구성은 ‘농경지-거주지-유보지’로 나타난다. 농경지는 생산공간, 거주지는 생활공간, 유보지는 의식공간이 된다. 경작지와 생활지를 나누는 마을 입구에는 대개 외부세계로부터의 시각적 차폐를 위한 인공의 조림과 지형적 장치가
마련된다. 양동마을은 격식이 높은 살림집, 사당, 정자, 정사, 서원, 서당 등 역사적인 건축물들을 전국에서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마을 내의 노거수는 600여년의 오랜 역사를 증명해준다. 입향기인 15~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건축물들이
남아있다. 17세기 이후 국가에서 편찬한 지리지나 지도에 두 마을의 이름과 옥산서원 등이 기재된 사실에서 당대에도
이미 이 두 마을이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마을의 종가인 서백당은 15세기에 건립됐다. 이 종가는 한국 주거건축 역사상 가장 오래된 예에 속한다. 마을 내의 다른
건축물들도 17세기 이후에 지어진 것들로 수백 년에 걸친 마을의 역사를 잘 보여주고 있다. 양동마을에서 보물로 지정된 가옥은 4건(향단, 관가정, 무첨당, 독락당)이다. 민속자료로 지정된 건축물은 12건이다. 유교건축 중에서 옥산서원은 각각 사적으로 지정돼 있다.
(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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