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건축 이야기](31) 천도교 발상지 경주 ‘용담정’
경주시내에서 북동쪽으로 10㎞쯤 떨어진
구미산 자락에 앉은 용담정(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7평 남짓 크기의 아담한 단층 목조 건물이지만
천도교 1세 교조인 수운 최제우(1824∼1864) 대신사(大神師)가 득도해
동학 천도교를 일으킨 천도교의 발상지이자 최고 성지이다.
지금은 교적 교인 10만명에 불과한 군소 종단으로 쇠락했지만
1919년 3·1만세운동이 있었던 무렵엔 교인이 300만명이나 됐을 만큼
번창했던 민족종교 천도교.
그 대표 성지인 용담정엔 역사의 숨결과 민족혼을 느끼려 찾아드는 교인은 물론
일반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사람은 물론 이 세상 만물이 모두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侍天主).
‘사람을 한울님같이 섬기자.’는 사인여천(事人如天).
그리고 ‘모든 사람이 곧 한울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동학 천도교는 바로 이 세 가지의 기본 교리를 근본으로 삼는다.
최제우 대신사는 득도 후 원래 ‘무극대도(無極大道)’란 이름으로 동학을 세웠지만
훗날 유림과 관가의 탄압을 피해 살던 중
“내가 동에서 태어나 동에서 도를 받았으니 도인즉 천도(天道)요,
학인즉 동학(東學)이라.”고 천명한 다음부터
동학이란 이름이 널리 통용됐다고 한다.
< 포덕문 >
용담정은 바로 이 ‘무극대도’를 낳은 천도교의 발상지.
지금의 경북 경주 현곡면 가정리의 몰락한 양반가에서 태어난 수운은
19살 때부터 10년간 전국을 떠도는 구도행각 끝에 처가가 있던 울산 유곡동에 은거,
수도에 들었다.
여우가 자주 나타난다고 해서 ‘여시바윗골’이라 불렸던 외진 유곡동에
초가와 초당을 마련해 구도하던 중 을묘년인 1855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왔다는 한 스님으로부터 기이한 책(天書)을 받고는
그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구도와 수련방식을 택한다.
이른바 천도교가 ‘을묘천서’라 부르는 큰 사건으로,
수운은 이때부터 “세상을 떠돌며 도(道)를 구할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내 안에서 도를 얻을 것”이라며
구도의 방법을 바꾼 것이다.
국가 발간자료인 ‘비변사담록’과 ‘고종실록’에서
수운이 5∼6년간 울산에 기거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지만
‘을묘천서’와 관련한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천서의 흔적 역시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천도교단 초기 내부 자료인 ‘수운실록’(1865년)과
‘도원서기’(1879년)에 내용이 전할 뿐이다.
“을묘년 봄잠을 즐기는데 꿈인지 생시인지 밖으로부터
주인을 찾는 사람이 있었다.(중략)…
노승을 초당에 오르게 했더니 책을 한 권 내놓고 그 내용을 알 수 있느냐고 물었다.
사흘 뒤 선생이 ‘이 책의 내용을 알았다.’고 말하니
그 스님이 ‘부디 책의 내용대로 하옵소서.’라 말하며 떠났다.”
이 천서를 놓고
천주학서인 ‘천주실의’였을 것이란 주장이 학계에서 제기됐지만
천도교는 10년간 세상을 주유했던 수운이
당시 그 유명한 ‘천주실의’를 보지 못했을 리가 없고
을묘천서를 받은 뒤 인근 내원암과 적멱굴에서 수도한 점을 들어
천주교와는 무관하다며 부인하고 있다.
아무튼 수운은 이 천서를 받고 4년 후 고향인 용담정으로 돌아와
6개월간 수도 끝에 한울님으로부터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의 심법과 천도교 상징인
영부(靈符), 주문(呪文)을 받아 ‘무극대도’ 즉,
동학을 세웠다.
용담정은 원래 복령이란 스님이 지은 작은 암자였는데
수운 대신사의 할아버지가 암자와 인근 땅 수백평을 사들여
아들, 즉 수운의 아버지인 근암공 최옥에게 학업을 닦게 했다고 한다.
30여년의 세월이 흘러 폐허가 되었다가 최옥이 글공부를 하도록
서사(書社) 네칸을 만들어 용담서사란 이름을 지었다.
용담전 위쪽의 사각정에는 최옥의 문집인 근암집 목판원본이 보관되어 있다.
결국 수운은 울산을 떠나 처자와 함께 이곳에 정착,
“도를 깨닫기 전에는 구미산 밖으로 나가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으리라. ”고 맹세한 지
꼭 6개월 만에 이곳에서 무극대도인 천도(天道)를 얻은 것이다.
수운은 1863년 관군에게 체포되어
이듬해 3월 조정에 맞서 세상을 어지럽게 만들었다는 ‘좌도난정률(左道亂正律)’의 죄목으로
대구 장대에서 순도했는데
그 후 용담정 네칸과 살림집 다섯칸이 모두 헐렸다.
조정의 서슬이 무서워 아무도 용담정을 복구할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1914년에 가서야 재건작업을 벌여 용담정이란 현판을 붙였다고 한다.
그 후로도 40여년간 인적이 끊겼다가
1960년 천도교 부인회가 창도 백주년기념사업으로 중창했으며
지금의 건물은 1975년 옛 건물을 헐고 다시 지은 것이다.
할아버지가 동학에 깊이 관여했던 때문인지 박정희 전대통령은
이 용담정에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대한민국은 천도교에 큰 빚을 졌다.”는 말을 자주 했던 박 전대통령은
실제로 용담성지를 경주국립공원에 편입시키도록 지시했으며
용담정(龍潭亭)과 용담성지의 정문인 포덕문(布德門), 중문인 성화문(聖化門),
용담수도원의 편액 글을 직접 썼다.
< 성화문 >
정문 포덕문을 들어서
왼쪽에 수운 최제우 대신사 동상을 바라보며 300m쯤 숲길을 관통하면
오른쪽에 수도원과 사무실이 나타난다.
바로 앞 중문 성화문을 넘어 다시 숲길을 오르면 돌다리 용담교가 모습을 드러내고
그 오른쪽에 선경(仙境)이라 새겨진 바위틈에 석간수가 흐른다
수운이 기도할 때 쓰는 청수(淸手)를 받던 곳으로
지금도 교인들이 아주 신성시한다.
2005년 영남대 석좌교수에 임명돼 이곳을 찾은 김지하 시인은
“나처럼 깨끗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감히 용담정에 오를 수 있겠느냐.”며
용담교에 무릎을 꿇은 채 절만 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용담정 정면에는 수운 영정이 모셔져 있고
양옆에 천도교 상징인 영부가 걸렸다.
수운이 득도할 때 눈에 나타났다는 그 영부이다.
왼쪽 벽면에는, 남아 있는 수운의 유일한 친필인 거북 ‘구(龜)’자가 걸려 있다.
수운은 생전에 후학들의 마음 급함을 질타하며
조급해하지 말라는 뜻에서 ‘龜’자를 많이 써주었다고 한다.
이 ‘龜’자 밑 8폭병풍의 글귀가 눈길을 끈다.
‘不知明之所在 遠不求而修我’(밝음이 있는 바를 알지 못하겠거든
멀리서 구하지 말고 나를 닦아라).
한울님과 문답 끝에 득도의 경지에서 남긴 천도교 1세 교조의 일침이라지만
‘남 아닌 나부터 제대로 보라.’는 수신(修身)의 보편적인 교훈이 아닐까.
kimus@seoul.co.kr
< 용담정 >
■천도교의 발자취
몰락한 양반가에 태어난 수운이 구도행각에 나선 것은
기울어가는 가세와 조선말 불안정한 사회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유교의 폐습에 불만을 가졌고
10년간의 주유천하에 나서 인간과 우주,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시천주(侍天主)’를 세웠던 것이다.
이 시천주는 2세 교조 해월 최시형에 이르러
‘사람이 곧 한울님’이라는 인시천(人是天)으로 발전하며
3세 교조 의암 손병희에 이르러서는 ‘사람이 이에 한울’이라는
인내천(人乃天)으로 이어져 천도교의 종지가 되었다.
‘사람이 곧 한울이니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 같이 하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은
센세이션을 몰고 왔고 이를 못마땅히 여긴 조정에서
결국 ‘서학(西學)’‘이단(異端)’이라 하여 탄압의 칼을 뽑았다.
1세 교조 수운은 포교를 시작한 지 3년 만에
대구 장대에서 참형으로 순도했고
도통을 이어받은 2세 교조 최시형도 지하포교에 나서
삼남지방에 형성된 교세에 힘입어 동학혁명을 주도하다
원주에서 체포되어 서울에서 처형되었다.
최시형의 수제자였던 3세 교조 손병희가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했는데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3·1운동을 주도하고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출감한 뒤 곧바로 사망했다.
결국 천도교의 1·2·3세 교조는 모두 순도한 셈이다.
천도교의 종교행위는 수행과 신앙을 겸하는데
그 방법으로 주문(呪文), 청수(淸水), 시일(侍日), 성미(誠米), 기도(祈禱) 등
오관(五款)을 택하고 있다.
주문은 ‘한울님을 지극히 위하는 글’로 수련할 때 반복해서 외우며
청수는 매일 오후 9시의 기도식을 비롯해 모든 의식에 쓰인다.
시일은 일요일 오전 11시에 봉행하는 집회를 말하며
성미는 매일 밥을 지을 때 식구마다 한 숟가락씩 정성으로 떠놓은 쌀을 모았다가
한달에 한번씩 교회에 헌납한다.
서울 종로구 경운동의 중앙총부를 중심으로
전국에 130여개의 교구와 전교실이 있으며
현재 김동환 교령이 교단을 이끌고 있다.
2007-06-27 23면
이상 글 출처 - (31) 천도교 발상지 경주 ‘용담정’ | 서울신문 (seoul.co.kr)
< 용추각 >
수운 최제우(1824~1864)
경주 출생. 경주 최부자집, 최진립의 후손.
부친 최옥과 모친인 과부 한씨에서 태어난 최제우는 어려서부터 총명했다고 전한다.
최제우는 어려서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공부하였으나,
17살 되던 해 부친이 사망하면서 가세가 궁핍해져 유랑 생활을 시작하였다.
고뇌와 방랑의 시기를 경험한 최제우는
30대에 접어들면서 이런 생활을 청산하고,
당시의 혼란한 대내외적인 정세를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희망은
한울님의 뜻이라 생각하고는 구도의 길로 접어들었다.
최제우는 양산의 천성산 내원암 및 적멸굴과 울산 등지를 전전하며
수련을 진행하다가 1859년 처자를 데리고 경주로 돌아왔다.
이즈음 자신의 이름을 제선(濟宣)에서 “우매한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의
제우(濟愚)로 고쳤다.
고향 인근의 구미산 용담정에서 수련을 지속하던 최제우에게
급기야 1860년 4월 5일(음력)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고 떨리기 시작하면서
한울님의 말씀이 들렸다.
득도의 순간이자, 동학이 창시되는 순간으로,
이 시점을 동학(천도교)에서는 포덕 원년이라 칭한다.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의 신앙대상은 ‘천’ 또는 ‘천주’, ‘한울님’인데,
이러한 천 또는 천주가 사람과 별개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정립하였다.
시천주 사상에 따르면 마음 속에 모시는 천주 혹은 한울님은
신분이나 계급, 남녀, 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똑같았다.
여기서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한울님을 모시기에
평등하다는 동학의 평등사상이 정립되게 되었다.
최제우의 시천주 사상은 제2대 교주인 최시형에 이르러
“사람을 하늘처럼 섬긴다.”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의미로 확대되었고,
제3대 교주 손병희는 앞선 두 교주의 사상을 집약하여
‘사람=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교리화하였다.
동학의 교세가 확장되면서 세력을 얻어가자
당시 유림층에서는 동학에 대해 서학을 신봉하는 종교라고 비난하였다.
여기에 시간이 갈수록 조정의 탄압은 더욱 강화되어 갔다.
최제우는 탄압을 피해 1861년 전라도 남원으로 거쳐를 옮겨 은적암에서 은거하였고,
1862년에 다시 경주로 돌아와 포교 활동을 하였다.
같은 해 9월 사악한 술수로 백성들을 현혹시킨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가
제자들의 청원으로 석방되었다.
1863년 제자 최시형에게 해월(海月)이라는 도호를 내려주고
도통을 전수하여 제2대 교주로 삼았다.
1863년 11월 최제우는 관에 의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에
철종의 국상이 발생하자 1864년 대구로 이송되었다가
3월에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로 처형되었다.
(출처; 네이버백과, 《인물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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