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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건축 갤러리 ■/경 북

안동 도산서원 -2 (2024. 04.)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도산서원

 

 

 20197월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한국의 서원이 드디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현재도 영향력이 있는 한국 성리학의 문화적 증거이며,

그 변화의 역사적 과정을 보여 준다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대상은 총 9곳으로 대구 도동서원, 함양 남계서원,

경주 옥산서원, 안동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영주 소수서원, 장성 필암서원,

논산 돈암서원, 정읍 무성서원 등이다.

이 가운데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은

서원건축의 특징을 이해하기에 가장 적합한 사례이다.

여기에 모신 이황과 류성룡은 사제지간으로,

두 서원은 퇴계학파의 사상을 잘 드러내는 정신적인

건축이기도 하다.

 

 

 

 

 

 

 

 

 

 

 

 

 

 

 

퇴계 이황과 도산서원

 

 

퇴계 이황(1501~1570)

조선 성리학의 체계를 구축한 최고의 학자지만, 

조선 성리학의 위대한 5인으로 꼽은 동방5 순위는 다르다. 

유명 서원에 모셔 기념하고 있는 이들은

김굉필(도동서원), 정여창(남계서원), 조광조(용인 심곡서원), 이언적(옥산서원), 

그리고 도산서원의 이황이다. 

이 순위는 시대적 순서이기도 한데, 

이언적까지는 성리학의 도를 실현하기 위해 목숨을 건 개척자요

순교자라 할 수 있다. 

 

반면 이황은 이들이 구축한 토대 위에서 성리학의 사상을 체계화하고,

 실천적 방향을 제시한 완성자이다. 

또한 이후의 성리학자들은 거의 이황의 제자라 할 만큼

거대한 퇴계학파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14동이나 되는 도산서원의 건물들 가운데

가장 눈여겨볼 것은 퇴계가 직접 지은 도산서당이다. 

그는 잠깐 성균관대사성 등의 관직에 있었으나, 

정치보다는 학문과 수양에 뜻이 있어서 20여 차례 관직 사퇴와 거절을

되풀이할 정도였다. 

 

 

 

 

 

 

 

 

 

 

 

 

 

 

 

 

 

 

 

 

 

 

 

 

 

 

 

 

 

 

 

 

 

 

고향에 내려와 환갑 무렵에

도산서당과 기숙사인 농운정사를 지었다. 

퇴계는 말년까지 이곳에 거하면서 제자를 가르쳤다.

도산서당은 퇴계사상의 핵심인 깨어 있음, 한적함, 실용적 실천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집이다. 

이 집은 퇴계가 직접 설계도까지 그렸다고 전한다. 

그 설계도는 없지만 설계 개념과 내용을 공사담당자에게 설명한

편지가 남아 있다. 

 

그는 군자의 집은 3칸이면 족하다고 선언한다. 

자신이 거하는 방 한 칸, 

제자를 지도하는 마루 한 칸, 

그리고 불을 때는 부엌 한 칸. 

이 최소한의 건축은 몸과 마음을 깨어 있게 한다. 

 

그러나 도산서당은 실제로 3칸이 아니다. 

부엌은 반 칸을 늘렸고 마루는 아예 한 칸을 더 확장했다. 

결국 4.5칸이지만 퇴계는 3칸의 제도를 따랐다고 주장한다. 

확장부의 지붕은 한 단 낮게 붙인 눈썹지붕이고

마루도 듬성한 줄마루를 깔았다. 

정식 건물이 아니라는 강력한 차별이다. 

즉 본질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필요에 따라 확장하고 변형한다는

실용적인 실천이며, 

원칙에만 집착하지 않는 한적한 여유다.

 

 

 

 

 

 

 

 

 

 

 

 

 

 

 

 

 

 

 

 

 

 

 

 

 

 

 

 

 

 

 

 

 

 

 

 

 

 

 

 

 

 

 

 

 

 

 

 

 

 

 

 

 

 

 

 

 

 

 

 

 

 

 

 

 

 

 

 

 옆에 있는 농운정사는

몸체 양쪽으로 날개가 붙은 공()자형 각기 방·마루·부엌을 가진

두 기숙사가 대칭으로 붙은 꼴이다. 

이 집 역시 이황의 설계 작품으로, 

완전한 대칭 같지만 동쪽 방의 문은 두 짝이고 서쪽 방은 외짝으로

차별을 두었다. 

 

같음 속에 다름을 둔 실용적 변용이 번뜩인다.

 퇴계가 죽은 후, 쟁쟁한 제자들은 선생을 기념하고

퇴계학파의 근거지가 될 서원 건립을 논의한다. 

논쟁과 숙고 끝에 선생의 마지막 서재인 도산서당 뒤에

서원을 건립하기로 한다.

6년 후인 1576, 드디어 도산서원이 완공됐다. 

마치 선생이 앞에 앉고 제자들이 뒤에 둘러선 모습의 건축적 집합체를

이루었다. 

도산서원의 주인은 영원히 퇴계이기 때문이다.

 

(이상 글출처[김봉렬과 함께하는 건축 시간여행]

<9>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도산서원)

 

 

 

 

 

 

 

 

 

 

 

 

 

 

 

 

 

 

 

 

도산서원과 도산서당

 

 

 도산서원은 건축물 구성면으로 볼 때 크게

도산서당과 이를 아우르는 도산서원으로 구분된다.

도산서당은 퇴계선생이 몸소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고,

도산서원은 퇴계선생 사후 건립되어 추증된 사당과 서원이다.

 

도산서당은 1561(명종 16)에 설립되었다.

퇴계선생이 낙향 후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을 위해 지었으며

서원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퇴계선생이 직접 설계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때 유생들의 기숙사 역할을 한 농운정사와

부전교당속시설인 하고직사(下庫直舍)도 함께 지어졌다.

 

도산서원은 퇴계선생 사후 6년 뒤인 1576년에 완공되었다.

1570년 퇴계 선생이 돌아가시자 1572년에 선생의 위패를

상덕사(보물 제211)에 모실 것을 결정하였다.

2년 뒤 지방 유림의 공의로 사당을 지어 위패를 봉안하였고,

전교당(보물 제210)과 동 · 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다.

 

1575(선조 8)에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의 편액을 하사 받음으로써

사액(賜額)서원으로서 영남유학의 총본산이 되었다.

1615(광해군 7) 사림이 조목(趙穆)을 종향(從享)했다.

1792(정조 16) 정조 임금이 치제(致祭)를 내리고

도산별과(陶山別科)를 시행하였다.

 

 1796(정조 20) 시사단 (試士壇)을 세우고,

1819(순조 19) 장서고(藏書庫)인 동광명실(東光明室) 건립하였다.

1870(고종 7)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서 제외되었으며,

1930(경오년) 서광명실(西光明室) 증건(增建)하였고

1932(임신년) 하고직사(下庫直舍) 이건하였다.

1969년 본 서원을 중심으로 임야 및 전답 19324.945

사적 170호로 지정되었고,

1970년부터 대통령령으로 보수 · 증축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우리나라 유학사상의 정신적 고향으로 성역화 되었다.

1977년 도산서원관리사무소가 설치되고 관리운영조례를 제정 공포한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 daum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