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연서원
한자 檜淵書院
영어공식명칭 Hoiyeonseowon
이칭/별칭 성주 회연서원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동강한강로 9[신정리 258]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소연
[상세정보]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에 있는 조선 후기 서원.
[위치]
회연서원(檜淵書院)은 성주군 수륜면 동강한강로 9[신정리 258번지]에 있다. 대가천 변에 자리하며, 서쪽으로 연감산이
보인다. 대가천을 사이에 두고 성주 오토 캠핑장과 마주하고 있다. 가람 마을에서 대가천을 따라 남쪽으로 약 1.8㎞ 가다가, 신전 교차로에서 굴다리로 좌회전한 후 암전 삼거리에서 직진하면 좌측에 회연서원 주차장이 보인다. 성주군청에서
가야산 방향으로 약 17㎞ 떨어져 있다.
[변천]
회연서원은 향인들이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를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서원이다. 1583년(선조 16)에 정구는
가천(伽川) 가에 회연초당을 짓고 문도들과 매달 강학하는 모임을 조직하였다. 회연초당은 한강정사와 함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1605년(선조 38)에 정구가 재건하였다. 정구는 회연초당을 재건하면서 초당의 동쪽 부모의 묘소가 보이는 곳에 망운암(望雲庵)을 지었고, 회연초당 앞뜰에 매화나무 100여 그루를 심어 백매원을 조성하였다.
정구가 죽자, 1622년(광해군 14)에 죽헌(竹軒) 최항경(崔恒慶)[1560~1638]과 등암(藤菴) 배상룡(裵尙龍)[1574~1655]·
괴재(愧齋) 배상호(裵尙虎)[1594~1632] 형제 등 성주 지역 정구의 제자 및 향인들이 회연서원을 세우기로 뜻을 모았다.
이후 1627년(인조 5)에 완공하여 정구의 위판(位版)을 회연서원에 봉안하였으며, 최항경이 당시 회연서원의 초대 원장을 맡았다. 완공 당시에 묘우·강당·관리사(管理舍)·출입문·담장·방당을 갖추고 있었다. 1628년(인조 6)에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1540~1603]을 추배하였다. 1668년(현종 9)에 한강 정구 신도비(寒岡鄭逑神道碑)를
회연서원으로 이건하였고, 1677년(숙종 3)에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1569~1634]를 종향하였다.
이후 한강학파를 중심으로 회연서원은 서원으로서 제향과 강학을 행하는 공간이 되었다. 1690년(숙종 16)에
‘회연(檜淵)’ 사액이 내려졌고, 1729년(영조 5)에 김우옹을 청천서원(晴川書院)으로 이안(移安)하였다.
1868년(고종 5)에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강당만 남기고 나머지 건물들은 모두 철거되었다. 이후 강당은
성주 지역으로 내려오는 사신들을 머물게 하는 지참관(支站館)으로 기능하였다. 8·15 광복 이후 이기윤(李基允)이 쓴
‘회연서당(檜淵書堂)’이라는 현판을 새로 달았다.
1974년에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지역 유림과 문중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서원의 형태로 복원하였으며,
1984년에 복원 공사를 완공하였다. 같은 해에 정구와 이윤우를 묘우에 봉향하였고, 송사이·이홍기·이홍량·이홍우·이서를 향현사에 봉향하였다. 1990년에 현도루(見道樓)와 숭모각(崇慕閣)을 새로 건립하였다. 최근에는 무흘구곡 경관 가도 사업으로 회연서원 주변의 경관이 정비되면서 한강대까지 길이 만들어졌고, 숭모각 내부가 정비되었다.
[형태]
회연서원의 입구인 현도루는 문루의 구조이다. 경회당(景晦堂)과 동재인 명의재(明義齋), 서재인 지경재(持敬齋)는
강학 공간으로, 현재의 경회당은 1622년에 상량한 것이며, 동재와 서재는 1976년에 복원한 것이다.
회연서원의 제향 공간은 둘로 나뉜다. 하나는 정구와 이윤우(李潤雨)[1569~1634]를 제향한 묘우로, 경회당의 서북쪽에
있다. 다른 하나는 입구에 있는 향현사(鄕賢祠)로, 향현사에는 조식의 제자로서 정구의 사우였던 송사이(宋師頤), 정구의 처남들인 이홍기(李弘器)·이홍량(李弘量)·이홍우(李弘宇), 이홍우의 아들이자 정구의 문인인 이서가 배향되어 있다.
강당과 묘우는 횡열식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숭모각은 관리사 앞에 있다. 관리사는 서원을 지키면서 실질적으로 관리하는 건물이다.
[현황]
회연서원은 1974년 12월 10일에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로 지정되어 청주 정씨 문중이 관리하고 있다. 매년 음력 2월과
음력 8월에 향사를 지낸다. 문화 해설사가 관광 안내소에 상시 근무하며 관광객을 안내하고 있다.
회연서원 입구에는 ‘영남제일승지 무흘계곡(嶺南第一勝地武屹九曲)’이라는 표석과 함께, 「무흘구곡도(武屹九曲圖)」
9기가 두루마리 형태로 형상화된 돌에 인쇄되어 있다. 현도루 내에는 1991년에 정재익(鄭載翼)이 짓고 심재완(沈載完)이 쓴 「회연서원에서」라는 시판이 걸려 있다. 경회당에는 ‘경회당’ 및 ‘회연서원’ 현판과 전서체로 된 ‘망운암’·
‘옥설헌(玉雪軒)’·‘양현청(養賢廳)’·‘불괴침(不愧寢)’ 현판, 주자백록동규(朱子白鹿洞規)·국기(國忌),
정구의 「제회연초당(題檜淵草堂)」·「회연우음(檜淵偶吟)」이 게판되어 있다. 경회당 앞에는 정료대(庭燎臺)가 있는데,
2005년에 도난당하였던 것을 문중에서 다시 만들었다. 명의재와 지경재에는 목판에 새긴 완문이 각각 한 편씩 걸려 있다. 서원 내에는 미수 허목이 전서체로 쓴 봉비암 석각이 보관되어 있으나, 비바람에 심하게 훼손된 상태이다.
숭모각은 전시관으로 회연서원 및 정구와 관련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된 유물로는 이기윤(李基允)이 쓴
‘회연서당’ 현판 및 정구의 주요 연표·교지·영정·『심경발휘(心經發揮)』·『회연급문록(檜淵及門錄)』 등이 있다.
『한강선생문집』·『오선생예설』 등 목판 1,381장은 2005년 8월 18일에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하였다.
[의의와 평가]
회연서원은 조선 후기 성주 지역의 대표적인 교육 공간이었다. 현재도 성주군과 성주 유림을 중심으로 강학과 향사가
유지되고 시설이 관리되고 있어, 과거의 전통이 현재에도 이어지는 공간으로서 의의가 있다. 특히 회연서원은 성주 지역 및 영남 지역의 성리학에 큰 영향을 끼쳤던 정구와 밀접한 장소이기 때문에, 정구가 죽은 후 수많은 문인들이 정구의 행적을 심방하는 문화가 형성된 공간이다.
(이상 글 출처 - 디지털성주문화대전)
[ 성주 회연서원의건축적 의의 ]
한국 서원 건축의 공간 구성과 배치는 교육 시설로서의 강학공간과 선현의 제향을 위한 제향공간, 그리고 제향과 강학
기능을 지원하고 관리하는 지원공간으로 크게 나뉘며, 건물의 배치 형태는 일반적으로 강학공간을 앞쪽에 두고,
제향공간을 뒤쪽에 두는 전학후묘의 형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회연서원은 이러한 전형적인 배치에서 벗어나 강당을 중심공간에 배치하고 동북쪽 뒤로 사당을 배치하는 형태를 취하게 되었으며, 근래에 들어 서원의 보존과 관리를 위해 새로운 건물을 건립하는 과정에 현재의 배치를 갖게 되었다.
특히 회연서원의 강당은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건물이자 중심건물로서, 2015년 해체 수리 과정에서 발견된
종도리 상량문에서 1622년 건립하고 1896년에 중건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부재의 치목이나 결구수법 등에서 고식의 기법을 확인할 수 있어 건축적 가치를 더하고 있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그 규모가 크다. 강당의 구조는 조선 중기의 건축수법과 구조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또한 강당 배면 창호의 구성에 있어 중간설주가 사용된 영쌍창과 창호의 문얼굴에 사용된 연귀맞춤 등은 18세기 이전의 건물에서 확인 되는
고식의 기법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회연서원의 강당은 창건과 상량문의 기록적 근거가 정확하고 건물에 사용된 고식의 건축수법과 구조,
양식 등으로 볼 때 조선 중기 건축사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이다.
회연서원 명상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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