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카페> 자연 품은 거실·사색의 옥상… ‘나’를 발견케 하는 집
- 문화일보
- 입력 2018-11-21 10:24
바라간 주택의 거실. 정원의 나무로 부드럽게 여과된 빛이 거실을 비추고 있다. @Pinterset
■ 김광현의 건축으로 읽는 일상 풍경 - ⑨ 멕시코 건축가 루이스 바라간의 자택
거실 한 면을 窓으로 채워
생명 넘치는 정원과 대면
“자연의 위엄 깃든 안식처”
높은 벽 둘러싸인 옥상엔
조그마한 의자 ‘덩그러니’
하늘 밑 숙고하는 장소로
“고독이라는 벗과 있을 때
나 자신을 인식할 수 있어”
고요한 위안의 공간 추구
자기 집을 가질 만한 여유가 있든 그렇지 못하든 모두가 집에 대해 생각해야 할 근본적인 물음이 있다. 그것은 ‘나만의 집’은 어떤 집일까 하는 것이다. ‘내 집’은 내가 소유한 집이다. 그러나 ‘나만의 집’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를 인식하게 해주는 집이다. 그래서 ‘나만의 집’이란 내가 살고 싶은 아름다운 집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 세상에 살면서 한평생 내 몸을 맡길 수 있는 집이며, 삶의 원점이라 할 수 있는 집이다. 이런 질문을 할 때마다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주택은 멕시코의 건축가 루이스 바라간의 자택(Luis Barragan House, 1948)이다. 이 주택에는 지구 저편에 있는 집인데도 이상하게도 내가 살고 싶고 살면서 닮고 싶은 두 장면이 있다. 거실과 옥상 테라스. 이 두 장소는 무릇 주택이란 이래야 한다고 느낄 때마다 늘 머릿속에 등장하는 원점이다. 도대체 이 두 장면은 왜 나를 오랫동안 사로잡고 있는 것일까?
이 주택은 멕시코시티 교외 타쿠바야(Tacubaya) 지구 차풀테펙(Chapultepec) 공원의 남서쪽 서민 주택가 안에 있다. 회색의 외관에 작은 창이 몇 개 나 있을 뿐 아주 소박해 이 집이 20세기에 지어진 가장 중요한 10개의 주택 중의 하나인지 알아차리는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다. 그러나 이 주택은 모더니즘에 멕시코 전통건축을 합한 탁월한 설계로 200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옥상 테라스는 한 인간이 하늘과 교감하며 숙고하는 장소였다. @Armando Salas Portugal
이 건물은 자택과 스튜디오가 같이 있으며 길에 각각의 입구가 따로 있다. 문을 열고 안에 들어가면 약간 어둡다. 그러나 여기를 지나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부드러운 햇빛이 사람을 맞아준다. 간소한 외관과는 달리 하얀 벽에 멕시코의 토착적인 색깔인 분홍색이 선명하게 칠해져 있고, 하얀 벽으로는 위에서 내려오는 빛이 부드럽게 반사된다. 그리고 그 분홍색 벽은 다시 빛을 반사해 하얀 계단을 분홍으로 물들인다. 이 집의 벽은 색이 칠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빛에 색이 들어가 있다.
이런 방을 지나면 천장이 높은 거실이 나타난다. 집의 바닥 면적보다 조금 더 넓은 정원에는 멕시코 특유의 식물들이 있는 그대로 방치된 채로 자라고 있는데, 거실은 바닥부터 높은 천장까지 거실의 전면을 채우는 창으로 정원과 직접 대면하고 있다. 이 창의 틀은 벽과 천장과 바닥에 매립돼 있다. 그리고 아주 가는 십자 프레임이 창을 네 등분 한다. 정원으로 나가는 문은 왼쪽 벽 옆에 따로 나 있어서 거실과 정원이 온전히 한 몸을 이루고 있다. 거실은 서향이지만, 이리저리 뒤엉켜 있는 나뭇가지 덕분에 강렬한 빛도 부드럽게 여과돼 거실을 비추고 있다.
이 주택은 우리가 흔히 보듯이 건물을 아름답게 가꾸려고 정원을 덧붙인 것이 아니다. 바라간은 정원을 이렇게 생각했다. “정원을 만들 때 건축가는 자연의 왕국을 협력자로 초대한다. 아름다운 정원에는 언제나 자연의 위엄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정원 안에서 자연은 인간의 크기로 축소되고, 공격적인 현대생활에 가장 효과적인 안식처로 바뀐다.” 그에게 정원이란 자연의 위엄과 본성이 깃들어 있는 곳이면서 안식처를 사람에게 되돌려주는 것이다.
페르시아 사람들은 ‘담으로 싸고 꽃과 나무를 키우는 마당’을 ‘파라디소(paradiso)’라고 했는데, 이것이 변해 영어로 낙원을 뜻하는 ‘패러다이스(paradise)’가 됐다. 한편 정원을 뜻하는 ‘garden’이라는 말은 ‘호르투스 가르디누스(hortus gardinus)’에서 나왔다. ‘호르투스’는 정원이고 ‘가르디누스’는 둘러싸였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가르디누스’만 남아 ‘garden’이 정원을 뜻하게 됐다. 이처럼 정원은 자연을 에워쌈으로써 천상의 낙원을 미리 맛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바라간은 이렇게 말했다. “정원은 그 자신 안에 우주 전체를 담고 있다”고.
나뭇잎 사이로 새어 들어와 벽과 바닥을 밝게 비추는 햇빛은 그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최고의 선물이다. 나뭇잎에 비친 빛이 그 뒤에 있는 나뭇가지나 잎의 그림자가 돼 내 방 안에 드리울 때 사람은 살아 있음을 느낀다. 바라간 주택의 거실은 이런 빛을 아주 절실하게 나타낸다. 이런 거실에서 투박하게 짠 패브릭으로 덮인 소파에 앉아 있다가, 창 가까이에 놓인 사각의 테이블로 옮기면 손으로 턱을 괴고 물끄러미 정원을 바라볼 수도 있고 일도 할 수 있다. 벽에 걸려 있는 바우하우스의 조세프 알버스(Josef Albers)의 그림이 이런 행위의 초점이 돼 준다.
이렇게 비쳐 들어온 빛은 두툼하고 깨끗한 나무판 바닥과 까칠까칠한 벽, 그리고 거실과 정원이 만나는 곳에 깔린 이 지방 고유의 검은 돌에도 비친다. 그리고 방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하는 빛으로 제각기 다른 표정을 지닌다. 이런 작은 현상들이 모여 빛이 변화하고 있음을 감지한다. 그리고 변화하는 정원의 생명과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도 지각하게 된다.
거실 바로 옆에는 스튜디오가 있는데 그 앞에는 아주 작은 중정이 있고 또 그 안에는 작은 수반이 붙어 있다. 아주 조그마한 소리를 내며 흐르는 이 수반 위로 때때로 새들이 물을 마시러 찾아온다. 바라간은 훗날 커다란 거실 창의 밖에 커튼을 쳤다. 이것은 아침에 마련해 준 모이를 먹으러 날아오거나, 저녁에 새가 밝은 방으로 보고 날아와 유리에 부딪혀 죽은 것을 보고 친 것이다. 주택은 사람의 안식처라고 많이 들었다. 그러나 말과 머리로 아무리 들어도 소용없다. 안식처인 집은 작은 현상을 몸과 마음이 깊이 느낄 때 비로소 그 가치를 알게 된다.
계단 홀에서 2층으로 올라가면 옷방이 있는데, 이 방을 거쳐 좁은 계단을 오르면 옥상의 테라스로 갈 수 있다. 테라스로 올라가는 계단은 폭도 그리 넓지 않다. 방에서는 세 단만 보일 뿐 나머지는 모두 벽 뒤에 가려 있다. 그러나 이 방은 소박하고 낮은 장이 단정하게 놓여 있고, 노란빛이 도는 벽에는 커다란 십자가가 걸려 있어서, 바라간은 이 옷방을 ‘그리스도의 방’(cuarto del Crist)이라고 이름 지었다. 따라서 이 방은 테라스로 갈 때 지나는 곳이 아니다. 오히려 옥상 테라스가 이 옷방의 옆에 있는 또 다른 방이고, 자기만이 갈 수 있는 방이다.
4∼5m 정도 되는 높다란 벽이 옥상 테라스를 둘러싸고 있다. 이 테라스는 벽으로 둘러싸인 채 오직 하늘과 대면하고 있어서 자연과 건축의 대비가 아주 뚜렷하다. 그런데 그 안에는 초등학교 학생이나 앉을 만한 조그마한 의자가 하나 놓여 있다. 키가 192㎝인 바라간은 테라스를 서성거리다가 이 작은 의자에 앉아 벽을 둘러보고 하늘을 바라보고 자신을 되돌아보곤 했다. 이 작은 테라스는 한 인간이 하늘과 교감하며 겸손하게 숙고하는 장소였다.
나는 수백 번도 이 사진을 더 보았으나 그때마다 늘 새로운 의미가 나타나고 또 나타났다. 참 이상한 일이다. 사람이라면 간직해야 할 삶의 한 형태를 느꼈기 때문인데, 주택에 이런 자리를 둔 것은 바라간의 이 주택이 유일할 것이다.
바라간은 고요함과 고독을 즐겼다. 그래서 그가 만든 공간에는 언제나 고요함과 고독이 흐르고 있다. 그는 매우 관대한 사람이기도 했다. 좋은 책을 발견하면 친구들에게 줄 책도 여러 권 같이 샀고,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는 늘 가진 것을 나눠줬다. 그래서 그의 주택은 관대하다. 그는 인간적인 삶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았다. 그렇지만 그는 관념에 머물지 않고 건축의 물리적인 구축으로, 생명이 자라는 정원으로, 매일의 변화를 빛으로 반사하는 벽으로, 숙고의 장소에 놓인 조그마한 의자로 자신의 삶을 번역했다. 그래서 그의 자택은 집의 원본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김광현 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그는 평생 고독을 벗하며 혼자 살았다. 그에게 고독이란 겸손하게 사는 방식이었다. 그는 1980년 프리츠커상 수상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독과 함께 있을 때만 사람은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독이란 좋은 친구입니다. 저의 건축은 고독을 무서워하거나 피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정사각형의 단순한 식탁이 놓인 좁은 식당에는 두 개의 의자만 놓여 있는데, 장식장에 놓인 접시에는 ‘soledad’(고독)라고 쓰여 있다. 그래서 많은 말을 하지 않은 그는 이렇게 힘줘 강조했다. “전경을 멀리 바라보는 파노라마보다 올바로 틀 지어진 풍경이 아름답습니다. 고요함이야말로 고뇌와 두려움을 고치는 약입니다. 호화롭든 소박하든 평온한 집을 만드는 것이 건축가의 의무입니다. 저의 집은 제 마음의 피난처입니다.”
나를 인식하게 해주는 ‘나만의 집’은 자기가 보내고 싶은 시간의 질, 느끼고 싶은 공간의 질이 분명한 집이다. 이러한 집은 자기의 직관에 충실할 때 비로소 얻어질 수 있다. 바라간의 건축은 ‘정서를 흔드는 건축’(emotional architecture)이라는 그의 말로 요약된다. ‘정서를 흔든다’ 하니 눈에 산뜻하고 아리따운 건물을 만들자는 뜻으로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말로 ‘평안을 주는 건축’이다. 그의 건축의 대전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영어로 ‘comfort in space’인데, 이것은 공간에서 받는 위안을 말한다. ‘comfort’는 안락, 편안, 위안, 편의를 뜻한다. 그렇지만 집이 사람에게 평안을 주기 위한 공간임은 어느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바라간은 이렇게 말했다. “제가 한 것을 흉내 내지 마십시오, 제가 읽은 것을 읽고 제가 본 것을 봐 주십시오.” 집의 원상은 내 것을 숙고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지 비슷하게 흉내 낸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라간 주택 계단 홀의 전화대 앞에는 검은 감나무로 만들어진 의자가 하나 있다. 그러나 이 의자는 50년 가까이 위치도 방향도 바뀐 적이 없다. 바라간의 자택만이 아니라 바라간이 설계해 준 주택에서도 본래 그가 배열한 가구나 그림, 장식품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건축가가 바꿔서는 안 된다고 해서 바뀌지 않은 게 아니다. 건축가는 모든 가구나 장식품을 건축주들의 생활을 숙고해 결정했고, 건축주들도 매일의 생활 속에서 그것들이 공간에 주는 의미를 깊이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라간은 세상을 떠났는데도 그의 건축주들은 주택을 의뢰했을 때와 똑같은 신뢰와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그가 설계해 준 집에서 계속 살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단 하나. 그가 설계한 주택들은 그들만의 집의 원상을 깊이 느끼게 해줬기 때문이다. 바라간은 작은 우주를 담은 이런 집에서 198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40년 동안 지냈다. 이런 까닭에 미국의 거장 루이스 칸(Louis Kahn)은 이 주택을 아주 높게 평가하며, 이 집은 단지 집이 아니라 집 그 자체라고 말할 정도였다. 루이스 칸도 집의 원점과 같은 것을 똑같이 느꼈기 때문이다. (문화일보 10월24일자 24면 8회 참조)
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출처 - <지식카페>자연 품은 거실·사색의 옥상… ‘나’를 발견케 하는 집 :: 문화일보 munh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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