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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현의 건축으로 읽는 일상 풍경 - ④ ‘낙수장’ 건축주 카우프만家

<지식카페>20세기 최고 ‘폭포위의 집’… 건축가·건축주 함께 지었다

  • 문화일보
  • 입력 2018-07-04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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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연 최고의 주택 ‘낙수장(落水莊, Fallingwater)’. Wikimedia Commons


 
■ 김광현의 건축으로 읽는 일상 풍경 - ④ ‘낙수장’ 건축주 카우프만家

거실 바닥이 폭포 위에 걸친
자연과 어우러진 혁신적 구조
건축가 라이트가 설계 ‘낙수장’

건축주 카우프만이 실제 거주
건축가와 소통하며 건물 완성
예술 아닌 ‘사는 공간’이 핵심

“물소리 시끄러워 떠나”는 낭설
오랫동안 살다가 아들이 기증

20세기를 연 최고의 주택 ‘낙수장(落水莊)’은 1939년에 에드거 카우프만(Edgar Jonas Kaufmann, 1885∼1955)을 위해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 1867∼1959)가 일흔이 넘어 완성한 여름 별장이다. 폭포는 영어로 ‘waterfall’이라고 하는데, 라이트가 스케치하고 나서 그 옆에 ‘Fallingwater’(떨어지는 물)라고 적은 것에서 이름이 지어졌다. 이 주택은 과감한 외팔보(캔틸레버) 구조로 거실의 바닥을 폭포 위에 걸치고 있으며, 거실에는 강으로 곧장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마련돼 있다. 외팔보란 한쪽은 어깨에 고정되고 손바닥 쪽은 길게 뻗는 것과 같은 구조를 말한다.

이 주택이 20세기 최고의 주택인 이유는 폭포 위에 지어진 주택이 자연과 흠뻑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근대를 살던 이 주택의 건축주가 자신의 생활을 자연 속에서 섬세하게 일구어낸 데 있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고 ‘환경보전협회’가 관리하고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 가족들이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 주택의 핵심은 “그-안에-사람이-살게-된-공간”(the-space-within-to-be-lived-in)이라고 라이트가 지어낸 말에 요약돼 있다. 관람객처럼 구경하니 멋지더라는 공간이 아니라, ‘실제로 그 주택 안에 사람이 살면서 만들어진 밀도와 깊이를 가진 공간’이라는 뜻이다.(이 말이 어렵게 들리면 한 번 더 천천히 소리 내어 읽어 보라.) 그런데 이 밀도와 깊이는 성실하고 통찰력이 있는 이 주택의 건축주에게서 비롯했고 그들에 의해 완성됐다.

그런데도 어찌 된 일인지, 이 ‘낙수장’의 물소리 때문에 시끄러워 잠을 잘 수 없게 된 건축주 카우프만이 할 수 없이 본래 살던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거나, 예술성만을 강조해 살 수 없게 된 아들은 이 집을 결국 기부해 버렸다는 낭설이 여기저기에 있다. 이 낭설을 반박할 증거로 한 가지만 말해 보자. 1941년에 일어난 태평양 전쟁으로 난방 연료가 부족하게 되자 호텔에서 살던 이들은 토탄(土炭)을 얻기 쉬운 ‘낙수장’으로 옮겨 살 정도로 이 ‘낙수장’은 단순히 별장으로만 쓰이지 않았고 오랫동안 이들의 생활과 함께했다.

‘낙수장’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건축주 카우프만과 그의 아들 카우프만 주니어(Edgar Jonas Kaufmann jr., 1910∼1989)의 건축에 대한 지성인으로서의 태도다. 카우프만은 피츠버그의 대표적인 카우프만 백화점의 소유주이자 경영자였다. 그가 70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 피츠버그의 신문은 1면에 ‘상인의 왕자’를 잃었다고 슬퍼할 정도로 시민에게 존경을 받은 인물이었으며, 라이트도 20년 이상의 건축주이자 친구였던 그를 깊이 애도했다.

아들 카우프만 주니어는 라이트의 ‘자서전’을 읽고 감동해 1934년 건축가가 될 마음이 전혀 없는데도 탤리에신(Taliesin)에서 아틀리에를 하던 라이트를 찾아가 면접을 보고 사무소에 들어갔다.

당시 라이트는 일이 별로 없어 이곳에서 젊은이들과 함께 아틀리에 겸 건축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우프만 주니어가 아틀리에에 들어간 것이 계기가 돼 라이트는 피츠버그에 큰일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같은 해 애팔래치아 산맥을 흐르는 베어런(Bear Run)에 지을 ‘낙수장’ 설계도 의뢰받았다.

베어런의 폭포는 미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거주의 원상이었다. 건축주 카우프만은 큰 바위 사이에서 2단, 3단의 폭포가 돼 떨어지는 베어런의 모습에 크게 매료됐고, 낮은 여울에서 헤엄도 치고 일 년 내내 폭포를 보며 지낼 수 있는 별장을 짓고 싶어했다. 폭포를 보고 그 소리를 들으며 폭포에 손을 적시는 생활. 그것은 복잡한 근대 도시생활을 피해 휴식을 주는 보완물, 곧 근대사회가 낳은 또 다른 생활 형태였다.

라이트와 함께 주택을 지을 곳을 찾아간 카우프만은 베어런에서 헤엄을 치고 나서 물이나 비바람에 씻겨 반들반들해진 커다란 바위(boulder) 하나에 배를 깔고 엎드려 일광욕을 했다. 라이트가 이 바위를 거실 벽난로의 바닥으로 했고, 그것에서 25㎝ 내려간 지점을 거실 바닥으로 삼았다. 태고부터 그 땅에 있었던 바위가 인간이 지은 건축과 직접 이어지게 된 것이다. 폭이 7m인 2층 테라스를 받치는 외팔보의 길이는 1층 주심에서 한계치인 6.4m나 되었는데, 이 바위는 거실 바닥을 받치는 네 개의 외팔보 중 한 개의 기초이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수평선이 크게 강조돼 건축의 존재감이 뚜렷해졌고 강과 바위, 폭포와 숲은 하나가 됐다.

라이트는 현장에 다녀오자마자 돌 하나하나, 지름이 15㎝보다 큰 나무까지 모두 기입한 등고선 측량도를 마련해 달라고 요청했다. 건축주는 이듬해 3월에 측량도를 보내면서 두 달 후에는 따로 부탁한 백화점 계획안도 함께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라이트는 6개월 동안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으며 측량도만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카우프만은 계속 기다릴 수 없어 어느 날 탤리에신에 들르겠다고 전화를 했다. 그러나 이때도 별장 계획안은 어떻게 잘 되고 있냐고 묻지 않았다. 그런데도 라이트는 도면이 다 준비돼 있으니 어서 오라고 했다.

라이트는 약속한 날 아침 6시 반에 아침 식사를 마치고 처음으로 별장 스케치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제도판에 앉아 “부인과 카우프만은 이 발코니에서 차를 마시겠지?… 다리를 건너 숲을 이렇게 빠져나온단 말이야”라고 중얼거리며 1층 평면도, 2층 평면도, 단면도, 입면도를 그려냈다. 그리고 “집에는 이름이 있어야지” 하며 제일 먼저 그림 도면의 제목으로 ‘Fallingwater’라고 적었다. 이윽고 낮이 돼 카우프만이 도착했다. 라이트는 ‘낙수장’의 배치와 주거의 철학을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점심 식사하는 시간에 두 제자가 나머지 입면도 두 장을 라이트 풍으로 완성했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라이트는 이 두 장의 입면도로 계획안의 설명을 계속 이어갔다.

카우프만은 라이트가 처음으로 보여준 도면을 보고 놀랐다. “나는 이 집이 폭포가 보이는 곳에 놓여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니, 폭포 위에 걸친 집이라니?” 이에 라이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폭포와 함께 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단지 폭포를 보는 것만이 아닌, 당신 생활의 일부가 되게 해 주고 싶었습니다.”

아마도 ‘낙수장’은 라이트로서는 처음으로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주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건축주에게 저 거대한 외팔보로 지지되는 거대한 발코니가 얼마나 위태롭게 보였을까? 실시도면이 완성되자 카우프만은 이러한 엄청난 구조가 정말 안전한지 크게 걱정이 돼 잘 아는 구조 기술자에게 모든 도면을 주고 의견을 구했다. 그러고는 구조 전문가를 시켜 따로 도면을 만들어 외팔보의 철근을 두 배로 늘린 다음 콘크리트를 타설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만큼 건축주도 건축가 못지않게 자유로운 평면에서 새로운 생활을 원하고 있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 소식을 들은 라이트는 격노하여 이런 편지를 썼다. “친애하는 카우프만 씨, 만일 이 주택에서 일어난 콘크리트 기술에 대한 대가를 당신이 지불하신다면 제가 하는 일의 모든 의미는 사라지고 맙니다. 이 일을 당신이 처리하려 하신다면 고마운 일입니다. 그러나 나는 비난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떤 건축가와 친하신지는 모르지만 제가 보기에 그는 분명히 내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어떤 적절한 사람과 교제해야 하는지는 모르시는 듯합니다. 이 집에 대해 기대할 권리를 가진 당신이나 그 밖의 어떤 다른 가족보다 나는 이 집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당신의 신용을 얻지 못한다면 모든 게 끝입니다.”

이에 카우프만은 라이트가 쓴 문장에서 말을 조금 바꾸어 이렇게 점잖은 사과의 편지를 보냈다. “친애하는 라이트 씨, 만일 이 주택에서 일어난 콘크리트 기술에 대한 대가를 당신이 지불하신다면 제가 하는 일의 의미는 사라지고 맙니다. 저는 떠맡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비난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떤 건축주와 친하신지는 모르지만 제가 생각하는 그런 건축주는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당신은 어떤 적절한 사람과 교제해야 하는지는 모르시는 듯합니다. 저는 가능한 한 이 모든 일에 신용과 열의를 쏟고 있으며, 당신의 노력에 보답하고자 합니다. 그런데도 내가 당신의 신용을 얻지 못한다면 모든 게 끝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과의 글에 이어서 실시도면을 서둘러 달라고 부탁했다.

카우프만 가(家)의 사람들은 가만있다가 다 지어진 다음에 큰 허점을 알게 된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주택 건축주 판스워스와는 전혀 달랐다. 이들은 건축가와 세심하게 의논해 스스로 살기에 좋은 주택을 짓고자 했다. 이들은 가구나 조명기구의 샘플을 먼저 생각하고 라이트의 허가를 받았으며,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카펫은 라이트가 디자인한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선택한 다음 건축가를 설득해 정한 것이다. 아들은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월터 그로피우스의 자택에 설치된 정첩과 손잡이가 라이트가 설계한 것보다 훨씬 좋다고 여겨 직접 가보고 이를 그 제품 회사에 주문했다. 부인 릴리언(Liliane)은 게스트하우스 현관 옆에 작은 수영장을 제안했고, 카우프만은 유리창이 직각으로 만나는 곳에 창틀을 없애고 양쪽으로 열게 한다든지, 유리창의 창틀이 안 보이게 직접 돌벽과 만나게 해달라고 건축가에게 주문하기도 했다.

김광현 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카우프만은 외팔보 구조에 걱정은 크게 하면서도 완공되고 나서 20년 동안 거대한 외팔보가 얼마나 처지는지를 매년 측정해 기록하게 했다. 그렇다고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고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들 카우프만 주니어는 건물은 시간이 지나면서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법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한때 창의 유리가 얼어서 금이 갔지만, 창이 구조에 길들여졌는지 시간이 지나자 그런 걱정이 없어졌다고도 말했다. 또한 그는 1950년에는 비가 심하게 새서 양동이 17개로 받아냈으나 건축가를 원망하지 않고 시공상의 잘못을 밝혀내어 고치기도 했다.

카우프만 주니어가 쓴 이 글은 슬기로운 건축주란 어떤 사람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면 이 결함은 라이트의 능력이 부족해서일까? 아니다. 건축가와 건축주는 이제까지 할 수 있었던 수법의 한계를 넘어서 ‘낙수장’을 설계했다.… 위대한 기념비적인 건축은 난처한 구조 문제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어떤 한계를 넘어 그 건축물을 세우고자 애썼기 때문이다. 아야소피아의 돔, 로마의 산피에트로 종탑, 파리 판테온의 중심부가 그렇다. 이런 기념비적 건축물은 구조적인 안정이 불안해 크게 고쳐야 할 위험을 안고 있다. 이런 건축물들은 지금도 계속 지어지고 있으며 그 나라의 영광스러운 예술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는 독재자가 아니었고 ‘낙수장’은 공공의 기념물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라이트의 능력이 이런 기념비적 건축물들에 견주어 판단되고 있다. 그러니 ‘낙수장’에서 일어난 몇몇 결함에 일일이 변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1955년에 세상을 떠난 건축주 에드거 카우프만은 ‘낙수장’에 있는 가족묘에 묻혀 있다. 그리고 아들 카우프만 주니어는 1963년 상속받은 ‘낙수장’을 ‘서(西) 펜실베이니아 환경보전협회’에 기부했고, 그의 뼈는 낙수장이 있는 땅에 뿌려졌다. 이렇게 해 ‘낙수장’은 문자 그대로 이 가족에게 “그-안에-사람이-살게-된-공간”이 됐다.

건축에 대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건축은 우리가 사는 법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건축은 크기나 면적을 가진 구조물이지만, 그 안에는 공간의 밀도, 공기와 같은 생활이 있다. 그래서 건축은 건축가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건축주도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건축주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무엇을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문화일보 5월23일자 28면 3회 참조)

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