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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실 ■/김광현의 건축으로 읽는 일상 풍경

김광현의 건축으로 읽는 일상 풍경 - ③ 르 코르뷔지에가 ‘카바농’ 지은 까닭

 

<지식카페>세계 유산 ‘4평 오두막’… 女건축가에 대한 ‘질투’로 탄생했다

  • 문화일보
  • 입력 2018-05-23 10:51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아일린 그레이가 설계한 ‘E. 1027’에 르 코르뷔지에가 그린 벽화 ‘마르탱 곶의 낙서’. 복원된 ‘E. 1027’ 거실에 그린 르 코르뷔지에의 벽화. (출처 = https://www.yellowtrace.com.au/eileen-gray-villa-e-1027/) 완전히 벌거벗은 채 무단으로 ‘E. 1027’의 외벽에 벽화를 그리고 있는 르 코르뷔지에.


■ 김광현의 건축으로 읽는 일상 풍경 - ③ 르 코르뷔지에가 ‘카바농’ 지은 까닭

아일랜드 가구디자이너 그레이
1929년 佛별장 ‘E.1027’ 완성
건축계 화제 뿌리며 유명해져

르 코르뷔지에, 시기심 못 이겨
무단 침입 벌거벗고 낙서한 뒤
본인 설계作인 듯 오인하게 해

23년 뒤 ‘E.1027’ 바로 위에
부인 생일기념 ‘4평 주택’ 지어
소박함보단 걸작 지우기 의심

두 해 전 있었던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 전시회의 부제가 ‘4평의 기적’이었다. 흔히 르 코르뷔지에의 4평짜리 카바농(오두막)을 말할 때 부와 명예를 거머쥔 노년의 건축가가 휴가 때면 이 작은 집을 찾아와 조그만 창으로 지중해를 바라보며 유럽 문화의 원천을 숙고하면서 프로젝트를 구상했다고 설명해 준다. 그리고 고독한 수도자처럼 ‘최소한의 주택’을 몸소 실천해 보인 거장 건축가의 마지막 삶을 상상한다. 그러나 과연 “4평이면 충분히 행복하다”는 그의 주장만이 이 오두막의 유일한 진실일까?

르 코르뷔지에는 64세가 되던 1951년 자기 부인의 생일선물로 프랑스 남부 로크브륀-카프-마르탱(Roquebrune-Cap-Martin)에 이 오두막을 짓고자 했다. 그는 이 땅에 있던 식당 ‘불가사리 집’ 주인과 친해져서 그를 위해 숙박시설을 설계해 주고 대가로 땅을 받아 이 식당에 딱 붙여서 오두막을 지었다. ‘불가사리 집’에 앉아 45분 만에 오두막 스케치를 다 했다고 한다. 오두막에는 식당이 없다. 그러나 오두막 안에서 문 하나만 열면 ‘불가사리 집’이 오두막의 식당이다. 그러니 실제 사용하는 면적은 4평이 넘는다. 그런 집이 2016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됐다.

그러나 정작 그가 이 오두막을 짓게 된 더 큰 동기는 23년 전 바로 아래에 지어져 있던 ‘E.1027’이라는 주택 때문이다. 근대건축을 대표하는 주택 중 미스 반데어로에의 판스워스 주택은 1951년, 필립 존슨의 유리집은 1949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낙수장은 1939년, 르 코르뷔지에의 사보아 주택은 1931년에 완성됐다. 그러나 ‘E.1027’은 이들보다 빠른 1929년에 지어졌다.

이 주택은 아일랜드의 유명한 가구 디자이너이자 선구적 여성 건축가인 아일린 그레이(Eileen Gray·1878~1976)가 1926년부터 1929년 사이에 그녀의 애인 장 바도비치(Jean Badovici)와 함께 여름을 보내고자 지은 것이다. ‘E.1027’의 E는 아일린 그레이의 E, 10은 알파벳의 10번째 글자 ‘J’(Jean), 2는 바도비치의 B, 7은 그레이의 G를 나타낸다. 결국 두 사람을 위한 집이라는 뜻이다. 그녀는 프랑스 남부에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살고 싶어 이 집을 지었다. 바도비치는 ‘아르시텍튀르 비방트’라는 건축잡지의 저명한 편집장으로 르 코르뷔지에와 교분이 깊었다.

‘E.1027’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지어진 르 코르뷔지에의 오두막. ⓒflickr.com/ofhou


공교롭게도 주택 ‘E.1027’이 잡지에 소개됐을 때 제목이 ‘최소한의 주택’이었고, 그레이는 “최소한의 장소에 최대한의 쾌적한 생활”을 강조했다. ‘E.1027’은 르 코르뷔지에가 주장한 ‘근대건축의 5가지 요점’처럼 필로티 위에 88㎡의 거주공간을 뒀다. 이 거실에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이 들어오고, 그 안에 앉아 있으면 풍경화 안에 몸을 두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주택에는 모두 171점의 가구가 사는 사람의 필요에 절묘하게 융합돼 있다. 누워서 일하기를 좋아하는 바도비치를 위해 낮 침대를 만들고, 운동 장비를 잘 수납할 수 있게 하고 책상을 겸한 식탁 위에 코르크를 붙여서 식기 소리가 안 나게 하는 등 모든 디테일을 세심하게 처리했다. 르 코르뷔지에를 ‘근대주의 건축의 아버지’라 부르는데, 이 주택으로 그레이는 ‘근대주의 건축의 어머니’로 불리게 됐다.

이 주택이 완성되자 프랑스 건축계의 화제가 됐고, 그레이는 단숨에 시대의 건축가가 됐다. 바도비치와 친분이 있던 르 코르뷔지에는 1938년 부인과 함께 며칠 이 주택에 묵었다. 그리고 감탄했다. 이때 그레이는 새 애인이 생겨 이 집에서 불과 2년만 살았으므로 이 주택에 없었다. 이런 그레이에게 르 코르뷔지에는 찬사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속으로는 그레이의 재능에 질투를 느꼈다. 1930년대 그레이는 그가 디자인한 ‘드래건 체어’가 경매에서 당시 최고액인 1950만 달러, 지금 환율로 보면 210억 원이나 될 정도로 이미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고 있었던 저명한 가구 디자이너였다. 반면 르 코르뷔지에는 스스로 세계적인 건축가라고 믿고 있었지만 세상은 아직 이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 이런 그에게 처음으로 주택을 지은 여성 건축가가 그것도 자기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이토록 훌륭하게 완성한 것에 참을 수 없는 질투심이 일어났다.

그레이의 ‘E.1027’을 다시 평가하는 두 영화 중 하나인 ‘욕망의 대가’(The Price of Desire)에서 르 코르뷔지에는 그레이의 멘토이며 라이벌로 등장한다(그레이는 르 코르뷔지에보다 아홉 살 위다). 이 영화에서 르 코르뷔지에는 “주택은 살기 위한 기계”라고 너무나도 유명한 말로 그녀를 압도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레이는 이에 반박한다. “집은 살기 위한 기계가 아니다. 집은 인간을 위한 껍질이며 연장이고 해방이며, 정신적인 발산이다. 외관상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전체 구성, 개개의 작업이 하나로 합쳐져서 가장 깊은 의미로 그 건물을 인간적으로 만든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르 코르뷔지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녀의 작품 바로 뒤에 내 ‘오두막’을 지었다. 그러자 ‘E.1027’도 내 작품이라고 생각됐다.” 무슨 소리인가? 어떻게 그레이의 주택이 자기 작품이 된다는 말인가? 이 대사대로라면 오두막은 ‘E.1027’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지은 것이 된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에게 칭찬의 편지를 쓴 바로 그해 그는 그레이와 바도비치의 양해도 구하지 않고 무단으로 이 집에 들어와 흰색의 외벽을 더 멋있게 해주겠노라며 멋대로 낙서를 했다. 심지어 완전히 벌거벗은 채로 벽화를 그렸으며, 몰래 들어가 장식을 자기 스타일로 바꾸려고 했다. 그가 그린 벽화 중에는 서로 엉켜 있는 여자를 그려 그레이가 동성애자라고 야유한 것도 있다. 더구나 이 그림은 이 집의 빈 벽을 위해 구상한 것이 아니라, 아주 작게 그린 그림을 프로젝터로 확대해 비춘 다음 검은색으로 그려 넣었다.

그리고 그림의 오른쪽은 바도비치, 왼쪽은 그레이, 가운데는 바라기는 하지만 태어나지 않은 아이라고 자기 친구들에게 해설까지 했으며, 제목을 ‘마르탱 곶의 낙서’라고 붙였다. 그가 그린 벽화는 제목 그대로 ‘E.1027에 대한 낙서’였다.

이 일로 그레이는 격노하고 그와 절연했다. 자기가 설계한 집에 허락도 없이 멋대로 그림을 그려놨다면 그것을 보고 고맙다고 할 건축가가 어디에 있겠는가? 만일 그 주택의 건축가가 남자였다면 그의 집에 벌거벗고 유유자적하면서 낙서라며 벽화를 그릴 수 있었을까? 이것은 그레이가 당연히 화를 내고 절연할 것임을 계산한 행동이다. 그렇다면 르 코르뷔지에는 확신범이다. 베아트리츠 콜로미나 프린스턴대 교수는 이러한 그의 행동을 ‘E.1027’을 감시하며 대지를 점령하고자 한 것이라고 해석했으며, 그레이의 전기 작가 피터 애덤은 이 불법 벽화는 강간 행위와 다름없다고 비난했다.

그렇게 해석하는 데에는 증거가 많다. 그녀의 이름을 모를 리 없는 그가 “이 집에 그린 8개의 벽화를 헬렌(Helen) 그레이에게 거저 선물로 줬다”고 교묘하게 ‘헬렌’ 그레이라고 바꿔 신문에 당당히 밝히기까지 했다. 그녀의 이름을 지우기 위함이었다. 남의 작품에 대한 모독이 어떻게 거저 준 선물이 될 수 있는가? 게다가 르 코르뷔지에는 이 주택의 입구에 그린 벽화 옆에서 부인과 찍은 사진을 자신의 ‘전집’(1946)과 잡지 ‘오늘의 건축’(1948)에 게재했다.

이때도 그레이의 이름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그 주택을 ‘마르탱 곶에 있는 집’이라고 적음으로써 이 주택을 자기 작품으로 오인하기 좋게 만들었다. 결국 이 집은 그의 작품으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그는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이 일은 여성 가구 디자이너 샤를로트 페리앙(Charlotte Perriand)이 만든 유명한 의자를 자기가 디자인했다고 한 것과 똑같다. 이에 페리앙은 이렇게 비난했다. “나는 르 코르뷔지에와 같이 산 여자가 지적인 여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주택은 당시 그레이와 바도비치의 공동작품이라고도 하고 ‘바도비치 주택’으로 불리기도 했다. 바도비치는 이 집의 설계자가 르 코르뷔지에라는 세간의 오해를 해명하려고 하기는커녕, 스스로 일부는 자기가 설계했다고 선전하고 다녔다. 점차 이 주택은 르 코르뷔지에가 뒤에서 지도해 준 것이다, 아니다, 르 코르뷔지에의 작품이다, 또는 바도비치의 작품이라며 설계자를 오인하는 지경에 이르게 됐다. 그 결과 한 여성 건축가의 걸출한 주택 ‘E.1027’은 탁월한 여성 건축가에 대한 르 코르뷔지에의 질투, 그녀를 무시하는 르 코르뷔지에의 계산된 행위, 당시의 고루한 남성우월주의 때문에 건축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1956년 바도비치가 세상을 떠나자 독일군의 총탄을 맞은 흔적이 여기저기에 남아 있는 채로 이 주택이 경매로 나왔다. 이때 그리스의 해운왕 오나시스가 낙찰에 도전했다. 이에 이 주택을 사고 싶어 한 르 코르뷔지에는 재력이 있는 스위스 여성을 설득해 구입하게 하고 자기는 관리인이 되기를 자처했다. 그 후 이 주인은 마약중독자가 된 자기 주치의에게 팔았다. 그러나 이 의사가 치정 관계로 살해되면서 ‘E.1027’은 폐허로 남게 됐다. 그런데 이 집주인이 이런 글을 남겼다. “르 코르뷔지에는 전쟁의 기억을 남겨 두어야 한다며 나를 압박하며 하나도 고치지 말라고 했다.” 사실이라면 심각한 증언이다.

이 무렵 르 코르뷔지에는 숙박시설과 함께 ‘E.1027’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최소한의 주택으로 칭찬받는 오두막을 지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쩌면 이미 ‘최소한의 주택’으로 발표된 ‘E.1027’에 대한 르 코르뷔지에의 영리한 대응이었을지 모른다. 결과적으로 ‘E.1027’은 르 코르뷔지에의 또 다른 거실이 됐으며 바로 밑의 해안은 최고의 정원이 됐다. “이 오두막에서 사는 기분은 최고다. 나는 반드시 여기서 생을 마칠 것이다.” 이런 예견 때문이었을까, 78세가 되던 1965년 그는 ‘E.1027’의 바로 밑에 있는 바다에서 수영을 하다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김광현 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르 코르뷔지에는 왜 ‘E.1027’에 무단으로 벽화를 그리고, 이 집을 다른 이에게 사라고 권했으며, 집주인도 아니면서 전쟁의 흔적을 남기라고 하며 방치하고 4평의 오두막을 지은 것일까? 이런 행위는 모두 아일린 그레이의 걸작 ‘E.1027’을 지워버리는 것에 수렴한다. 이런 과정을 볼 때 ‘E.1027’ 바로 뒤에 지어진 거장의 오두막은 과연 “4평이면 충분히 행복하다”는 소박한 진실로만 이해하기가 어려워진다. 신화란 언제나 후대 사람이 만들어주는 법이기 때문이다.

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출처 - <지식카페>세계 유산 ‘4평 오두막’… 女건축가에 대한 ‘질투’로 탄생했다 :: 문화일보 munhw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