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와 건축 _ 영화로 읽는 소설 속 도시와 건축 <젊은 느티나무> 1968년 이성구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아니 그렇지는 않다. 언제나, 라고는 할 수 없다.”
이는 1960년대의 많은 여학생들에게 잊을 수 없는 소설의 첫 문장으로 당대 문학소녀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내용이다. 많은 곳에 이미 언급되었지만 특히 이 첫 문장은 이상(1910~1937)의 단편소설 「날개 (1936)」의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와 최인훈(1936~2018)의 중편소설 「광장(1960)」의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와 함께 삼대 유명한 소설의 첫 문장으로 알려져 있다.
「젊은 느티나무」는 1960년 1월 사상계에 발표한 강신재(1924~2001)의 단편소설이다. 소설 속 여고생 숙희는 느티나무가 있는 마을에서 어머니가 사는 서울로 이주한다. 숙희는 개가한 어머니의 새 남편인 경제과 대학교수 ‘무슈 리’의 아들인 물리학 전공의 대학생 오빠 현규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혼란한 감정을 느끼게 되고, 그것이 사랑임을 알게 되면서 겪는 갈등을 표현한 1인칭 소설이다. 소설에 “재작년에 서울에 도착했고…”, “나는 E여고로 전학을 하였다…”, “지난 해 4월에는 〈미스 E여고〉에 당선되었다” 등으로 묘사된 것으로 보아 여고생이 대학생이 된 후 변화하는 사랑의 감정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서는 스물네 살의 남성과 스무 살의 계집아이, 즉 숙희가 스무 살의 여대 1학년 전학생으로, 오빠 현규는 스물네 살의 수재 대학생으로 묘사된다.
영화는 1968년 3월 개봉했고 약 42,000명의 관객을 동원했다고 한다. 1968년 영화의 주연은 신성일(1937~2018)과 문희(1947~) 윤양하(1940~2021) 등이다. 타이틀 롤을 맡은 문희가 스무 살로 제 나이의 역을 연기했고 상대역인 신성일은 실제 나이 보다 어린 스물 네 살의 청년 연기를 했다. 안성기(1952~ )가 지수(윤양하 분)의 동생인 고교생으로 출연하며 마지막 아역을 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소설에 묘사된 마을이나 건축물 또는 실내 관련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는 성큼성큼 내 방으로 걸어 들어와 아무렇게나 안락의자에 주저앉든가, 창가에 팔꿈치를 짚고 서면서 나에게 빙긋이 웃어 보인다.”
“뽀얗게 얼음을 내뿜은 코카콜라와 크래커, 치즈 따위를 쟁반에 집어 얹으면서 내 가슴은 ….”
“오늘도 그는 그렇게 내 방에서 쉬고 나더니, 「정구칠까?」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옆집이라고 하는 것은 구왕가에 속한다는 토지의 일부분인 기실 집이라고는 까마득히 떨어져서 기와집이 두어 채 늘어서 있고 이족은 휘엉 하니 비어 있는 공터였다. 그 낡은 기와집에 사는 사람들은 이 공터를 무슨 뜻에선지 매일 쓸고 닦고 하여서 장판처럼 깨끗이 거두어 오고 있었다.”
“시무룩해 가지고 테라스 앞에 오면…(중략)… 그 안 넓은 방에 깔린 자색 양탄자, 여기저기 놓인 육중한 가구, 그 안에 깃들인 신기한 정적, 이런 것들을 넘겨다보면…(중략)… 그리고 주위에 만발한 작약, 라일락의 향기, 짙어진 풀내가 한데 엉켜 풋풋한 이 속에 와서 서면—”
“서울의 중심에서 떨어진 S촌 숲 속 환경도 내 마음에 들고, 무슈 리가 오래전부터 혼자 살아왔다는, 담쟁이덩굴로 온통 뒤덮인 낡은 벽돌집도 기분에 맞는다.”
“지수는 K장관의 아들이다. 언덕 아래 만리장성 같은 우스꽝스런 담을 둘러친 저택에 살고 있다. 현규랑 함께 정구를 치는 동무이고 어느 의과대학의 학생인데…(중략)… 지프차에다 유치원으로부터 고등학교까지의 동생들을 그득 싣고 자기가 운전을 하여 학교에 가곤 한다.”
“할머니한테 갔다 온다고 우겨 대어 서울을 떠났다.”
“날이면 날마다 나는 뒷산에 올라간다. 한 시간 남짓한 거리에 여승들의 절이 있다. 나는 절이란 곳이 싫었으나 거기를 좀 더 지나가면 맘에 드는 장소가 나타났다. 들장미의 덤불과 젊은 나무들의 초록이 바람을 바로 맞는 등성이였다.
바람을 받으면서 앉아 있곤 하였다. 젊은 느티나무의 그루 사이로 들장미의 엷은 훈향이 흩어지곤 하였다.”
여승이라고 표현된 비구니들의 조직은 1968년 이후 생긴다. “전국비구니회의 전신인 우담바라회가 1968년 1월 결성된 이래 마땅히 갈 공간 한 평 없어 조계사 구석 3~4평짜리 가건물에서 곁방살이하던 시절…” (출처: 불교신문-“비구니 스님의 어제와 오늘-현황” 2003.03.08)
영화에는 당시 서구의 많은 영화에 등장하는 기차 장면이 시작부에, 그리고 거의 뒷부분에 사용된다. 느티나무가 있는 외가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타러 가는 부분의 화면이 좀 더 자세하면 어느 마을에서 촬영했는지 알 것도 같은데 글자를 알아볼 수가 없어서 좀 아쉽다. 후반부에는 기차를 타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 광경도 있다. 당시 서울까지의 기차 삯 321원은 상당히 흥미로운 내용이다.
신형 새마을호 객차는 1968년 이후 스테인리스로 제작되었다. 그 이듬해인 1969년 중앙일보 “기차 삯과 담배 값”에 “정부는 스스로 경제의 안정기조를 흐리게 하는 공공요금 인상을 교묘한 수단으로 합리화함으로써 국민의 빈축을 사고 있다. 특급열차의 3등을 폐지하고 1·2등차만 운행키로 하였다는데 이는 사실상의 철도운임 인상을 꾀한 것으로서 첫날부터 승객들을 크게 당황케 하였다.”라는 기사(중앙일보, 1969.02.11)도 있다. 이 시기는 집중적으로 객차의 국산화가 이루어지던 때다. (출처: 한국철도 차량 100년사)
기차 외에 영화에 등장하는 자동차, 버스, 자전거 등의 탈것들을 살펴보자. 소설에서 동생들을 그득 싣고 다니는 지프차로 묘사된 지수의 차는 영화에서는 중형급의 클래식 컨버터블이다. 영화 <결혼 교실(Marriage classroom, 1970)>에 등장했던 자동차와 유사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포드 머스탱 1964년/1967년 모델인 듯하다. 1960년대 자동차와 관련해서는 다음이 흥미롭다. “1966년 1월 신진공업이 토요타와 기술 제휴를 맺고, 신진자동차공업(주)로 사명을 바꿨다. 그리고 차관을 바탕으로 근대화된 조립공장을 건설해 토요타의 1,500㏄급 코로나를 CKD(complete knock down, 완전 분해해서 수입)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1967년에는 중형급의 크라운을 생산….” (출처: 자동차의 역사 – 1960년대 한국의 자동차 http://www.motorian.kr/?p=5391)
대학생들이 단체로 대관령으로 스키를 타러 가는 버스는 경남관광버스인데 화면에 전화번호를 여러 번 확대해서 보여준다. 요즈음 말로 하면 제품의 간접광고(PPL: product placement)라 할 수 있겠다.
영화에서 서울 거리는 “처음 보는 서울 거리, 그 큼직큼직한 건물들과 복잡한 거리…”라고 묘사된다. 뒤에 지수가 자동차에 숙희를 태우고 가는 서울 거리는 양 옆에 줄지어 보이는 간판들이 아주 흥미롭다. ‘건축자재, 부동산 공사, 목재상사, 건축자재사, 명성 공업사, 건설건재, 삼성 후형 스레트’ 등 그 사이에 ‘범아건축설계사무소’라는 간판이 있다.
같은 해 대한건축사협회 소식에는 회원 동정에 ‘사무소 이전, 결혼, 회원가입, 사무실 명칭변경, 위원위촉, 면허 취소 및 분소 설치’ 등의 기사가 있는데 여기에 범아 건축, 삼미 건축설계사무소, 조자룡 건축사무소 등이 회원가입한 것으로 나와 있다. (출처 : 1968년 5월 <건축사> 협회소식)
전쟁 복구와 개발의 필수적인 산업들-건축자재와 부동산 간판이 줄지어 있는 거리 풍경…. 이들은 전형적인 개발도상국의 거리 풍경이다.
밤거리에 보이는 삼각형의 OB맥주 간판, 그리고 다방 풍경….. 다방에서 지수와 숙희가 마신 진 피즈(Gin Fizz). – 2020년 IBA (International Bartender Association)의 공식 칵테일인 진 피즈는 피즈 스타일의 칵테일 중 하나이자 가장 유명한 칵테일이라고 한다. ‘피즈’란 미국의 유명 바텐더 제리 토마스(Jerry Thomas)가 정립한 스타일로, 스피리츠에 탄산과 레몬주스, 설탕을 더해서 만든 것을 말한다.
등장하는 건축물 중 괄목할 만한 집은 소설 속 “서울의 중심에서 떨어진 S촌 숲 속”의 “담쟁이덩굴로 온통 뒤덮인 낡은 벽돌집”이다. 낡은 벽돌집은 영화에서는 삼각형 뾰족 지붕을 한 석재로 마감을 한 멋진 집으로 그 삼각형 지붕 아래엔 숙희의 방과 현규의 방이 있다. 사실 영화 속 이 댁은 당시 설계를 해서 지은 집으로 판단되나, 어느 건축사의 설계인지 가늠이 안된다(혹시 알고 있는 분들은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소설 속 안락의자로 묘사된 흔들의자(Rocking chair)가 방에 있고, 여닫이 방문에 끼워 넣은 반투명 유리창 디자인은 눈 목(目)자 파자(破字)를 하나 아니면 둘이나 셋을 결합하여 고창인 란마(欄間らんま) 디자인에 쓰이던 달 월(月)의 파자(破字)를 응용한 것으로 보인다. 거실엔 육중한 고급 서양식 가구들이 중앙에 자리하고, 한편으론 전통적인 사방 탁자 등도 그대로 있다.
현대화된 가구와 일부 전통 가구를 함께 배치했듯이 등장인물들의 의상도 숙희의 어머니(주증녀 분)는 한 복에 비단 배자를 곱게 입고 젊은이들은 1960년대 문화를 대변하는 경쾌한 차림이다. 지식인의 외모를 한 무슈 리(박암 분)는 파이프를 들고 있다. 식탁에서도 현대화된 식사차림이기는 하나 밥주발과 국사발 크기는 여전했고, 그릇들은 전통적인 사기로 보인다. 소설이 발표된 것이 1960년인데 집에 냉장고가 있고 코카콜라, 치즈, 크래커를 꺼내 먹는 것으로 보아 경제적으로 상당히 넉넉한 집으로 묘사된다. 모차르트를 듣는 문리과대학 물리학 전공의 현규, 그리고 테니스를 잘 치며 연애편지도 멋지게 쓰는 현규 친구이자 졸업 후 도미 계획을 하고 있는 의과대학생 지수. 지수는 소설에서는 K장관의 아들로 묘사되고, 영화에서는 재벌가의 아들로서 티를 내지 않는 상당히 괜찮은 젊은이로 묘사된다. 지수의 집은 우스꽝스러운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대저택이라고 소설에 묘사되어 있으나 영화에는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이들은 테니스를 치는데(소설에서는 정구를 친다고 되어 있다), 네트를 울러 메고 와서 설치를 하고 복식으로 테니스를 친다. 여중생 때 같은 반에 아버지는 공직에 계시고 오빠가 셋인 친구가 있었다. 아버지와 오빠들 넷이 복식 테니스를 한다고 여러 번 말해서 언니 오빠가 없는 나는 그게 너무 부러웠다.
영화 속 여주인공이 다니는 석조 아치로 된 청운여대의 교문을 보면 아마도 지금의 ㄱㅎ 대학이 아닌가 한다. 당시 ㅇㅅ 대학, ㅎㅇ대학 등은 학생들이 자동차를 가지고 다닌 경우가 종종 있었고, 많지는 않았지만 부모와 함께 골프를 치는 학생들도 더러 있었다. 여고생 시절 남학교와 함께 하던 봉사단체인 클럽 회원 중 중학생 때부터 골프를 하던 남학생 선배 하나가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그 대학총장 골프 코치를 하던 것이 기억난다.
영화 속 현규를 비롯한 대학생들은 단체로 경남관광 버스로 대관령에 스키를 타러 간다. 리프트가 없던 시절이라 옆으로 걸어서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활강으로 내려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강원도 대관령 스키장은 1953년 건설되었다. 등 뒤의 번호판을 보면 1967년 2월 평창군 대관령면 지르메 제1 슬로프에서 열린 제48회 전국체육대회 동계스키대회 광경과 오버랩된다. (참조: 대한뉴스 610호 대관령 스키대회)
이들은 캠프파이어를 하며 당시 풍미하던 트위스트 음악과 춤으로 즐겁게 논다. 트위스트는 미국을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 트위스트 열풍을 일으킨 락앤롤 가수 처비 체커(Chubby Checker, 1941~)의 곡 트위스트(The Twist)에 맞춰 춘 춤의 일종으로 1960년대에 미국에서 시작되어 전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발목 부분으로 균형을 잡고 가슴, 허리, 팔을 좌우로 움직이는 형태의 춤이다.
영화 <반도의 봄(1941)>, <시집가는 날(1957)>, <자유결혼(1958)> 등의 감독 이병일 (1910~1987,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영화를 공부)의 동생인 이성구 감독(1928~2005)은 지난 호에 소개한 그의 대표작 <장군의 수염(1968)>으로 이듬해인 1969년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분 작품상 및 감독상을 받았다. 그의 아내는 김기영 감독(1919~1998)의 <하녀(1960)>에서 하녀 역을 연기한 이은심(서옥선 1935~, 1960년 제1회 한국최우수영화상 신인상 수상)이다. 그들은 1982년 브라질로 이민을 갔으며 이성구 감독은 그곳에서 타계했다. 원작을 각색한 나한봉(1933~2015)은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시나리오 작가 가운데 한사람으로, 대표작인 <초우(1966)>, <메밀꽃 필 무렵(1967)>, <아리랑(1968)> 등 약 70여 편의 시나리오가 영화화되었다. 영화 음악은 ‘행군의 아침’, ‘가고파’, ‘뱃노래’, ‘수선화’, ‘진달래꽃’ 등 수 많은 가곡을 작곡한 김동진(金東振, 1913~2009)의 곡이다. 그는 백치 아다다 등 영화음악도 많이 남겼다. 1968년, 여중생일 때 작문을 가르치시던 은사님인 시인 김영삼(1922~1994)으로 부터 군가 1번 ‘행군의 아침’을 6.25전쟁 피난길에 기차 안에서 작사하고 거기에 곡을 붙인 분이 김동진 선생님이라고 누누히 들었던 기억이 난다. (출처: 한국영상자료원)
다음 호는 일본 문필가 모리 오가이 (1924~2001)의 장편소설 「기러기 (1911~1913)」를 토요타 시로 감독의 1953년 필름으로 다룬다.
* The Wild Geese-雁, がん, GAN – (film 1953 directed by Toyoda Shirō 豊田四郎 /a 1915 [1911-1913] Novel by Mori Ōgai 森鷗外 [1862~1922]) 상영시간: 104 minutes
글. 조인숙 Cho, In-Souk 건축사사무소 다리건축
조인숙 건축사·건축사사무소 다리건축(1986~ 현재)
·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건축학과 졸업(공학사)
·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건축학과 석사/박사
· 건축학 박사(역사·이론–논문: 한국 불교 삼보사찰의 지속가능한 보전에 관한 연구)
choinsouk@naver.com
구성_대한건축사협회 편집출판국
@월간 건축사 2022년 5월호 / vol.637 / kiramonth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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