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과 나무를 찾아서] <42> 밀양 금시당 은행나무
흐르는 강물 벗 삼아 찬란한 천년의 삶 꿈꾸다
도시에서는 건물 높이가 자고나면 더 높아진다.
건물에 가려 산도 아래로 내려가 작아지고 강도 보이지 않고
하늘도 조각조각 나있다.
그 속에서 밤에 잠들고 아침에 일어나니
자연의 위대함 속에 우리가 깃들어 산다는 진실은
사람이 만든 일상의 빼곡한 사실에 밀려나 잊혀진다.
노랗게 물든 잎에 스며든 환희와 고독
바람에 일렁이는 자유롭게 뻗은 가지
산중 호랑이 마주보는 듯한 광채가…
밀양시 용활동으로 들어서면 굽어 흐르는 밀양강을 건너
산자락에 금시당 백곡재가 보인다.
금시당은 조선시대 문신인 금시당 이광진 선생이 만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산수와 함께 조용히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처음 건물은 임진왜란에 불타고 5대손인 백곡 이지운 선생이 복원을 하였다.
그 옆에는 같은 크기의 건물로 백곡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이 지은 백곡재가 있다.
밀양강 건너편에서 바라보면 금시당과 백곡재는
완만한 산자락 큰 나무들 사이에 깃든 새집처럼 소담하다.
작아도 만족한 낯빛.
도시의 마천루는 끝없이 높아도 끝없이 배고파 보인다.
무릇 광활한 자연 속에서 사람의 처소는 이처럼 낮은 것이 본래 모습인 것을.
그것을 깨달으나 참 먼 울림으로 느껴진다.
우리는 '길을 잘못 들어' 너무 멀어졌기에.
돌아가자!
전원이 장차 황폐해지려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
(…)
실로 길 잘못 들긴 했으나
아직 멀리 벗어나지는 않았으니
지난 것 잘못 되었음에 지금부터라도 바르게 하리라
금시당이란 호는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따왔으니
자연과 더불어 지금부터 바른 길을 가겠다는 그의 의지가 단호하게 읽힌다.
소박한 금시당 옆에 거대한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어 강 건너에서 보니
한 발 더 먼저 눈에 들어온다.
자유롭게 뻗은 가지들이 바람에 무겁게 일렁이는 것이
산중의 누런 호랑이가 내려와 옆구리 실룩거리며 마주 보는 것 같은 광채가 아닌가.
그렇다. 호랑이 눈빛 같은 불을 켜고 이 11월의 지상은
곳곳마다 은행나무들로 하여 환하다.
늦가을 커다란 은행나무가 몸을 사르듯 물든 모습과
그 노란 잎들이 일시에 찬란히 떨어져 금빛 융단을 굴리는 광경 속으로
들어가기를 나는 좋아한다.
은행나무의 노란 잎에는 환희와 고독이 함께 있다.
어느 날 환하게 밝아져 하늘로 두어 뺨쯤 들어 올려진 은행나무를 보면
그런 느낌을 받는다.
찬란한 고독.
다른 나무들은 한 집안 일가친척이 되는 나무들을 여럿 가지고 있는데
3억 년 전에 지구상에 나타나 석탄기와 빙하기를 살아낸 은행나뭇과에는
오직 은행나무 한 종만이 있다.
은행나무의 거대한 몸은 그래서 더 고독하게 보인다.
환하게 물든 은행나무를 알맞게 찾아가는 것은
봄꽃 시기를 맞추는 것처럼 어렵다.
지역마다 기온 차이가 나고 햇빛을 받는 양이 다르기에 그렇다.
은행나무는 물든 잎이 절정이 되면 하루 사이에도 잎을 다 떨어뜨린다.
잎이 끊임없이 떨어져 제 그늘을 덮을 때는 그 소리가
소나기 소리 같다고 한다.
한 발 늦게 도착하면 빈 가지만 서운하게 보게 된다.
나는 이미 마음을 두고 있던 두어군데 은행나무의 가을을 놓치고
밀양 금시당으로 길을 잡은 것이다.
금시당 뒤편으로는 보수공사를 하고 있다.
지금은 물길이 줄어 마른 바닥이 드러난 밀양강을 뜨락같이 내려다보는 자리,
본래 있던 자연들을 동무하여 그 아래 소박하게 지어진 금시당 마루청에 앉아본다.
정원에는 오래된 매화나무가 눈높이로 보인다.
이른 봄날 집안을 은은히 감돌 매향을 짐작해본다.
보기 귀한 백송나무도 있다.
금시당 선생이 손수 심었다는 은행나무는
지금 막 노란 잎을 느리게 떨어뜨리고 있다.
옛날 중국에 공자가 제자들에게 학문을 강론하던 단을 행단(杏壇)이라 하였는데
우리나라에도 서원이나 향교에 은행나무를 심어 학문하는 분위기에 무게를 더했다.
이곳에 은행나무를 심은 선생의 마음도 그러했으리라.
어디에서든 큰 나무를 보면 그 나무를 심던 첫날의 손길이 생각난다.
나무 밑 흙을 다독이고 조심스럽게 물을 주며 나무에 사람의 꿈을 새기던 날,
흙냄새, 나무 냄새, 생명의 냄새 물씬한 첫날이.
하나도 바쁠 것 없던 날의 소박한 자족이.
사람들과 함께 450년의 역사와 고독을 살아낸 나무다.
나무는 오랜 날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벗하고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며 웅장하게 자라났다.
천년을 사는 은행나무로서는 지금 한창인 장년의 나이라 하겠다.
금빛으로 물든 나무는 푸른 잎도 조금 남아있어 일주일쯤 후면 몸을 열어,
가을이 찬란히 무너지는 날이 오겠다.
(글 출처 : 이선형·시인. 부산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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