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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는 이야기 ■/매화 기행

매화-2021-021. 담양 계당매 (2021.03.21.)

 

 

 

 

 

 

 

021.  담양 계당매 (2021.03.21.)

 

 

담양군 남면 지곡리 가사문학관 뒤

지실마을 계곡 안쪽에 계당溪堂이라는 정자가 있다

송강 정철 선생의 네째 아들 정홍명 선생이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서, 지실마을 만수동에 터를 구입하고

자신의 거처로 삼은 집인데, 개천 위에 지은 집이란 의미로

곧 계당溪堂이라 불렀다

 

이 계당 앞에는 수령 400년이 넘은 홍매와 옥매가

각각 한그루씩 있는데 <계당매溪堂梅>라고 불린다

그렇지만, 백매가 홍매보다 항상 일주일 이상 일찍 꽃을 피워

같이 만개한 모습을 보기는 쉽지 않다

 

지실마을 <계당매溪堂梅>

집을 지으면서 같이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데

현재는 사람이 살지 않아 관리도 부실하고

수세도 많이 빈약한 편이다

그렇지만 송강 정철 선생의 가사문학의 향기와 역사가 배여 있고

고매로서의 품위가 살아 있는 나무이다

특히, 호남을 대표하는 호남 5湖南五梅의 하나로서

담양을 대표하는 매화이다

 

 

 

 

 

 

 

 

 

무등산 가사문화권에 있는 지실마을은 송강 정철 시인이 청소년 시절을 보냈던 그의 정서적 고향이다.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 시인은 아버지 정유침과 어머니 죽산 안씨 사이에 43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유년시절은 비교적 화려한 편이었다. 위로 큰 누이가 인종의 귀인이었고, 셋째누이가 계림군과 혼인하는 등 왕실과의 인연으로 궁중을 자주 출입하였고 후에 명종이 된 경원군과는 소꼽친구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송강이 10살이 되면서 그 해 을사사화가 있었다. 이 사건으로 송강의 자형인 계림군은 역적으로 몰려 능지처참의 비운을 맞았다. 송강은 나이가 어려 아버지의 유배지를 따라다니다가 16살이 되면서 아버지의 유배가 풀리자 담양 창평으로 역시 아버지를 따라 내려왔다.

 

그 해 여름, 송강은 역시 을사사화에 순천 처가로 은둔한 형 정소를 민나러 길을 나섰다가 환벽당 아래 증암천(甑岩川)에서 목욕을 하던중 환벽당의 주인이었던 사촌 김윤제(紗村 金允悌 1501-1572)선생을 만나게 된다. 사촌은 을사사화로 세상이 어수선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정자를 지어 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더위에 지쳐 오수를 즐기던 중 냇가에서 용이 승천하려는 이상한 꿈을 꾸게 되었다. 꿈이 하수상하여 일어나 냇가를 살피던 중에 목욕하던 소년을 발견하고 불러 자초지종을 문답했다. 이런 인연으로 사촌선생의 보살핌을 받으며 뒤늦은 공부를 시작하였고 17세에는 역시 사촌선생의 주선으로 그의 외손녀 문화 유씨와 혼인하였다. 그리고 26세에 진사시험에 장원한데 이어 27세에 별시문과에도 장원하여 한양으로 진출한다.

 

그러나 성품이 곧고 강직했던 송강은 동서당쟁東西黨爭에 휘말리게 되면서 파란만장한 정치인의 생을 살면서 벼슬을 버리고 네번이나 낙향을 한다. 그 낙향이 모두 창평이었다. 창평은 그를 성장시켜주었던 정서적 고향으로 마음의 상처를 치유받는 가운데 작품활동에 정진하여 주옥같은 수 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그가 창작한 순수한 우리글의 작품들 성산별곡, 사미인곡思美人曲과 속미인곡續美人曲, 관동별곡關東別曲, 장진주사將進酒辭 등 가사작품들은 세종대왕이 창제 반포한 훈민정음이 널리 쓰이게 되는 업적을 낳게 되었다

 

무등산 가사문화권은 무등산 정기를 받고 성장하여 조선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받게 된 송강의 이야기와 함께 관련 문화유산들이 산재하고 있다. 우선 송강이 공부하던 환벽당(環碧堂, 광주광역시기념물 1)이 있고, 성산별곡(星山別曲)을 지었던 식영정(息影亭, 국가명승 57)이 있으며, 많은 문인들이 교류하던 양산보 선생의 소쇄원(瀟灑園, 국가명승 40)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