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창홍 : 이름도 없는 ]
전시기간
2019-09-05 ~ 2019-12-04
전시장소
도립미술관 1,2층 전시실
참여작가
안창홍
전시소개
경남도립미술관은
지역 출신 작가에 대한 집중적인 고찰의 기회를 마련하고자
매년 ‘지역작가조명전’을 개최해오고 있다.
2019년도에는 경남 밀양 출신으로 1세대 민중미술 작가이자
우리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과 특유의 표현력으로
한국화단에서 특별한 존재감을 지니는
안창홍(1953- )의 최근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안창홍 : 이름도 없는>>전을
진행한다.
전시 제목으로 사용된 ‘이름도 없는’은
작가가 최근 발표한 회화 연작의 제목이자
지난 40여 년간 작품의 주제가 되어온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채 살아가는 사람들과
역사 속에 희생되고 사라진 이들을 의미한다.
안창홍은 제도적인 미술 교육을 거부해 대학을 다니지 않고
일찍부터 작품 활동을 하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하였다.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역사 속 한 부분으로써
자신의 비극적인 가족사를 담은 <가족사진>,
인간의 폭력성과 인간성 상실의 문제를 다룬 <위험한 놀이>,
민주화 운동과 군부독재의 실상을 그려낸 <새> 연작들을 발표한 안창홍은
당시 민중미술 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현실과 발언’에 동참하게 되는데,
이때의 활동 이력은 많은
이들이 안창홍을 민중미술 작가로 인식하게 하였다.
하지만, 주로 사실적이고 서사적인 표현방식을 통해
한국의 근현대사와 같은 거대담론을 이야기하던 작가들과 달리
안창홍은 개인의 삶을 통해 그 시대와 상황을 이야기하고자 하였다.
특히, 약자 혹은 소수자인 사람들에 대하여 주목한 안창홍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여인, 남자, 여장 남자, 청춘, 사랑 등을 소재로 한
다양한 연작들을 발표하며 자본주의 사회의 어두운 현실을 담아냈다.
그리고, 2000년대 빛바랜 사진을 바탕으로 작업한
<49인의 명상>과 <봄날은 간다>,
주변 인물들을 모델로 섭외해 그린 소시민들의 누드 <베드 카우치> 등
굵직한 회화 연작들을 통해 개인의 역사를
시대와 사회의 역사로 확장시켰다.
회화작업 외에도 사진, 드로잉, 조각 등
변화 있는 조형세계를 추구해온 안창홍은
최근에 거대한 가면을 모티프로 한 부조와 대형 입체작품들을
집중적으로 선보여 오고 있다.
작가는 1980년대부터 테라코타, 나무 조각 등
작은 입체작품들을 만들며 입체작업에 대하여 다양한 시도를 해왔는데,
2016년 이후 이러한 작업에 대한 열망이
집약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언뜻 보면 회화에서 입체로의 형식적인 변화가 커 보이지만,
안창홍의 입체작품은 FRP(유리섬유로 강화된 플라스틱)로 제작된
얼굴 형태에 페인팅을 한 것으로 캔버스가 입체로 옮겨갔을 뿐
회화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가면의 이미지와 가려지거나 텅 비어 있는 눈과 같은 표현들은
그동안 회화작품에서 인물을 표현했던 것과 유사한 맥락에 있다.
2차원의 화면에서 3차원으로 입체감과 공간감을 확보한 안창홍의 인물 초상들은
나아가 특정 개인의 초상이 아닌 집단적 군상을 이루며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눈을 뜨고 있지만
진실을 보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모순을 더욱 더 아프게 드러낸다.
경남도립미술관은 이번 전시에서 이러한 입체작품을 비롯하여
작가의 최근 작품세계를 학술적으로 연구하고 조명해 보고자 한다.
전시에는 본 전시를 위해 새롭게 제작된
대형 입체작품들과 부조, 회화작품 등 130여점이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2009년 부산시립미술관에서 개최한 개인전 이후
10년 만에 국공립 미술관에서 개최하는 개인전이자
작가가 생애 가장 행복했던 유년 시절을 보낸 고향에서 개최하는
첫 번째 대규모 전시이다.
안창홍의 작품들은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다양한 연작으로 발표되어왔지만,
그 근저에는 항상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채 살아가는 인물들과
역사 속에 희생된 이들에 대한 시선이 자리하고 있다.
40여 년 동안 일관되게 이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오고 있는 안창홍의 작품들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시대와 현실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기를 바란다.
(이하 글출처 : 홈페이지)
[ 도큐멘타 경남 l - 기록을 기억하다 ]
전시기간
2019-09-05 ~ 2019-12-04
전시장소
경남도립미술관 3층 4,5전시실
참여작가
강신석 등 6명
전시소개
Documenta Gyeongnam I - Remembering the Record
경남도립미술관은 개관 15주년을 맞이하여
경남의 근현대미술을 조명하는 아카이브 전시를 개최합니다.
이번 전시는 1950년 한국 전쟁 후 창원을 중심으로 펼쳐진
예술활동을 소개합니다.
당시 창원, 마산, 진해로 구분되어 있던 이곳은
낙동강 방어전선 내부에 자리했기에 전쟁의 상흔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자연스레 전국의 피란민이 모이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전쟁의 참사 속에서 창원은 역설적이게도
문화예술활동이 활발하게 펼쳐졌습니다.
1955년 전국 최초로 가두 전시를 연 ‘흑마회’는 마산 미술의 전설로 회자됩니다.
마산항의 발달로 외교구락부, 콘티넨탈다방, 백랑다방, 비원다방 등
다방문화가 전성기를 맞이했으며,
유택렬 화백이 운영한 ‘흑백다방’이 진해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유택렬 화백의 따님이 ‘문화공간 흑백’이라는 이름으로 운영 중입니다.)
1956년에는 마산종합문화제가 예술인들의 자발적 노력으로 개최되면서
시민과 함께하는 예술을 실천했습니다.
또한 한국 전쟁 과정에서 미국공보원인 USIS가 창원에 자리 잡았고,
리버티 뉴스와 문화영화 등을 만드는 상남영화제작소가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1950년대 창원은 명실공이 예향의 도시였고
한국영화의 메카였습니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1950년대 전시되었던 많은 작품들이 소실되어
현재는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있다하더라도 지금으로서는 그 소재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기록은 남아 있었습니다.
신문의 기사와 당시 행사 리플릿, 책자, 그리고 리버티 뉴스 등을 찾았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당시의 기록을 더듬어 그 때의 기억을 만들어 봅니다.
이 기억은 분명 부분적이고 파편적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렇게 시작하여 더 많은 기억을 만들어 가볼까 합니다.
또 하나의 증인, 전쟁미술 – 종군화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전투가 치열해지는 가운데
예술인들을 중심으로 한 단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제일 먼저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일명 문총)가 문인들을 중심으로
‘문총구국대(文總救國隊)’를 결성하였습니다.
국군의 사기진작을 위한 단체였습니다.
미술계에서는 전쟁의 참사를 기록하는 전쟁화,
전투 소식과 사기진작을 위한 삽화 및 포스터를 제작하는 ‘종군화가단’이
조직되었습니다.
국방부의 요청으로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화가 단체이기에
느슨한 형태의 조직으로 존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51년 1.4. 후퇴 이후 공식 발족하여
국방부 정훈국 소속의 종군화가단, 해군 종군화가단, 공군 종군화가단,
광주 종군화가단 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경남에서는 강신석, 류시원, 문신, 양달석, 이준, 임호 작가 등이
종군화가로 활동했습니다. (전시는 주로 부산에서 이뤄졌습니다.)
특히 문신 작가의 경우 1950년 전쟁 발발과 함께
프락치로 몰려 사형을 언도받기도 했는데 우여곡절 끝에 석방되어
종군화가로 활동했습니다.
이 경우 종군화가는 ‘빨갱이’가 아님을 증명하는 하나의 수단이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국민보도연맹원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허다했기에,
화가들이 종군화가로 활동하는 건 생존을 위한 전략이기도 했습니다.
감사하게도 그 덕분에 우리는 당시 전쟁의 상흔을
작품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거리로 나간 예술 – 흑마회, 마산종합문화제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한국사회는 재건사업에 돌입했습니다.
기반시설의 재건은 물론 삶에 필요한 수많은 것들을 새로 만들어야했습니다.
예술가들은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했고 예술의 재건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수도권에서는 미술계 내부 조직을 강화하는 경향을 보이는 반면
마산에서는 시민과 함께 하는 예술활동을 실천하는 노력이 엿보입니다.
예컨대 1955년 마산에서는 ‘마산문화협의회’(가칭)가 창설됩니다.
협의회 창설에 주도적이었던 안윤봉 선생은
“과거의 일부 동호인에 국한되었던 고답적인 문화운동을 배제하고
일반 대중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실로 민주적 민족문화의 찬란한 개화”의 필요성을
신문에 기고하기도 했습니다.(마산일보, 1955년 9월 11일)
같은 해 미술계에서는 ‘흑마회(黑馬會)’라는 단체가 결성됩니다.
마산문화협의회의 미술분과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흑마회는 1955년 10월 26일 당시 마산저축은행(현 제일은행) 광장 벽면에서
가두전시를 개최합니다.
회화를 야외에서 전시하는 전국 최초의 전시였다고 합니다.
회화를 야외에서 전시하는 건 사실 지금도 어려운 일입니다.
작품 보존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흑마회는
“조형예술의 대중화”(마산일보 1955년 11월 3일)를 외치며 가두전시를 강행했습니다.
첫날 1,500명 다음날 2,000명의 관람객이 몰렸다고 하니
목적한 바를 충분히 이뤘다고 볼 수 있습니다.
1956년에는 마산문화협의회 주최로 ‘마산종합문화제’가 개최됩니다.
미술은 물론이고 다양한 장르의 예술이 총출동하는 축제였습니다.
제1회 마산종합문화제 리플릿 내용을 보면
문학, 미술, 음악, 무용, 연극, 변론, 과학, 사진, 가장(행렬 경연대회),
농악, 체육, 고전, 영화, 출판 등이 모두 참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김수돈 선생에 의해 연극 경연대회가 당시 국제극장에서 실연되고
USIS(미공보원)가 주축이 되어 문화영화가 상영되었다는 점은
눈여겨볼만한 사건입니다.
이렇듯 당시 창원은 미술뿐만 아니라
예술전반에 걸쳐 무척 왕성한 활동이 있었음을 우리는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문화예술아지트 – 다방(茶房)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전국적으로 문화예술시설이 부족해졌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다방이 종합예술의 장소로 두각을 나타내게 됩니다.
부산에서는 광복동을 중심으로 수 십 개의 다방이 운영되었으며
예술문화 아지트는 물론 피란민들의 공동 연락처 역할까지 수행했다고 합니다.
창원에서는 구마산과 신마산 일대에 다방이 집중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다방에서는 미술전람회는 물론 시화전이 자주 열렸습니다.
1953년 11월에는 백랑다방에서 김춘수 시인의 시와 강신석 화가의 그림이
어우러지는 시화전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마산일보 1953년 11월 15일)
대표적인 개인전을 언급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림 개인전(백랑다방, 1957), 전혁림 미술전(백랑다방, 1956),
문신도불전(일신다방, 은하수다방, 콘티넨탈다방, 신신다방, 1959),
박생광 동양화전(외교구락부, 1958), 한묵도불전(콘티넨탈다방, 1961).
다방에서는 미술관련 행사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림 전시회가 바탕이기는 했지만 문학의 밤, 영화의 밤, 출판기념회,
환영회나 송별회, 동창회 등 다양한 형태로 다방이 이용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다방은 당시 사회문제였던 고등실업자, 즉 룸펜의 온상으로 여겨져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1957년 마산일보 9월 29일자에는
<다방이란 이름의 집합소 - 형々색々의 출입자>라는 기사가 실렸는데,
다방이 조용히 환담하고 분위기를 즐기는 문화공간이기도 하지만
“교양과 정적을 잃어버린 곳”이 되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다방은 전시나 공연을 할 장소가 없는 예술가에게
매우 소중한 공간이었습니다.
전용전시공간이 아니어서 크기가 작은 작품을 전시할 수밖에 없었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작품들이 만들어지고
전시되고 팔리고 했으니,
다방의 가치는 충분한 것 같습니다.
한국영화의 메카 – 상남영화제작소
미술관 전시에 뜬금없이 영화가 왜 등장했지?
의문을 가질 분들이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대미술이 시각예술의 차원에서 통용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전혀 어색한 일은 아닙니다.
영화는 예나 지금이나 일반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어 가장 쉽고 빠르게
그 내용을 공유할 수 있는 시각예술매체입니다.
영화는 그것을 소비하는 대중을 이해하고
나아가 당시 사회를 파악할 수 있는 유용한 매체입니다.
1950년대에 창원에 ‘상남영화제작소’가 존재했고
이곳이 한국영화의 메카였다는 사실은 참 뜬금없어 보입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미공보원(USIS)는 부산을 거쳐 진해에 도착했는데,
이후 창원군 상남면 용지리(현 창원시 중앙파출소 부근)에 자리잡게 됩니다.
USIS는 1952년부터 본격적으로 문화영화와 ‘리버티뉴스’를 제작하는데
리버티뉴스는 총 721호(1952-1967), 문화영화도 수 백 편을 제작했다고 하니
실로 놀라운 일입니다.
당시 리버티 뉴스가 워낙 유명해서
USIS의 영화제작부를 ‘리버티 프로덕션’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정식 명칭은 상남영화제작소였습니다.
상남영화제작소는 시설 또한 매우 뛰어났다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원고실, 번역실, 미술실, 음악실, 녹음실, 편집실, 현상실,
자동인화실, 전기실, 그리고 건조실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성철 저, 『경남지역영화사 – 마산의 강호 감독과 창원의 리버티늬우스』,
호밀밭출판사 참조)
지금 상남영화제작소는 그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지만
여러 기록을 통해 그 존재를 확인할 수는 있습니다.
전시실 곳곳에 소개되는 과거 영상은 대부분 상남영화제작소에서 만든 영화입니다.
1959년 <문신 도불 미술전> 영상과
<제4회 마산종합문화제> 영상 모두 리버티뉴스의 일부분입니다.
마산의 풍경과 시대상을 파악할 수 있는 <지방신문편집자> 역시
상남영화제작소 작품입니다.
이 영상들은 창원의 예술문화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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