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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건축 갤러리 ■/경 북

성주 한개마을 - 월곡댁 (2018. 03. 01.)

















한개마을 월곡댁


 

월곡댁은 이진희의 부인이

초전면 월곡동에서 시집왔다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1911년에서 1940년까지 건립해 한개마을의 가옥 중에서 늦게 만들어진 편이다.

 안채, 사랑채, 별채,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안채와 앞쪽의 별채 사이에

 샛길처럼 좁고 긴 공간이 형성되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건물마다 기단이 높고 아름다운 돌로 쌓았는데 기단이라기보다는

지형의 기울기를 받아들이기 위한 석축으로서의 의미가 크다.

 

사랑채에서는 중문을 거치지 않고 안채에 들어갈 수 있지만

별채에서는 중문채를 거쳐야만 안채로 출입할 수 있다.

별채는 안채 앞쪽에 세웠는데 사방이 담으로 막혀 있어 폐쇄성이 매우 강하다.

 일반적으로 한옥에서는 채의 앞뒤로 개구부가 설치되나

별채의 뒤쪽 벽에는 개구부가 전혀 없다.


별채가 이렇게 설계된 데는 주인의 의도가 배어 있다.

처음에는 별채에 주로 분가하지 않은 자녀들이 거처했으나

이진희의 손자 대에 와서 완전히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가 소실을 들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치는 공간 구성의 절대적인 지침,

그중에서도 사당의 위치를 어긋나게 만든다.

 

한개마을의 특징 중의 하나는 사당, 정자, 재실 등

선조를 기념하는 건축물이 10동이나 된다는 점이다.

현재는 8동 남아 있는데 한 마을에서 이렇게 조상을 기념하는 건축물이 많은 곳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이들 기념물의 배치가 다소 예외적이다.

 

집의 동쪽에 있는 진입로로 들어가는 한주종택은

사당이 안채의 동쪽에 위치하지만 서쪽으로 진입하는 교리댁, 북비고택, 월곡댁 등은

사당이 사랑채 뒤나 안채와 사랑채 사이의 뒤쪽에 있다.

한개마을 양반집에서 이처럼 유교의 전통이 무시된 이유는

건물의 공간 구성 때문이다.

 

한개마을에서 여성의 공간은 은닉, 즉 감추는 것을 기본으로 했다.

집 안에서 볼 때 가옥의 진입은 왼쪽이나 오른쪽이 기본이며

주택에서 가장 안쪽에 놓이는 것은 안채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깊숙이 숨겨진 곳이

 부엌이었다. 이는 부엌의 위치가 동향이나 서향으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집으로 진입하는 샛길이 어느 쪽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졌다는 뜻이다.

이때의 원칙은 부엌을 진입로에서 가장 먼 곳에 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럴 경우 사당을 어디에 놓느냐에 문제가 생긴다.

만약 사당을 전통적인 방식대로 오른쪽에 놓는다면 제사의 주인공인 남자가

여성 영역인 안채를 거쳐 사당으로 가야 하는 불편함이 생긴다.

한개마을 선비들이 이런 내용을 모를 리 없었다.

결론은 교과서인 주자가례의 방침이 아니라 현실에 맞는 선택을 하는 것이었다.

이는 주거자들이 불편하지 않은 실생활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글출처 : 이종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