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천 년의 고도 경주시내에서
포항 쪽으로 20km쯤 올라가면 드넓은 안강널이 나타난다.
‘건강하고 편안함’을 기원하는 주민들의 마음이 지명에 담긴 안강읍安康邑.
그 중앙을 관통하여 동쪽으로 흐르는 칠평천이 형산강과 합류하고,
서쪽으로 반달모양의 산릉들이 에워싸고 있는 기름진 안강평야를 기반으로,
600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양반 마을인 양동마을이 설창산 자락에 둥지를 틀었고,
화계산과 자옥산이 만나는 수려한 계곡에는,
조선시대 동방오현 중의 한 분인 회재 이 언적 선생을 모신 옥산서원과
회재 선생이 낙향하여 은거하였던 독락당이 자리를 잡고 있다.
양동마을의 <서백당>에서 태어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대사상가의 이상과 좌절과
그리고 초월과 꿈이, 고스란히 이 자옥산 계곡과 독락당 곳곳에 스며있다.
회재 선생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로서,
그의 학문은 퇴계 이황 선생에게로 이어져서 영남학파 성리학의 선구자가 된 분이다.
선생은 24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관계로 진출하여 학자적 명성을 떨쳤으나,
41세 되던 해에 외척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 파직 당하고 낙향하여,
양동마을의 본가로 돌아가지 않고, 근처 안강 옥산리에 별서 사랑채인 독락당을 신축하고
은둔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시련의 시기에 성리학을 넘어서 도교, 불교 등과 교류하고 학문과 인격 수양에 전념하여
독자적인 사상세계를 완성하였다.
약 7년간의 은거가 끝나고 중앙으로 복귀한 후는,
승승장구하여 벼슬이 종1품 좌찬성에까지 이르렀고, 경상도 관찰사 시절에는,
노모가 계시는 양동마을에, 여주이씨 종갓집 무첨당과 향단을 건축하였다.
그러나 그의 시련은 다 끝나지 않았던지,
57세 때 또 무고한 사건에 연루되어서 평안도 강계로 유배를 떠나게 되고,
6년간의 유배생활 끝에 1553년에 63세를 일기로 유배지 타향에서 숨을 거두게 되었고,
후학들에 의하여 독락당 입구의 옥산서원에 배향되었다......
독락당 인근의 국보 정혜사지13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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