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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 갤러리 ■/여 행

전주 한옥마을 (2016.03.)




















 

[여행] 전주 한옥마을, 느림의 미학


                                                  (글 출처 : 중도일보 박희준 기자)   


 

느림은 우리를 단박에 시간의 부자로 만든다.

이 느림은 애초에 우리 것이 아니었던가? 느리게 봐야 풍경들은 제 색깔과 향기를 드러낸다.

느림은 시간의 늘어남이고, 공간을 파고들며 스며서 깊이를 만든다.

 

박연준·장석주 에세이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중에서

 

전주의 밤엔 비밀이 없다. 아주 작은 말소리부터 문 여닫는 소리까지 모두 들린다.

편집기자협회 정기총회 참석 차 들른 전주의 늦은 오후.

사람들로 북적이던 한옥마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집집마다 불이 꺼지고

어느 시골마을처럼 고요했다.

도란도란 말소리가 잦아들고, 까만 기왓장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지붕을 덮은 채

모두가 잠든 밤. 낮은 담장너머 방마다 켜진 불빛이 정겹다.

한옥을 지탱하는 기둥을 쓸어내려본다. 나무가 겨울을 건너며 생긴 굳은살이 느껴졌다.

뜨끈뜨끈한 방바닥에 몸을 눕히자 바로 잠이 들었다.

일정에 지친 하루의 굳은살이 연해지는 듯했다.

 

 

 

 

 





















내부의 무늬들


날이 밝자 어제 보이지 않던 한옥들이 제각각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사뿐히 날아오르는 새의 날개 같은 처마.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의 곡선이

넘실대는 파도 같았다. 이른 시간임에도 사람들이 북적였다.

 

사실, 한 낮의 전주 한옥마을에선 고즈넉한 정취와 고요함은 찾아보기 힘들다.

슬로시티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손쉽게 사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 SNS를 타고

입소문이 급속도로 퍼져 관광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기 때문이다.

먹을거리만큼 사람도 많았다.

트럭도 지나다닐 만큼 꽤 넓은 길가엔 발 디딜 틈 없이 '먹기 위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아쉬웠다. 전날 밤 보았던 정겨운 시골마을은 온데간데없었다.

가게 앞 늘어선 대기 줄이, 머리를 길게 땋아 놓은 것 같이 얽히고 설켜 있었다.

 

전부 둘러보지 못했지만 한옥마을 곳곳에는

한지원, 공방촌, 서예관, 술 박물관 등 볼거리가 많다.

모두 둘러보아도 하루가 다 모자를 지경인데 너무 먹을거리에만 집중하는 사람들이 야속했다.

한옥의 화려한 겉모습에 심취하기보다 내부의 무늬들,

나무의 숨결을 느끼고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가만두면 제자리를 찾는 것


전주 한옥마을 초입부(풍남문에서 태조로 방면)로 들어가면

전동성당이 제일 먼저 반긴다. 1914년 완공됐다는 전동성당은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 손에 꼽히는 관광지다. 그전에 천주교의 성지로도 유명하다.

웅장한 성당의 모습은 카메라에 담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큰 길을 따라 동쪽으로 걷다보면 오목대가 있다.

오목대에 오르면 한옥 수백 채가 어깨를 맞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실로 장관이다. 이제야 한옥마을에 온 것 같았다.

마을이 한눈에 들어와 가슴이 뻥 뚫렸다.

한옥마을의 가장 특이한 점은 한복체험을 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생활한복에서 기생한복까지 가지각색의 고운 한복을 입은 젊은이들이 사진을 찍는 것이

일상복을 입은 것처럼 자연스럽다.

한복대여소도 20여곳으로 점차 늘어나고 있으며 비용도 저렴해 부담이 적다.

오목대에서 내려다보면 기와집 사이로 여기저기 꽃이 핀 것처럼

고운 빛깔의 한복이 싱그럽다.

 

 

오목대 뒤편에 있는 오목교(육교)를 건너면 또 다른 마을,

자만 벽화마을이 나온다.

이곳은 6·25때 피란민들이 정착하여 만들어진 달동네인데

2012년 녹색 둘레길 사업이 시작되면서 40여채 주택에 벽화들이 그려지기 시작했고

한옥마을과 더불어 명소가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만 판다는 전주비빔밥 와플은 낯설지만 신선하다.

마을 끝자락에는 커다란 테라스가 있는 카페도 있는데

한옥마을에서 사람들 발길에 치여 정신이 없다면

이곳처럼 평화로운 곳도 없다.

 

 





























































































































어느덧 날이 저물자 또 다시 발길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걷다보니 시간가는 줄 몰랐나보다.

자연을 재료로 자연과 어우러져 겸손하게 서있는 한옥들.

'슬로시티 전주'와 꽤 닮아있다.

혹시 전주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먹방'이 아닌 한옥마을의 속살을 들여다보길 권한다.

그리고 최대한 천천히 걸었으면 한다.

이번 전주여행은 유난히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하지만 전주의 시간은 언제나 느리게 간다. 아니 어쩌면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다만 내가 빠르게 걸었을 뿐이다.

느림의 미학. 전주는 '꼭꼭 씹어먹어야' 제 맛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