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 도동서원, 조선 유교 건축의 꽃이 피다
(글 출처 : 대구=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서원은 조선 성리학의 정수가 응축된 공간이다. 유교에서 가장 중요한 활동인 강학과 제사가 이뤄진 장소로,
철저히 기능에 초점을 맞춰 지어졌다.
공립학교였던 향교와 달리 서원은 오늘날의 사립학교나 대안학교와 비슷했다. 인재를 키우고 선현에게 제향을
지내는 사설기관이었다.
운영 주체가 다른 만큼 두 기관 사이에는 차이가 있었다. 우선 향교에서는 교육의 목적이 과거 준비였던 반면,
서원에서는 학문을 배우고 토론하는 데 치중했다.
또 위치도 달랐다. 향교는 대부분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중심지에 건립됐으나, 서원은 인적이 드물고 풍광이 수려한
장소를 택해 세워졌다.
제사 대상도 향교는 공자와 그의 제자, 서원은 우리나라의 학자로 상이했다.
서원에서 중요한 사실은 제사를 올리는 인물이었다. 도동(道東)서원에 모셔진 선철은 한훤당 김굉필이다.
따라서 김굉필을 알지 못하면 도동서원의 참모습을 파악할 수 없다.
김굉필은 1454년 한성에서 태어나 1504년 세상을 뜬 성리학자다.
27살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마흔에 관직에 올라 형조좌랑을 지냈다. 조선시대에 좌랑은 정6품 벼슬로
그다지 높은 자리가 아니었다.
어찌 보면 평범한 선비의 삶을 살았던 듯싶다. 그런데 사후 평가는 매우 좋았다.
김굉필의 스승은 김종직이었다. 김종직은 사림파의 시조로 성리학적 정치 질서를 확립하고자 했던 사상가였다.
당시는 사림파와 훈구파가 정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던 시점이었는데, 김종직이 죽은 지 6년이 지난 1498년 한 편의
글이 문제가 된다. 김종직이 생전에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비판하며 지었던 '조의제문(弔義帝文)'이었다.
뒤늦게 이 글을 발견한 훈구파는 사림파를 몰아붙였고,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한다. 글과 관계가 없었던 김굉필 또한
평안도 회천으로 귀양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이곳에서 조광조를 만나 학문을 전수한다.
반정으로 왕이 된 중종은 조광조를 위시한 사림파를 중용했다. 비록 조광조의 개혁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세력의 무게중심은 점차 훈구파에서 사림파로 이동한다.
사림은 조선 말기까지 성리학을 기반으로 나라를 지배했다. 그들이 보기에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는
'의리지학(義理之學)'을 계승한 위인이었다. 김굉필이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보다 더 뛰어난 사람으로 추앙받았던
이유다.
서원의 명칭에 '공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도동'을 붙일 정도로 김굉필에 대한 후학의 존경심은 대단했다.
◇ 원칙을 지키기 위해 원칙을 깨다
김굉필을 기리는 서원은 본래 1568년 도동서원 인근의 비슬산 기슭에 세워졌다.
그런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면서 지금의 자리에 다시 짓게 됐다. 흥선대원군이 중앙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서원 대부분을 철폐했을 때도 훼철되지 않을 만큼 명성이 자자했다.
사실 서원은 어렵지만, 따분한 건축물은 아니다. 지붕의 기와 한 장, 기단에 쓰인 돌덩어리 하나에도 의미가 배어 있다.
특히 도동서원은 눈여겨볼 구석이 무척 많다.
도동서원에서는 일단 문 앞의 은행나무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가지를 옆으로 늘어뜨린 노거수로, 도동서원의 역사를
대변한다. 수령이 약 400년이며, 김굉필의 외증손인 한강 정구가 심었다고 전해진다.
도동서원은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철학을 충실히 따른다. 앞쪽은 강학, 뒤쪽은 제향을 위한 공간이다.
그리고 핵심 건물들이 일렬로 배치돼 있다.
그중 첫 번째가 수월루(水月樓)다. 조선 말기에 서원을 증축하면서 새로이 세운 정문으로 누마루에 오르면
굽이치는 낙동강과 은행나무가 내려다보인다. 시간이 멈춘 듯한 정경이 인상적이다. 다만 현재의 누대는 1970년대
복원돼 멋이 떨어진다.
수월루를 통과하면 진정한 대문인 환주문(喚主門)이다. '마음의 근본을 부르는 문'이라는 뜻인데, 정문치고는 너무 작고
좁다. 한 명씩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야 한다. 위대한 스승에게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도록 설계한 장치로 여겨진다.
환주문 너머는 선비들이 공부를 하던 영역이다. 정면에는 중정당(中正堂)이 버티고, 좌우에는 유생들이 머물던 기숙사인 거의재(居義齋)와 거인재(居仁齋)가 있다.
나무로 지은 중정당은 도동서원에서 볼거리가 가장 많은 건물이다. 기단부터 내부까지 꼼꼼히 살펴야 한다.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 돌들을 끼워 맞춘 기단에는 용머리 조각상 4개가 튀어 나와 있다. 낙동강이 범람하지 않도록
물의 신인 용을 집어넣은 것이다.
강당 안에는 다양한 현판이 걸려 있는데, 내용이 흥미롭다. 삼강오륜 같은 유교 윤리, 조선의 왕과 왕비의 묘호와
능호 등이 새겨져 있다.
또 단청이 없는 지붕 아래에는 '도동서원'이라고 적힌 커다란 편액이 두 개나 달려 있다.
중정당 뒤편의 계단을 오르면 사람이 드나드는 통로가 세 개 있는 내삼문(內三門)이 나온다. 그 안쪽은 제향 영역으로,
김굉필과 정구의 위패가 봉안된 사당이 있다. 사당에서는 음력 2월과 8월에 제사가 진행된다.
수월루부터 사당까지 도동서원을 둘러보면 비례와 규칙을 준수한 반듯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도동서원에는 쉽게 눈치 채기 힘든 비밀이 있다. 그 답은 중정당의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을 통해
알 수 있다.
바로 북향(北向)이라는 사실이다. 모든 건물이 북쪽을 바라보도록 설계돼 한낮에 강을 바라보면 태양이 등 뒤에 있다.
배산임수라는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남향을 포기한 셈이다. 북향이어도 괜찮다는 고매함과 자부심의 발로로 느껴진다.
▲ 여행 정보
도동서원을 한눈에 보려면 다람재로 가야 한다. 서원에서 낙동강을 따라 현풍면사무소로 가다 보면 나온다.
다람재는 산등성이가 다람쥐를 닮았다는 연유로 붙은 지명이다. 서원에서 1.2㎞ 거리여서 걸어서도 닿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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