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당리의 마을 입구에는 가늘고 길게 솟아있는 바위가 있는데, 입암이라고 불린다.
본래는 진보군 북면에 속한 지역이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생부동(生剖洞)과
주역동(駐易洞), 입암동(立岩洞)을 합쳐 연당리라고 하였다.
연당리는 입암에서 청기로 넘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마을로 동래정씨(東萊鄭氏) 세거지이다.
마을은 산을 등지고 물이 앞에 흘러가는 지형을 가지고 있고, 가옥들은 주로 마을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끼고 도는 청기천 쪽의 둔덕에 밀집되어 있다.
연당리는 돌배기 , 석백(石百), 선바위 , 선바우 , 입암(立岩), 연당(蓮塘), 임천(臨泉),
주역(駐易) 등의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돌배기는 마을과 뒷산에 흰 돌이 많이 박혀있다는 뜻에서 유래되었고,
석백은 돌배기를 한자로 적은 것으로 보이는데 석(石)은 한자의 뜻을 백(百)은 소리를
빌려다 적은 것으로 보인다.
선바위는 연당의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서 마을 입구에 가늘고 길게 솟은 바위가 있어서
선바위라고 한다. 또한, 선바위 인근에 조선시대 남이장군이 대천에 살고 있던 용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을 하고는 반란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산줄기를 끊었는데,
그 형상이 석문 같다 하여 석문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연당은 조선 초기에는 생부동(生剖洞)이라 하여 연당 , 임천 , 선바위 , 주역(駐易)
일대를 가리켰다. 이후 광해군 5년(1613)에 정영방이 이곳에 은거한 후 임천(臨泉)이라
하였고, 또 경정을 짓고 서석지를 만들어서 연당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임천은 조선초기까지 생부동이었는데, 지금은 연당에 속한 자연부락이다.
마을 앞으로 내가 흐르고 수풀이 울창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주역은 선바위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이곳에 역이 있었다고 전하나
근거는 희박하다. 다만, 200여년전 경상감사가 쉬어간 곳이라는 설과 옛날 장사치들이
물건을 바꾸던 곳이었다는 말에서 주역이 되었다고 한다.
태화당고택 주변으로는 중요민속자료 108호로 지정된 서석지(瑞石池)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11호인 영양연당리석불좌상(榮陽蓮塘里石佛座像)이 있다.
또한, 마을에 진입하기 전 도로의 우측에는 정익세(鄭翼世)의 행적을 기리고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후손인 정휘봉(鄭輝鳳)이 세운 동파재(桐坡齋)가 있다.
그리고 마을에서 나와 911번 지방도를 타고 청기방면으로 약 500m 정도 가다보면,
도로 좌측에 재사(齋舍)가 보이는데, 정영방(鄭榮邦)의 넷째 아들인 정제(鄭悌)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후손인 정건모(鄭建模)의 주장으로 건립된 망구재사(輞邱齋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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