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김씨 학봉종택(義成金氏 鶴峯宗宅) 입구에 2010년, 학봉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학봉선생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수제자로 조선 선조(宣祖) 1년(1568)에 문과에 합격한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고 그의 학문은 영남학파의 학문적 전통계승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순국하였다.
그러나 학봉선생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의 대학자인 퇴계 선생이 1569년(선조2년) 임금과 조정 중신들의 간곡한 청을 뿌리치고 향리인 안동 도산으로 돌아가면서 추천한 인재 세 사람이 있다. 동고 이준경, 고봉 기대승, 그리고 학봉 김성일이다. 이준경은 2년 연상으로 영의정에 이른 이고, 기대승은 26년 후배로 퇴계의 대표적 제자이며, 학봉은 향리의 37년 후배로 수제자다. 함께 추천한 이준경과 기대승은 불화로 이듬해 결별했고, 학봉은 22년 뒤인 1591년에 일본 통신부사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복명한 일로 곤경에 처했다. 퇴계가 서애 유성룡을 추천하지 않은 일은 이미 승승장구 하고 있어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에 비해 학봉은 보다 오랫동안 문하에 있었을 뿐 아니라 도학에 더욱 침잠해 쉽사리 벼슬에 나아가려 하지 않는 기질을 지녔다. 죽음을 앞둔 퇴계가 학봉을 추천한 것은 학봉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말해준다.
<동아원색대백과사전>을 보면 학봉에 대해서 ‘당파싸움에 급급한 나머지 침략의 우려가 없다고 보고했다’라고 쓰여 있다. 학교에서도 그를 편협한 당파성 때문에 국론을 분열시킨 인물로 가르쳤다. 그러나 1991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간행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는 정사 황윤길의 주장과는 달리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하여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고 적고 있다.
다소 미흡하지만, 후자가 역사학계의 정설이지 않나 싶다. 임진왜란 최고의 권위 있는 회고록인 징비록에 보면 저간의 사정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사려 깊은 대학자의 고뇌’에서 내린 복명이었다는 해석이다.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물을 읽어보면 학봉이 일본에 통신부사로 가서 벌인 외교가 얼마나 주체적이고 사려 깊은 것이었나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학봉이 취한 ‘위의를 갖춘 외교’와 ‘무력에 굴하지 않는 외교’를 정사와 서장관이 힘을 합해 이루었다면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전란을 겪지 않았을 수 있었다는 일부의 주장도 있다.
학봉의 시호는 문충공이다. 文자 시호에다 충성 忠자를 받았다.
그는 임진왜란을 당하자 몸으로 맞서 싸우다 순국했다. 탁월한 도학자면서 애국 애민을 실천했던 이다. 임란 초기에 초유사의 소임을 맡아 의병의 발기와 지원에 크게 기여했고 경상우도 관찰사가 된 뒤로는 관군과 의병을 함께 지휘하여 1592년 10월 임란의 3대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성대첩을 이루었다.
그 이듬해 4월 각 고을을 순시한 뒤 다시 진주성으로 돌아왔는데, 피로와 풍토병이 겹쳐 4월 29일 진주성 공관에서 운명하니 향년 56세였다.
임진왜란 때 왜군을 맞아 장렬히 싸우다 순국한 학봉 김성일 집안. 이 집안의 애국정신은 그 직계 후손들과 정신적 자식인 제자들에게도 어김없이 전해진다. 학봉의 퇴계학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제자이자, 학봉의 11대 종손인 김흥락은 항일 독립운동에 참여해 정부에서 훈장을 받은 제자만 60명이나 배출했고, 학봉의 직계 후손들 중에서도 11명이 훈장을 받았다“
<북소리 윤태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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