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명옥헌에서 ‘여름의 끝자리’를 보다
‘뜨거운 뙤약볕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꽃봉오리 터지던 날/진분홍 주름치마 나풀거리며/
살랑이는 바람결에 살포시/
미끈한 속살 내비치는 한여름의 청순한 화신이여!/
제 안에 소리없이 시들어가는 걸 알면서도/
온몸 다해 다시 피워내어/
폭죽처럼 터져 선혈처럼 낭자하다/
반들반들한 수피에 붉는 간질나무여/
화려한 꽃그늘 밟으며/
꽃폭죽 맞으며 여름 가고/
꽃카펫 밟으며 가을 온다.’
(조선윤의 ‘배롱나무꽃’에서)
어머니 무덤을 천묘하였다
살 들어낸 어머니의 뼈를 처음 보았다
송구스러워 무덤 곁에 심었던 배롱나무 한 그루
지금 꽃들이 한창이다
붉은 떼울음,
꽃을 빼고 나면 배롱나무는 골격만 남는다
너무 단단하게 말랐다
흰 뼈들 힘에 부쳐 툭툭 불거졌다
꽃으로 저승을 한껏 내보인다
한창 울고 있다
어머니, 몇 만리를 그렇게 맨발로 걸어오셨다
-정진규 ‘배롱나무 꽃’ 전문
연못에서 바라본 명옥헌 배롱나무 숲.
정자는 꽃숲머리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연못물에 꽃구름이 돋았다.깡마른 몸에 우우우 열꽃이 돋았다.
피가 펄펄 끓어 선홍빛이다.
농부의 종아리처럼 툭툭 힘줄 불거진 거죽에 붉디붉은
꽃숭어리가 불화로처럼 발갛게 달아올랐다.
멀리서 보면 붉은 꽃무늬 양산이 둥글게 활짝 펼쳐있다.
노을에 빨갛게 달아오른 뭉게구름 같기도 하다.
늦여름이 배롱나무꽃과 함께 자글자글 익고 있다.
바람이 잘디잔 꽃눈깨비를 흩날린다. 땅바닥에 핏자국이 질펀하다.
석 달 열흘 피고 지고, 지고 피는 나무백일홍(木百日紅) 꽃.
사람들이 ‘백일홍나무’라고 자꾸 웅얼거리다 보니,
어느샌가 소리 나는 대로 ‘배롱나무’가 되었다.
배롱나무 줄기는 매끈매끈한 알몸이다.
나무껍질 같은 건 군더더기. 발가벗은 몸에 간지럼 태우면,
까르르 꽃들이 웃는다. 그래서 ‘간지럼나무’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훨훨 벗은 나무.
마른명태 같은 몸뚱이에 어찌 그리 예쁘고 깜찍한 등불을
우르르 매달았을까. 그래서 절집에서는 무욕, 무소유의 상징이다.
한 점 욕심이나 집착이 없는 깨달음의 경지다.
뼈와 가죽만 남은 채로 구불퉁 뒤틀려 있는 절마당 배롱나무.
그 반질반질 화석과 같은 몸에서 ‘붉은 사리 꽃’을 끝없이
토해낸다. 맨발탁발의 늙은 스님이 저잣거리의 중생들에게
샘물 같은 설법을 터뜨리는 것 같다.
전남 담양 명옥헌(鳴玉軒)의 배롱나무 숲은 조선 선비의
정원이다. 그곳은 닭 벼슬만도 못한 관직을 훌훌 털어버리고
고향에 숨어 살던 명곡(明谷) 오희도(1584∼1624)의 보금자리였다.
오희도는 인조 임금(1595∼1649)이 왕이 되기 전인 능양군 시절
세 번이나 찾아가 시국을 논했던 인물.
명옥헌 마루에 오늘날까지 ‘三顧(삼고)’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이유다. 삼국지에서 ‘유비가 제갈공명을 세 번 찾았다’는
‘삼고초려’의 그 ‘삼고’다. 명옥헌이 있는 후산마을엔 능양군이
오희도를 찾아왔을 때 말고삐를 맸다는 늙은 은행나무
‘繫馬杏(계마행)’도 우뚝 서있다.
명옥헌은 오희도의 넷째 아들 오이정(1619∼1655)이 지은 정자.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지붕으로 고졸하면서도 멋들어지다.
꾸밈이 없으면서도 품격이 있다.
오이정은 정자 앞뒤에 두 곳의 연못을 파고 주변에 스물여덟
그루의 배롱나무와 다섯 그루의 소나무, 느티나무 등을 심었다.
연못은 네모지게 팠고 그 가운데엔 둥근 섬을 만들었다.
당시 우주관이었던 ‘땅은 네모지고 하늘은 둥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나타낸 것이다.
명옥헌은 그 곁을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마치 구슬이 부딪치는
소리 같다 하여 지은 이름이다. 정자 현판 글씨는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쓴 것으로 알려졌다.
명옥헌 배롱나무꽃은 8월 중순이 절정이다.
네모 연못 가운데 둥근 섬의 배롱나무꽃이 지난주부터 우우우
피기 시작했다. 못가 배롱나무꽃은 이미 흐드러져 꿀벌들의
잉잉거리는 소리가 따갑다. 땅바닥엔 벌써 붉은 꽃잎들이
넉장거리로 질펀하게 누워 있다. 황갈색 흙에 붉은 연지가
점점이 수없이 찍혀 있다.
연못물 속에도 붉은 꽃숭어리가 부얼부얼 구름다발로 피었다.
물가엔 꽃잎들이 떼를 이루어 둥둥 떠다닌다. 붉은 비단띠가
연못허리를 두른 듯하다. 잉어가 퐁당퐁당 뛰어오르고 실잠자리가
낮게 날아다닌다. 매미들은 무논 개구리처럼 끊임없이 울어댄다.
사람들은 저마다 정자마루에 앉아 잠시 땀을 식힌다.
아이들은 마룻바닥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깔깔거린다.
바람이 살랑살랑 슬며시 졸음이 온다. 문득 길손의 눈동자에
붉은 꽃숭어리가 어린다. 발간 노을빛이 참 곱다.
‘다섯 그루의 노송과 스물여덟 그루의 자미나무가/
나의 화엄(華嚴)연못, 물들였네/
이제는 아름다운 것, 보는 것에도 질렸지만/
도취하지 않고 이 생을 견딜 수 있으랴’
(황지우의 ‘물 빠진 연못’에서)
글 /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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