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선덕여왕릉 (慶州 善德女王陵)
신라 최초의 여왕이자 27대 왕인 선덕여왕(재위 632∼647)의 무덤이다.
높이 6.8m, 지름 23.6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으로, 밑둘레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2∼3단의 둘레돌을 쌓았다.
선덕여왕은 아들이 없던 진평왕(재위 579∼632)의 딸로서 성골이라는
특수한 신라 왕족의식에 의해 여왕이 되었다.
첨성대와 분황사, 황룡사 9층탑 등을 세웠으며, 김유신, 김춘추와 더불어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여왕이 죽거든 부처의 나라인 도리천에 묻어 달라고
하였으나 신하들이 이해를 못하자 여왕이 직접 도리천이 낭산(狼山) 정상이라 알려주었다.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한 후 낭산에 사천왕사를 지었고, 낭산의 정상이 도리천이라 한
여왕의 뜻을 알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경주 사천왕사지 (慶州 四天王寺址)
경주 낭산(狼山) 기슭에 있는 신라의 절터로 신문왕릉 옆 ·
선덕여왕릉 아래에 있다.
신라 문무왕 14년(674)에 중국 당나라는 신라가 그들의 도독부(계림도독부)를
공격한다는 핑계로 50만 대군을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려 하였다.
이에 문무왕이 명랑법사에게 적을 막을 계책을 구하자, 이곳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짓고
부처의 힘을 빌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당의 침략으로 절을 완성시킬 시간이 없게 되자,
비단과 풀로 절의 모습을 갖춘 뒤 명승 12인과 더불어 밀교의 비법인 문두루비법을 썼다.
그러자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풍랑이 크게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가라앉았다.
그후 5년 만에 절을 완성(679)하고 사천왕사라 하였다.
이곳은 원래 신유림이라 하여 신라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곳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죽으면서 도리천에 묻어줄 것을 유언했는데,
그곳이 낭산 남쪽이라 하였다. 여왕이 죽은 지 30년만에 왕릉아래 사천왕사를
짓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여왕의 예언이 맞았음을 알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수미산을 세상의 중심으로 보고 그 중턱은 사천왕이 지키며
꼭대기에는 부처의 나라인 도리천이 있어 불국토가 시작되는 곳이라 믿었다.
이 설화를 통해 낭산을 수미산으로 생각했던 신라인들의 불국토사상을 엿볼 수 있다.
절터에는 머리부분이 없어진 귀부 2기와 비신, 그리고 당간지주 1기가 남아있다.
특히, 절 동쪽에 남아있는 귀부는 사실적인 표현수법과 등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으로 신라시대의 뛰어난 작품임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가장 먼저 지은 사천왕사는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 배치로
신라 호국불교의 성격과 신라인들의 불교관·우주관을 잘 보여주는 절이다.
경덕왕 때 향가인‘도솔가’, ‘제망매가’를 지은 고승 월명이 머물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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