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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건축 갤러리 ■/경기도

양평 택풍당 (2013.07.)

 

 

 

    

     백아곡 선산과 택풍당을 사랑한 이식(李植)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소재지에서 319번 도로를 따라 1㎞ 가면 오른쪽으로 쌍학리 안골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이 길을 따라 다시 1㎞정도 들어가면 안골마을이 나온다.

마을 입구 오른쪽 길가에는 덕수이씨세장지비가 있고 뒤 능선으로 덕수이씨 세장지가있다.

이곳은 이식 외에도 셋째 아들 이단하 등의 묘소도 함께 있다.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학문(學問)을 닦고 강론(講論)하던 택풍당(澤風堂)이있다.

 

택풍당(澤風堂)은 2층 누각(樓閣)형식의 특이한 건축물로서, 팔작(八作)지붕에

한식 골기와를 얹은 겹처마집이다. 현재 이 건물은 정면과 측면이 각각 4.60m의 건물로서

외문(外門)과 잘 보수(補修)된 담장을 갖추고 있다.

2층루(層樓)에는 툇마루를 달았다. 택풍당은 홀로서서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에서 숨어

고민하지 않은 집이었다. 그곁에 아름다운 못이 있었지만 근대에 메웠다고한다.

(이하 글 : 문화재 지킴이 이은정 )

 

 

 

 

 

 

 

 

 

 

 

 

 

 

 

 

 

 

 

 

 

 

 

 

 

 

 

덕수이씨는 택당(澤堂)이식(李植)과 재종숙 동악(東岳)이안눌로 인하여 17세기 대표적인

문한가로 일컫는다. 이안눌은 권필과 더불어 문단에 군림하였고 이식은 세차례 문형(文衡)을

역임하였다. 아들 이단하와 손자 이여(李?)도 문형에 올랐다.

 

택당 이식이 백아곡(쌍학리 안골)과 인연을 맺은 것은 광해군 5년 지평의 백아곡에 땅을 구하여

부친을 장사지내고 이듬해 조부모의 묘를 이장하면서이다.

백아곡은 망곡(芒谷)이라하였다. ‘芒’은 우리말로 ‘백아’와 비슷하기 때문에 이식이 이 이름으로

바꾼것이다. 줄여서 ‘백곡’이라고도 하였다.

 

이식은 지관 이의신의 도움을 받았지만 백아곡 선산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졌다고한다.

또한 후손에게 선영을 잘 유지하도록 유훈도 내렸다.

 

[불을 금할것, 나무하는 것을 금할것, 영원히 묘제를 지낼것, 한명의 묘지기를 반드시 둘것,

자신의 전재산은 묘전으로 쓸것, 적서의 차별없이 묘를 쓸수있게 할것]등이다

 

마을 입구에있는 세장지비는 조선 영조 25년(1749)에 세워진 것으로, 택당 이식이 지평에

정착한 이후 덕수이씨 가문에서 배출한 인물들의 묘소 위치를 기록한 것이다.

이식의 증손인 이기진(李箕鎭)이 비문을 짓고, 외증손 사위 김진상(金鎭商, 1684~1755)이 글씨를 썼다.

 

 

그리고 마을 안쪽에 있는 택풍당이 완성된 것은 1619년으로 이식이 제자와 자손들을 교육하고

학문을 연구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으로 덕수이씨 가문의 자제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던 곳이다.

 

 

덕수이씨세장지비 뒤 능선으로 덕수이씨 세장지가 있는데 가장 먼저 만나는 묘가

이단하(李端夏, 1625~1689)묘소이다. 이식의 셋째아들로 호는 외재(畏齋),송간(松磵)이다.

현종 3년(1662)에 문과에 급제한 후 현종 15년에는 대사성으로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이어 숙종이 즉위한 뒤 서인으로서 제2차 복상문제로 숙청당한 의례제신(議禮諸臣) 처벌의

부당성을 상소하다가 파직, 이듬해 삭직당하였다. 숙종 6년(1680) 경신환국으로 다시 벼슬길에

올라 이듬해 『현종개수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특히 그는 고향인 이곳 양평(지평)에서 사창을 실시한 경험을 바탕으로 사창제도를 철저히

실시하여 굶주리는 백성을 돌볼 것을 역설하였는데 숙종 10년(1684) 예조판서가 되어

사창절목(社倉節目)」을 만들었고, 숙종 12년(1686) 우의정이 되어 사창설치의 다섯 가지 이익을

건의하였다

 

이단하 묘소 뒤에는 택당공의 부모 묘소(찰방공)가 있고 뒤로 조금 올라가면 택당 이식의 묘가

위치하고있다. 이식(李植, 1584~1647)은 조선시대의 한문사대가로 손꼽히는 문장가로 자는

여고(汝固)이고, 호는 택당(澤堂),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광해군 2년(1610)에 문과에 급제하여

북평사(北評事) 및 선전관 등을 역임하였으며, 광해군 10년(1618)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곳

양동면 쌍학리로 낙향하여 택풍당(澤風堂)을 짓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택당 묘소를 지나 능선으로 조금 내려가면 택당공조부(승지공)묘소가있다.

그리고 외재(畏齋) 이단하 묘소에서 오른쪽 능선으로 가면 택당공의 장자 이면하(백곡공)의

묘소가있다.

 

또한 이식은 백아곡 일대 아름다운곳 여덟곳을 골라 팔경이라 명명하고 그림으로 그려두었다.

그리고 이 일대의 풍광을 ‘동계기’에서 묘사하였다.

1624년 화가 이신흠을 불러 자신이 사랑하던 동계의 팔경을 그려 달라고하여 여덟폭 병풍을

만들었다. 동계(동계는 오늘날 석곡천이라 부르며 건지산 아래 양동면 석곡리를 말함)를 후세에

그림으로 영원히 전하고자 한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은 행방이 알려지지않고있다.

 

쌍학리로 은거한 이후 이식은 수차례에 걸친 왕의 출사(出仕) 명을 계속 거부하여

광해군 13년(1621) 왕명을 어겼다 하여 구속되기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 이조좌랑ㆍ예조참의ㆍ동부승지ㆍ우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에 대사간ㆍ대사성ㆍ좌부승지 등을 지냈으며, 인조 10년(1632)까지 대사간을 세 차례나

역임하였으나 사친(私親)의 추숭(追崇)이 예가 아님을 논하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사서

간성현감으로 좌천되었다가 인조 11년(1633)에 부제학을 거쳐 대제학과 예조참판ㆍ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인조 20년(1642) 척화를 주장하다가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심양(瀋陽)으로 잡혀갔다가 탈출하여

돌아와 대제학ㆍ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저서로는 『택당집(澤堂集)』이 있다.

 

택당 이식이 사랑했던 택풍당은 지금도 예스러운 자태로 호젓하게 서있다. 그리고 이식이 사랑한

동계(석곡천)도 깨끗함을 간직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