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미술관 자작나무숲을 지배하는 색은 둘이다. 백(白)과 녹(綠). 자작나무의 하얀 기둥이
드넓은 녹음(綠陰)의 지붕을 지탱한다. 제1전시장과 카페가 있는 정원. 제2전시장이 자리 잡은
둔덕. 모두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원종호의 손길이 닿은 1만평 공간 곳곳이 자작나무다.
1991년 여기에 1만2000그루를 심었던 그다. 10년 새 절반가량이 죽었다. 20년간 틈틈이
자작나무를 더 심었다. 뺄셈과 덧셈의 결과 7000~8000주쯤이 살아 자란다. 1991년부터 2010년
지금까지, 원종호는 하얀 나무에 제 모든 시간과 공간을 바쳤다.
20년은 길어도 20년을 결정한 시간은 하루였다. 1990년 5월 초, 그는 백두산에 올랐다.
목적지는 천지였으나 시선은 길섶에서 멎었다. 주위가 온통 하얗다. 아직 잎을 내지 않은
자작나무가 끝 간데없이 펼쳐졌다.
"거기서 마음이 울렸다. 자작나무는 풍족하지 않다. 가냘픈 흰색이 애잔하고 쓸쓸했다.
그때 내 모든 여행이 멈췄다. 여행이란 지금 자기에게 없는 뭔가를 찾으려는
일종의 방황이다. 자작나무를 보는 순간, '내가 저걸 보려고 이렇게 돌아다녔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내 방황은 거기서 끝났다."
이듬해 원종호는 묘목 1만2000주를 구했다. 2000주만 돈 주고 샀다. 나머지는 잘 자라지 못해
묘포장에서 폐기 처분될 뻔한 어린 나무였다. 고향 야산에서, 그는 일손을 사지 않고 한 그루씩
심었다. 그저 후배 몇몇이 도왔다. 미술관 자작나무숲은 그렇게 시작됐다.
미술관 자작나무숲의 외양을 특징짓는 게 색(色)이라면 그 내면은 빛이다.
나무 향 짙은 제2전시장은 어둠 속 흔들리는 빛의 환영으로 환하다.
벽을 채운 대부분의 사진 속 풍경은 나무로 그린 쓸쓸함의 정경이다.
그 풍경은 자작나무를 닮았다. 모두 원종호의 작품이다.
미술관 자작나무숲 관장이기에 앞서 그는 사진가다. 1981년 니콘 카메라를 샀다.
등산을 좋아한 원종호는 카메라 든 주변 등산객들 어깨 너머로 사진을 배웠다.
한 번 '꽂히면' 웬만해선 놓지 않는 그다. 1983년 원주 치악산을 찍기 시작했다.
10년 넘게 주말마다 치악산으로 달려갔다. 뜨는 해의 비스듬한 광선을 위해, 눈 내린 차가운 풍경
속에서 잠을 청한 적이 셀 수 없다.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 열 번 이상은 가야 했다. 처음 보자마자 찍은 사진은 사진이 아니다.
사진은 재현이되, 온전한 이해의 산물이다.
온전한 이해는 단 한 번의 방문에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1991년 원주에서 치악산을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열었다. 당시 원주에 교환교수로 왔던
미국 버지니아 웨스턴 커뮤니티 대학교수와의 인연으로 1994년엔 미국 버지니아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사진가 원종호는 갤러리를 꿈꿨다. 자기 작품을 늘 걸 수 있는 자기만의 공간.
1991년 고향 야산에 자작나무를 심기 시작하면서, 그는 당연히 갤러리를 염두에 뒀다.
돈이 없었다. 그래서 시간이 걸렸다. 1996년, 마침내 자작나무숲 한구석에 지금은 카페로 쓰는
집을 세웠다. 자기만의 갤러리를 갖기 위해서는 다시 8년을 기다려야 했다.
2004년 문을 연 미술관 자작나무숲은 2008년 제2전시장을 추가했다. 그때 입장료를 2000원
받기 시작했으나 작년 4월, 원종호는 입장료를 대폭 올렸다. 성인 1만 5천원
"미친 짓인 거 안다.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소문을 타면서 사람이 몰려왔다.
별의별 사람이 다 있었다. 돗자리 펴 밥 먹고 쓰레기 그대로 버리는 사람, 화초 캐 가는 사람,
쓸데없이 훈수 두는 사람. 모두 쳐내야 했다."
일상은 풀을 베며 시작해 풀을 베며 끝난다. 낮엔 부인과 함께 번갈아가며 표를 팔거나
카페를 지킨다. 일주일에 서너 번은 카메라 들고 주변을 탐색한다. 농부와 미술관장과
사진가의 삶이 이렇게 하나로 합쳐진다.
자연히, 이 하루의 여정은 이제 그에게 일생의 여정과 동의어다.
( 조선블로그 김우성 기자 raharu@chosun.com )
제1 전시실 ( 자작나무숲 - 백색의 영혼. 정시영 )
제2 전시실 ( 원종호 갤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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