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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건축 갤러리 ■/전 남

구례 곡전재 - 2 ( 2013. 03.)

 

 

 

     건축물 안내 및 내력

 

 

본 건축물은 1910년경부터 승주 황전면에 사는 7천석의 부호 박승림이란 분이

明堂을 찾기 위해 십여년을 많은 地官과 함께 수색 끝에 토지면 오미리 環洞(환동)이 금환락지다

확정짓고 李 敎臣(호 穀田:병주의 曾祖父)씨와 함께 건축하게 되었다

 

그후 박승림씨가 사업상 서울에 거주하고 집은 李敎臣씨가 위임맡고 있었는데

박승림씨가 죽음으로 그의 子婦가 李 敎臣씨에게 인도하여 현재 5代째 살고 있다

 

그리하여 이집을 구례문화원에서 金環洛地(금환락지)라 하고 여러대학 건축학자들이

건축이 잘되었다하여 목포대학 건축과에서 일주일 이상 조사한후 문화적 가치가 있다하여

문화재로 할 것을 신청하였다

 

원래는 6채 53칸 한옥으로 지어졌으나 중년에 인수당시 동행랑과 중간채를 팔아 훼손되었다가

현재 소유주 이순백께서 1998년1월 새로이 동행랑과 중간 사랑채를 복원하고

누각을 신설하여 "춘해루"라 이름 지었으며(5채 51칸 연못(洗淵:세연)을 확장하였다 .

구례군청에서 몇 년간 향토문화유산을 선정하다 2003년 문화재관리위원의 심의를 거쳐

구례군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2003-9호)

 

 

 

 

     금환락지(金環洛地)의 유래

 

 

도선(道詵:高麗名僧) 무학(無學:李朝初名僧) 남사고(南師古: 李朝明宗때 豫言家)등

유명한 地師(지사)들의 秘訣(비결)에 의하면 구례읍에서 동쪽으로 十里를 지나면

큰 明堂터가 있는데 오성(다섯 성씨 水火金木土)바지가 다 살수가 있고

萬戶(만호)가 가히 살수 있다 하였다.

 

이 명당터에 살면 부귀는 물론 白子千孫(백자천손:많은자손)에다 文官(문관) 千名(천명),

武官(무관)이 萬名(만명) 文千武萬(문천무만)이라 하고 王妃(왕비)가 3명이 나고

臥廳朝報(와청조보 30代라 하고 그 부근에 上垈(상대:윗 집터) 中垈(중대) 下垈(하대)가 있어

金龜沒尼(금귀몰니) 金環洛地(금환락지) 五鳳歸巢(오봉귀소)등 陽宅(양택:집터) 3곳이 있고

四大陰宅(사대음택:묘자리)이 있는데 月明峰下化爭飛(월명봉하화쟁비)

鷄鳴邱隅東嶺曉(계명구우동령효) 水廻券頭龍喜笑(수회권두용희소)

馬?三脊北岸肥(마비삼척북안비)라 하였다

 

이 명당은 下元甲(1984년)부터 운이 돌아온다 하였다.

또한 신혼부부들이 이명당터에서 하룻밤만 숙박을 하면 금환락지의 운을 받아

평생 부귀영화를 누린수 있다는 말이 전해 오기도 한다.

 

 

구만들에 동네가 생기기 시작한 내력과 이 동네 사람들의 주장을 들으면

어느 자리가 바른혈인지 어리둥절해 진다. 앞서 소개한 이용근씨 같은 분은

용두리가 '금환락지'중의 진혈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오늘날 행정구역 마을이름의 하나인 금내리는 '금환락지가 그안에 있다'는

뜻을 지니고 있듯이 동네사람들이 자기동네의 금환락지설을 믿고 있다.

오미리에 속해 있는 환동(環洞)도 금환락지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러므로 금내리와 환동을 중심으로 마을의 성촌내력을 더듬어 보면 그 모습을 알수 있을만하다.

 

앞서 유씨의 <시언> 1883년 3월 21일 일기에 서 밝힌바와 같이

용두리에서 살던 허현(許泫月溪)이란 사람이 1876년 오미동 동네밑 들가운데

집을 짓고 살면서 '금환락지'의 혈이라는 뜻으로 '환동'이라 부르기 시작한데서 비롯했다.

같은 무렵 유성팔(柳成八)이란 사람도 이곳에 집을 짓고 들어왔다.

 

1895년 <토지면가좌책>에 따르면 이 동네는 13집이 살았다.

유인규(柳寅圭) 유선칠(庾善七) 등 한방하는 사람들도 명당이라고 이곳에 들어와 한약방을 차렸다.

1917년 12월 3일 이 명당터에도 큰불이 일어나 4채가 불탔다.

 

1928년 순천에서 조만식(趙萬植)이 이사왔으며

이듬해 4월 박승림(朴勝林1878∼1943)과 경남 합천사람 정태규(鄭泰圭)가 이사왔다.

 

박씨는 순천군(지금의 승주) 황전면 대치리 307번지에서 태어나 7천섬지기 지주로

처음에 구례읍내 봉북리 72번지로 들어왔다.

환동이 금환락지에 틀림없다는 풍수의 권유를 받고 이 환동에 들어와 오미리 476번지에 집을 지었다.

대지만도 1천평이 넘었으며 돌담장도 금가락지처럼 둥굴게 쌓았다.

그는 부자였지만 덕을 베풀어야 복을 받는다면서 동네사람들이 어려울 때마다 몇십섬씩 쌀을 구호미로 내놓아 당시 신문에 날정도로 이름이 있었다.

 

 그후 농지개혁 등으로 가세가 기울자 1964년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산곡리로 호적을 옮겨간

며느리가 이집 관리인 이순백씨 조부에게 논 7두락값에 집을 팔아

이씨는 행랑 두채를 뜯어 집값에 보탰다.

환동에는 성주이씨 일촌 일곱집이 아직도 살고 있다.

 

 

 

                                                        금환락지 곡전재 이 병 주         (글출처 : 곡전재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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