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리산 노고단이 형제봉을 타고 내려오다가 섬진강 줄기와 만나 만들어낸
기름진 평야 구례는,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나라 안에서 가장 살만한 곳’으로
꼽았을 정도로 지리적 혜택이 뛰어난 고장인데,
구례 시내에서 경남 하동 쪽으로 섬진강을 따라 19번 국도를 달리다 보면 토지면 오미리의 넓은 들,
구만들을 만난다.
이 구만들 일대는 금환락지金環落地, 곧 풍요와 부귀, 영화가 샘물처럼 마르지 않는 명당으로서
남한의 3대 길지吉地중 하나라 알려져 왔다.
구례를 이야기하자면 풍수지리사상을 피해갈 수가 없다.
옛 지사地士들은 한반도를 절세의 미인 형국으로 보았고,
지리산이 자리 잡은 구례 땅은 그 미녀가 무릎을 꿇고 앉으려는 자세에서
옥음玉陰에 해당하는 곳이라 했다.
그리고 그 미녀가 성행위를 하기 직전 금가락지를 풀어 놓았는데
그곳이 명혈名穴이 되어 금환락지라는 것이다.
혹자는 지리산의 선녀가 노고단에서 섬진강에 엎드려 머리를 감으려다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곳이라고도 한다.
「 택리지 」에서는
“구만들은 모든 계촌溪村과 비교하면 생리가 더욱 넉넉하다.
다만 남해에 가까워서 물과 흙이 이북의 마을보다 못하다.
지리와 생기가 모두 극히 아름다워서, 도산, 하회에 비하면 더욱 훌륭하나,
고개嶺에서 떨어진 거리가 약간 멀어 전쟁이 나면 피하는데 불리하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누구나 명당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 이곳에, 영조 때 낙안군수를 지낸 삼수공 유이주 선생이
운조루雲鳥樓를 창건하였다.
삼수공은 남한산성 보수와 수원 화성 축조에 관여한 건축에 능통했던 무관인데,
오늘날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 화성 건설시,
성을 튼튼하게 쌓으면 되지 왜 이렇게 아름답게 쌓느냐고 신하들이 물으니,
정조임금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 아름다움이 능히 적을 물리칠 수 있느니라!” 라고.
집터를 잡고 주춧돌을 세우기 위해 땅을 파는 도중,
부엌자리에서 어린아이의 머리크기만한 돌거북이 출토되었다.
이를 금귀몰니金龜沒泥의 명당임을 입증하는 증거물로 여기고 크게 기뻐하였는데,
이 돌거북은 운조루의 가보로 전해 내려오다 1989년 집에서 도난당했다.
운조루는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두 글자를 취했는데,
‘구름 속의 새처럼 높은 이상을 품고 은거하는 집’이라는 해석이 어울릴 것이다.
운조루는 창건 당시의 설계도와 같은, 전라구례오미동가도全羅求禮五美洞家圖라는 그림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어 원래의 모습과 비교해 볼 수 있다.
건물의 전체구성은 ㅡ 자형 행랑채, T 자형 큰사랑채, ㅁ 자형 안채, 안사랑채가 연이어져 있고
동북쪽에 별도의 사당이 자리하고 있으나, 그림속의 안사랑채와 행랑채는 화재로 소실되었다.
사랑채는 큰사랑, 아랫사랑으로 나누어지고, 큰사랑채 서쪽 끝에는 세 방향이 트인
누마루 운조루와 대청, 온돌방이 있고, 누마루에 앉으면 행랑채 지붕 너머로
안산인 오봉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큰사랑채에 잇대어 대문쪽으로 뻗은 아랫사랑채에도 누마루가 있어 귀래정이라 하였다.
대문에서 사랑채를 거쳐 안채로 가는 통로를 계단이 아닌 경사로로 처리한 것이 특이한 점인데,
수레의 통행이나 짐의 운반을 용이하게 하는 실용주의 정신의 산물로 보인다.
안채는 중문을 통하여 사랑채와 연이어져 있고, 안방과 대청, 건넌방, 다락, 곳간 등으로 구성된다.
네모반듯한 마당 아래쪽에는 부농의 살림규모를 한눈에 알 수 있는 장독대가 있고,
큰부엌 앞에는 수조와 맷돌이 정겹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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