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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이야기 ■/전통건축 이야기

주거건축-014. 거창 동계 정온 고택 - 이름없는 곳에서 뜻을 지키며 산다

 

 

 

                             사랑채 누마루 난간 사이로 보이는 눈 덮인 덕유산 (2005. 02.)

 

 

 

 

 

        14.  거창 동계洞溪  고택

 

- 이름 없는 곳에서 뜻을 지키며 산다 -

 

 

 

 

 경남 거창은 소백산맥을 경계로 하여 전라북도, 경상북도, 경상남도의 3도가 만난 지점에 위치한 경상남도의 최북단의 서부지방이다. 산이 좋고 계곡이 좋고 물이 좋아, 누대와 정자가 많고 그 누대와 정자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선비문화가 두텁게 형성되었던 곳이 바로 거창지방이다.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 교수는 ‘국토박물관 순례’에서 거창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거창은 남덕유산을 등에 지고 동쪽으로는 가야산, 서쪽으로는 지리산을 멀찍이 벌린 채, 남쪽 저 멀리

황매산을 내다보며 한들이라 불리는 넓은 들판을 터전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수승대搜勝臺의 거창 신愼씨, 건계정建溪亭의 거창 장章씨, 위천의 초계 정鄭씨, 갈천葛川의 은진 임林씨 등이 일찍이 세거지世居地로 삼아 서부 경남 굴지의 고을로 성장했다.

 조선 전기 산청의 조식, 함양의 정여창이 경상우도 영남학파를 형성할 때, 거창에서는 동계洞溪 정온(鄭溫.1569~1641)이 이 고을 유림의 한 전통을 세웠다.”

 

 

 

문전옥답이 펼쳐진 동계고택 전경 -1 (2005. 02. )

 

문전옥답이 펼쳐진 동계고택 전경 -2 (2012. 04. )

 

 

 

  동계 정온 선생은 선조, 광해, 인조 세 임금 대에 걸쳐 학문을 펼친 큰 학자이자 선비이다. 동계 선생은 늦은 나이에 관직에 진출했지만, 일생을 통하여 다음 두가지의 사건으로 인하여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충절과 기개의 선비로서 영원히 추앙을 받고 있는 분이다.

 그 하나의 사건은 선생의 나이 46세 때,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강화로 귀양 보냈다가 살해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리고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마저 폐출하려 하자, 동계는 죽음을 각오하고 갑인봉사로 일컬어지는 상소를 올렸다.

 “그런 패륜을 저지르고 죽어서 무슨 낯으로 종묘에 들어가서 역대 선왕들을 만나시겠소!”하는 대목에 이르자 극도로 흥분한 광해군이 수라상을 발길로 걷어차니, 옆에 있던 시녀와 승지의 머리가 터질 정도였다고 한다. 선생을 아낀 중신들의 만류로 겨우 죽음을 면하고 제주도로 귀양 가서 위리안치되어 10년 동안의 긴 고초를 겪게 된다.  그러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쫒겨난 후, 동계 선생은 절의를 지킨 선비로 중용되어, 대사간. 대제학. 이조참판 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두번째 사건은 병자호란 때 일어난다. 강화도가 함락되고 남한산성에 갇힌 임금은 항복을 요구받기에

이르렀고, 동계 선생은 끝까지 오랑캐와의 결사항전을 주장했으나, 결국 화의가 성립되었다. 삼전도에서 인조임금이 맨발로 엎드려 오랑캐에게 절을 하는 치욕을 당하자, 동계는 칼로 배를 긋는 할복자살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고 모진 목숨을 연명하게 되자, 고향으로 내려와 집을 떠나 홀로 남덕유산

산속으로 들어가서 풀과 나무로 움막을 짓고 세상과의 인연을 끊었다. 백이숙제처럼 죽을 때까지 미나리와 고사리만 먹고, 모리재某里齋(이름없는 동네의 집)에서 은거하다  5년 뒤 세상을 떠났다.

 요즘도 후손들이 동계선생의 제사상에 반드시 고사리와 미나리를 올리는 연유이자, 초계 정씨를 전국적인 명문으로 각인시킨 절의와 기개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동계 사후에, 초계 정씨 가문에 절대절명의 위기가 닥쳤다. 영조 4년, 동계의 손자 정희량이 이인좌와 함께 무신란을 일으켜 역성혁명을 주도했다가 실패하여, 정씨 가문의 일족 30여 명이 이 사건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는 멸문 직전에까지 이르렀다. 삼족을 멸한다는 대역죄를 짓고도 멸문의 화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동계 선생 같은 충신의 제사가 끊겨서는 안 된다’는 유림들의 절절한 구명운동 덕분이었다 한다.

 실패한 혁명의 휴유증으로 이후 100년동안 영남지방 인재들의 관계 등용의 길이막히고, 동계선생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가족들이 뿔뿔히 흘어졌지만, 그 뒤 영양현감을 지낸 야옹 정기필 선생이 가문을 다시 일으켜서, 동계선생의 조부인 승지공이 거창에 터를 잡은 이래로, 약 500 년간 동계고택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이어왔다.

 

 

 

                 동계고택 대문 -1 (2005. 02.)

 

동계고택 대문 -2 (2012. 04. )

 

사랑채와  누마루 전경-1 (2005. 02.)

 

사랑채와  누마루 전경 -2 (2012. 04. )

 

사랑채와  누마루 전경 -3 (2005. 02.)

 

큰사랑채와 중사랑채 사이로 안채 출입용 중문이 있다 (2012. 04. )

 

 

 

 

 

 동계고택은 대문채, 큰사랑채, 중문간과 중사랑채, 곳간채, 안채, 아래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문채는 솟을대문으로 인조임금이 내린 ‘문간공 동계 정온지문文簡公桐溪鄭蘊之門’의 선홍빛 정려旌閭 현판이 걸려 있어, 동계선생의 충절을 대변해주고 있다.

 사랑채마당에는 이끼 낀 자연석을 이용한 화단을 세군데나 조성하였고, 단정하고 위엄이 있는 ㄱ자형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 반, 그리고 ㄱ자로 꺽여져 나온 부분이 1칸 반이고 앞툇마루가 있다.

 사랑채 정면에 걸린 '모와某窩'라고 적힌 편액이 눈길을 끄는데, 구한말 의친왕 이강 공이 이 집 사랑채에서 약 40일간 머물고, ‘모리의 집 某里齋 ’이라는 뜻의 친필을 남겼다 한다.

 그리고 그 오른쪽에 있는 ‘충신당’이라는 현판은,  훗날 동계선생 사후에 제주도에 유배 온 추사 김정희 선생이, 제주도 사람들에게서 동계선생의 선비다운 처신과 유배생활에 대해 소상하게 전해 듣고 감동하여, 나중에 귀양살이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거창의 동계고택을 방문하여, 당시 동계의 후손인 정기필 선생에게 제주도민의 칭송을 전하고 ‘충신당’이라는 현판을 써 주고 갔다고 한다.

 

 

 

의친왕 이강 공의 친필 현판 '모와' (2005. 02.)

 

추사 김정희 선생이 남긴 글씨 '충신당' (2012. 04. )

 

 

사랑채에서 본 대문과 화단 -1 (2012. 04. )

 

사랑채에서 본 대문과 화단-2 (2012. 04. )

 

 

 

 남쪽으로 향한 안채는 정면 8칸, 측면 3칸 반의 앞,뒤 툇마루가 있는 남부지방 특유의 ‘ㅡ’자 형 평면으로 길게 펼쳐져 있다.  ‘ㅡ’자 형 평면이 가지는 개방적인 구조로 인하여 안동지방의 폐쇄적인 ‘ㅁ’자 형 집에서는 보기 힘던 활달함과 생기를 느낄 수 있다.

 안채의 동쪽 끝은 방 하나와 대청마루로 구성하여, 안채에서도 사랑채의 누마루와 같은 공간을 경험할 수 있는데, 이것은 남부지방의 무더운 기후를 고려한 삶의 지혜 중 하나이다. 안채와 사랑채는 기단이 낮은 반면에 툇마루가 높게 설치되어 있다.  툇마루가 높은 구조는 습기가 많은 남방지역에서 흔히 취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곳간채는 서편에 있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고, 마당 동측에 서향한 아래채는 4칸 집이다.

안채 후원의 장독대 옆에 있는 동계선생의 사당은  낮은 토석 담장 안에 위치하고 있고, 정조임금이 손수 지어 보냈다는 제문과 시가 현판으로 걸려있다.

 

 

 

 

중문에서 본 안채 부엌 (2005. 02.)

 

사랑채 우측 누마루에서 본 안채모습 (2005. 02.) - 장독대가 있던 자리가 지금은 화단으로 바뀌었다.

 

 

8칸의 -자형 긴 평면과 우측 끝에 누마루를 가진 안채 (2005. 02.)

 

8칸의 -자형 긴 평면과 우측 끝에 누마루를 가진 안채 -2 (2012. 04. )

 

 

안채 마당 (2012. 04. )

 

 

                                우물가에서 본 안채마당 (2012. 04. )

 

동계선생의 불천위 사당 (2012. 04. )

 

 

 

 

 한편, 동계고택에는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이 두가지 있다. 사랑채의 방이 두 줄로 붙어있는 겹집 형태의 평면 구성과 사랑채 누마루 위에 눈썹지붕이 별도로 붙어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거창은 남쪽지방인데도 추운 겨울철 보온에 유리한 북방식 주거양식인 겹집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은, 거창지역이 내륙 쪽으로 깊이 치우쳐 자리를 잡아서 겨울이 유난히 추운, 지리 환경적 요인에 기인한 것으로 추증해 볼 수 있겠다.

 

 

 

 

 겹처마가 트레이드 마크인 사랑채 지붕 (2005. 02.)

 

건너편 반구헌에서 바라본  사랑채의 겹처마지붕 (2012. 04. )

 

 

 

 사랑채의 트레이드 마크인 눈썹지붕은 외장상의 이유보다는 기능상의 필요로 보인다.

"처음에 지은 지붕은 집의 높이에 비하여 처마의 깊이가 깊지 않았다. 거기에다 계자난간이 있는 퇴까지 설치하다보니 들이치는 비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눈썹지붕을 추가로 설치한 것이다. 즉 눈썹지붕은 원래의 것이 아니고 건물을 완공한 후 보첨한 것이다."라고 해석하는 한양대 최성호 교수의 견해에 공감이 간다. 

 비를 피하고 석양의 햇살을 가리는 실생활의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한 기능을 중시한 시설이다보니,

독창적인 발상과 지붕형태에 비하여 균형이나 비례등의 미학적인 측면에서는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 구조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반적으로 동계고택은 ‘ㅡ’자 형의 평면과 누마루가 발달된 남부지방의 사대부집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고, 보존과 관리 측면에서도 영남지역에서 가장 우수한 고택으로 평가받고 있다.

 

 

 

 

 봄이 오는 동계고택 -1 (2012. 04. )

 

봄이 오는 동계고택 -2 (2012. 04. )

 

 

 

 

 마지막으로, 동계고택의 또 하나의 트레이드 마크는 14대 종부 최 희 여사라고 말할 수 있다. 물질적인 면에서나 정신적인 면에서나 우리나라 최고의 부자였던 경주 최부자집의 딸로서, 이곳으로 시집와서 혼자서 명문 종가를 지키며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전통문화 답사객 들을 접빈객接賓客의 전통으로 언제나 인정으로 맞아주었다.

 팔순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화단이며 집안을 항상 정갈하게 가꾸고, 수란, 전복찜, 육포, 법주 등 사대부가의 음식에 있어서 요리법과 맛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종부의 장맛은 가히 국내 최고라고 자부할 만큼 깊은 맛을 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인품과 덕을 겸비한 동계 종가의 영원한 안주인이시다.

 내가 이번에 방문했을 때 집안에 아무도 계시지 않아 은근히 걱정했는데, 돌아온 후에 알아보니, 얼마전에 귀향한 아들내외와 잘 지내신다고 한다.

 

 

 동계고택 바로 옆에는 정기필 선생이 기거하던 곳인 반구헌反求軒이 자리하고 있는데, 선생이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거처할 곳조차 없자, 안의현감과 고을사람들이 뜻을 모아 지어준 집이다. 반구헌은 반구제심反求諸心, 즉 뒤돌아보면서 마음을 바로잡는다는 뜻에서 나온 당호이다. 지금은 후손이 실제 거주하지 않아서 쇠락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지만, 단순하고도 절제된 형태와 규모에서 선생의 선비정신을 읽을 수 있다.

 

 

 

 

 반구헌(우측 한옥)에서 바라 본 동계고택 (2012. 04. )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 강동마을의 동계고택에는, 죽음을 초월한 서릿발같은 기개로 조선을 대표하는 큰 선비로 우리 곁에 영원히 살아있는 동계선생을 추모한 정조대왕의 제문이 사당에 당당히 걸려있다.

 

 

        세월은 흘러도 산은 푸르고 높으며,

        정의로운 기운은 온 천지에 가득하네.

 

        북으로 가거나 (김상헌이 심양에 끌려간 것)

        남으로 오거나 (정온이 모리재에 은거한 것) 의리는 매 한가지,

        금석같이 정결하고 굳은 절개는 아직도 삭아 없어지질 않았네.

 

 

 아울러 동계선생이 제주도 유배시절 쓴 애잔한 시 한수가 남아있는데, 대유학자이기 이전에  어머니 모시고 소박하게 살고 싶었던 지극히 인간적인 소망이 진솔하게 드러나 있어, 선생의 꿈과 고뇌가 가슴에 와 닿는다.

 

                       

     나이 많으신 우리 어머니                   有母年期耄

     문에 기대어 얼마나 기다릴까             門閭幾何望

     아이를 낳고도 힘을 얻지 못하고        生兒不得力

     자식과 이별한 뒤 가슴만 태우시리     別子但煎腸

     태수되어 봉양도 하지 못하고            未遂專城養

     고향가서 효성 다할 기약도 없내        還迷負米鄕

     언제쯤 성대한 은덕 입어 풀려나서     何時蒙

     다시 색동옷 입고 재롱피워 볼거나     重攬彩衣長

 

 

 

                                                                                      2012.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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