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남양주 평내동 궁집
- 공주의 꿈 -
경춘가도(京春街道) - 서울에서 춘천 가는 이 길은 말만 들어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힘이 있다. 수도권에서 학교나 회사를 다닌 적이 있다면, 따스한 햇살 속에 북한강변을 따라서 가평, 청평으로 소풍 가던 기억 하나 쯤은 간직하고 있으리라! 그 젊은 날의 꿈과 사랑이 곳곳에 스며있는 ‘추억의 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낭만의 도로’가 ‘고통의 도로’로 바뀐 건 이미 오래 전 일이다. 도로를 따라 양쪽으로 새로 건설된 평내, 호평 그리고 마석 신도시의 즉흥적이고도 무분별한 개발은, 교통문제 뿐만 아니라 기존 지역사회의 질서를 깨뜨리고, 그 곳의 삶의 흔적들을 깡그리 지워내는 무책임한 실수를 저질렀다. 타인의 삶에 대한 존중과 배려 없이, 단순한 정치적, 경제적 논리만으로!
앞 동산에서 바라본 궁집 부지 전경 - 당시에 출입이 허락되지 않아 멀리서 볼 수 밖에 없었다 (2004.10.28.)
남양주 평내 신도시 초입 국도변에, 약 230년 전에 공주가 살았던 궁집이 있다. 남양주시청에서 46번 국도(京春街道)를 따라가다 돌팍고개를 지나자마자 우측으로, 평내동 장내마을의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데, 조선시대 영조 임금이, 막내딸 화길옹주가 시집갈 때, 혼수로 궁궐의 목수를 보내어 지어 준 집이다.
궁집이란 왕의 출가한 자녀와 종친 등 왕족이 살던 살림집을 말한다. 그 예로는 남산골 한옥마을에 옮겨 놓은, 부마도위 박영효 가옥, 순정효 황후 윤씨 친가와 창덕궁의 연경당 그리고 충남 예산의 추사고택 등이 궁집에 해당될 수 있겠다.
서울에서 지척에 있는 남양주 궁집을 내가 처음 방문했을 무렵은, 평내 신도시 개발이 한창이었는데, 원래의 마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콘크리트 아파트숲만이 위압적이던 참담했던 주변환경이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북한강변에 위치한 산골짜기에 자리잡고 있어, 자연조경이 잘 이루어져 있고 산자락 한줄기가 집의 뒤를 감싸 돌고, 다른 줄기가 집 앞에 조그만 동산을 만들었는데......’ 로 시작되는 안내표지판을 비웃기라도 하듯, 상전벽해 - 앞과 옆은 고층 아파트 숲이 내려다보고 있고, 뒷산은 도로로 잘려나가고, 부지 전체는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평내 신도시의 포로 - 위리안치된 죄인의 모습이랄까?
싸그리 밀어버리지 않고 그나마 남겨 둔 것을 고맙게 생각하라면,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는 주객전도의 몰염치한 발상이 아닌가! 상대방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주는 기본적인 예의만 갖추더라도 우리사회는 한 단계 더 성숙하리라고 나는 믿고 있다.
앞 동산에서 바라본 부지 전경 - 정면 뒷쪽의 현대식 건물이 무의자박물관이고, 우측 상단에 고층 아파트들이
보인다 (2004.10.28.)
앞 동산에서 바라본 부지 전경 -2 (2004.10.28.)
신도시 개발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있었음인지, 궁집의 대문은 언제나 굳게 잠겨 있었다. 첫 번째 갔을 때는 관리인과 통화라도 했었는데, 두 번째 갔을 때는 그 전화번호마저도 사라지고 없었다. 두 번이나 헛걸음을 한 뒤, 우연히 문화재청의 ‘문화재 지킴이’ 제도를 알게 되어, 2006년 봄에 ‘궁집 지킴이’를 신청하여 초여름에 지킴이 위촉 통보를 받았다. 곧바로, 남양주 시청 문화관광과에 전화를 했더니, 마침 궁집 위쪽에 있는 사립 무의자박물관에서 전시회가 있어서, 20년 만에 일반 시민에게 한시적으로 개방이 된다는 정보를 알려주었다.
현재, 궁집은 예술원 회원인 화가 권옥연 선생의 소유이고, 주변에는 군산, 용인, 서울 등지에서 옮겨온 6채의 한옥과 현대식 박물관 건물이 계곡 좌우로 흩어져 있어서, 마치 미니 민속촌을 보는 듯하다. 이번에 전시회를 개최하는 부인 이병복 선생은 극단 자유를 40년간 이끌어 온 우리나라 무대미술의 개척자이고, 수많은 공연에 사용되었던 무대소품들을 정리하여 ‘이병복 없다’ 라는 테마로 세상에 마지막으로 공개하고 태워 없앨 것이라고 한다.
'이병복 없다' 행사장 가는 길 (2006.05.28.)
'이병복 없다' 전시회 축하 국악공연들 (2006.05.28.)
궁집 바깥마당 전경 - 좌측에 사랑채 출입 협문이 보이고 정면 뒷쪽에 안채 중문이 보인다 (2006.05.28.)
2006년 5월 27일, 개막 축하공연으로 국악가락이 백봉계곡을 휘 감을 즈음, 먼저 입구 쪽에 있는 궁집으로 향했다. 공주가 살았으니, 으리으리하진 않더라도 규모는 보통 이상일거라고 짐작했었는데, 계단과 기단 부분에 다듬은 돌을 사용한 것을 제외하면 일반적인 사대부집을 결코 능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안채마당은 좁아 보이기도 하여서, 과함과 지나침보다는 약간의 부족함과 절제의 미덕을 실천한 집주인, 부마도위 구민화와 공주의 인품과 지혜가 느껴졌다.
조선시대는 엄격한 신분제도 사회로서, 가사규제 및 경국대전 등을 통하여 집의 규모 및 장식 등을 통제하였다. 집의 규모는 대군이 60간, 군과 공주는 50간, 옹주와 종친, 2품이상은 40간, 3품 이하는 30간 이내로 제한했고, 살림집의 장식은, 단청과 화려한 장식을 금하고, 건물기단은 3단 이하로 낮추고, 기단등에 다듬은 돌의 사용을 금지하였다.
세종 때 처음 만들어진 이 제도는 비록 철저히 지켜지지는 못했지만, 단지 집을 재산증식의 수단으로 치부하는 오늘날의 세태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조선시대의 윤리규범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전체적인 배치는, ㅁ 자형의 안채가 남쪽으로 자리를 잡고, ㄱ 자형의 사랑채가 서남쪽 방향으로 덧붙어 있는 구성이다. 현재는 안채와 사랑채만 남아 있으나, 원래는 전면에 솟을대문과 문간행랑채, 사랑채 뒤쪽에 광과 부속행랑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뒤편의 부속채 들은 애초의 모습이 아니고 외부에서 옮겨와 덧붙인 별개의 한옥 들이다.
정면에 사랑채 출입 협문이 보이고 우측에 안채 중문이 보인다 (2006.05.28.)
사랑채 마당 (2006.05.28.)
사랑채 누마루 (2006.05.28.)
사랑채 뒷마당 (2006.05.28.)
사랑채는, 안채의 서측에 날개처럼 이어서 붙어 있지만, 바깥마당으로부터의 출입이 안채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고, 별도의 담장을 둘러 완전한 독립채로 이루어져 있다. 서쪽 끝에 돌출된 높다란 누마루를 설치하여 주변의 조망을 쉽게 하였고, 툇마루 앞에도 분합문을 설치한, 전면 4간의 단촐한 규모이고, 사랑방 우측 끝의 마루를 통해서 안채와 연결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안채 마당 -1(2006.05.28.)
사랑채와 연결되는 뒷마루와 우측 처마 서까래의 파손으로 툇마루에 흙이 떨어져 있다 (2006.05.28.)
안채 마당 -2 (2006.05.28.)
안채 출입구 중문 (2006.05.28.)
안채 부엌 뒷마당 -1(2006.05.28.)
안채는 폐쇄성이 아주 강한 ㅁ자 구조에다가 다소 좁은 안마당, 그리고 전면 대청부분에 안방을 배치하여 다소 답답함을 준다. 그러나 안방을 전면으로 전진배치 시키고, 안방의 크기를 1.5배 정도로 키운 것은 공주에 대한 특별 배려였을 것이다.
바깥마당에서 안채로 난 중문을 열고 들어서면, 정면으로 부엌, 안방, 대청이 있고, 꺽어져서 오른쪽은 건넌방과 부엌, 왼쪽은 아랫방과 사랑뒷마루로 나누어져서 서쪽 사랑채로 이어진다. 부엌이 2개인 것이 특이한데, 이는 경기도 지역의 주거양식에서 많이 나타나는 한 특징이기도 하다.
안채 툇마루에 흙이 떨어져 있어 자세히 살펴보니, 처마서까래가 대여섯 개 잘려 나갔다. 지붕의 누수현상으로 서까래가 썩어서 부러진 것이다. 괸리인에게 물어 보았더니, 시청에서 이미 조사가 끝났고 예산이 확보 되는대로 보수할 계획이라고 했다.
사랑채 바깥마당 전경 (2006.05.28.)
안채 부엌 뒷마당 -2 (2006.05.28.)
건물 주변이 자연 상태의 천연 숲과 계곡, 구릉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도심의 작은 고궁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하는 궁집은, 전반적으로 검소한 규모와 세련된 장인의 솜씨가 돋보이고, 혼수품의 일종으로 신축한 집이라 건립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학술적 의미가 남다른 것으로 평가된다.
전시회가 끝날 무렵에야 권옥연 선생을 잠시 만날 수 있었다. 40년 쯤 전에 우연히 이곳에 들렀다가 궁집과 주변 자연에 매료되어 주인으로부터 궁집을 매입하고, 추가로 전국의 한옥을 사 들여 옮겨 배치하고, 무의자박물관을 짓고, 풀 한포기까지 손수 가꾸었는데, 관련 행정기관의 무관심과 상상을 초월하는 유지관리비로 인하여 많이 지치신 듯 했다. 우리 한옥문화에 대한 유별난 사랑은 댓가 없는 희생의 연속 이었으리라!
향후 구상과 관리계획을 물었더니, 권옥연 선생은 담배 한대 꺼내 물고 별 말씀이 없으셨다......
외부에서 옮겨온 궁집 주변의 한옥들(2006.05.28.)
지금도 궁집 주위로 둘러쳐져 있는 철조망 - 출입을 위해서는 관리인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2011.07.20.)
그 후로도 지금까지 오랜 기간 동안 궁집의 대문은 특별한 날 - 남양주시 축제기간 - 을 제외하고는 철조망 속에서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러던 중, 최근에 남양주시에서 매입하여 공원으로 조성한다는 소식이 들려서, 지난 주말에 가평 가는 길에 확인 차 들렀지만 여전히 궁집의 대문은 열리지 않고 있었다. 공원조성계획은 확정되었으나 예산확보라는 마지막 고비가 남아 있는 듯했다.
이제라도 해결의 실마리가 풀린 것은 불행 중 다행이겠지만, 평내 신도시조성계획 초기에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접근 - 신도시 건설과 전통문화의 계승은 대립적 개념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데 주거공간과 문화공간은 서로에게 필요한 파트너라는 상생적 개념으로 접근했더라면 오늘날 베드타운화 된 신도시의 문제점과 삭막함을 조금이라도 덜어 줄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아울러, 우리문화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궁집을 홀로 지켜온 노예술가 부부의 노고와 희생도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평내 신도시의 고립된 섬, 궁집의 옛 주인 화길옹주는 이십대를 못 넘기고 요절하였다 한다.
'공주의 남자' 부마 구민화는, 사랑채 누마루에서 바라보이는 앞 언덕배기에 공주의 묘소를 만들고, 아침, 저녁으로 지극히 보살폈고, 죽어서 공주와 합장을 하였는데, 평내 신도시 개발 때 어쩔 수 없이 이장을 하였다고 한다.
구중궁궐에서 남양주 궁집으로 시집와서, 부마와 함께 백봉계곡에서 영원히 살고자 했던 공주의 소박한 꿈도, 신도시 개발의 흙먼지 속으로 묻혔다.
2012. 0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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