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지막한 야산을 뒤로하고 앞으로 들이 펼쳐진 남향 땅에 자리하고 있는 기와집이다. 안채에서 발견된 기록으로 보아 광무 10년(1906)에 지었음을 알 수 있고, 사랑채와 별당채도 이 시기에 지었다고 한다.
'ㄱ'자형의 문간채, 안채, 별당채와 '一'자형의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동네길과 이어진 낮은 터에 '一'자형 대문간채가 있고, 대문간을 들어서면 문간마당에서 곧바로 사랑마당에 이르게 된다. 문간마당보다 높은 터에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으며 사랑 뒷쪽으로 중문간채가 있다. 그 안에 안채와 별당채가 마주 보고 있다.
안채는 'ㄱ'자형으로 중부지방의 평면구성을 하고 있다. 'ㄱ'자로 꺾인 평면 중 남쪽 끝칸과 다음칸이 부엌이며 그 윗쪽에 2칸의 안방이 있고, 위로 마루방이 있다. 'ㄱ'자로 꺾여서 3칸의 대청이 있고, 그 옆에 작은방 1칸이 있다.
사랑채는 '一'자형의 집으로 서쪽으로부터 약방과 골방이 앞뒤로 있고 그 옆에 사랑방 2칸, 대청 2칸, 방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약방 앞쪽에는 쪽마루가 있다.
별당채는 뒤집은 'ㄴ'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앙에 2칸의 대청이 있고, 대청을 중심으로 위·아래에 방이 1칸씩 있다. 또한 'ㄴ'자형으로 꺾인 부분에 방 1칸이 더 있다.
대문간채는 'ㄱ'자형 집으로 동쪽에 화장실이 있고, 그 옆에 2칸의 광과 솟을대문간, 광 그리고 헛간이 자리잡고 있다.
집에는 사랑마당과 안마당에 각각 정원이 꾸며져 있으며, 집 주변 경치도 뛰어난 곳이다. (자료-문화재청)
'ㄱ'자형의 문간채, 안채, 별당채와 '一'자형의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동네길과 이어진 낮은 터에 '一'자형 대문간채가 있고, 대문간을 들어서면 문간마당에서 곧바로 사랑마당에 이르게 된다. 문간마당보다 높은 터에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으며 사랑 뒷쪽으로 중문간채가 있다. 그 안에 안채와 별당채가 마주 보고 있다.
안채는 'ㄱ'자형으로 중부지방의 평면구성을 하고 있다. 'ㄱ'자로 꺾인 평면 중 남쪽 끝칸과 다음칸이 부엌이며 그 윗쪽에 2칸의 안방이 있고, 위로 마루방이 있다. 'ㄱ'자로 꺾여서 3칸의 대청이 있고, 그 옆에 작은방 1칸이 있다.
사랑채는 '一'자형의 집으로 서쪽으로부터 약방과 골방이 앞뒤로 있고 그 옆에 사랑방 2칸, 대청 2칸, 방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약방 앞쪽에는 쪽마루가 있다.
별당채는 뒤집은 'ㄴ'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앙에 2칸의 대청이 있고, 대청을 중심으로 위·아래에 방이 1칸씩 있다. 또한 'ㄴ'자형으로 꺾인 부분에 방 1칸이 더 있다.
대문간채는 'ㄱ'자형 집으로 동쪽에 화장실이 있고, 그 옆에 2칸의 광과 솟을대문간, 광 그리고 헛간이 자리잡고 있다.
집에는 사랑마당과 안마당에 각각 정원이 꾸며져 있으며, 집 주변 경치도 뛰어난 곳이다. (자료-문화재청)
마을 어귀에 심어진 커다란 정자나무와 조그만 시내를 지나면 안쪽에 기와집 몇 채가 자리잡고 있는데 가운데 위치한 가장 큰 집이 바로 이 집이다. 안채의 상량문(上樑文)에는「광무십년(光武十年) 병오(丙午)십일월 이십칠일 경신수주(庚申竪柱) 동십이월 초삼일 을축(乙丑) 신이시(辛已時) 상량(上樑) 축좌(丑坐)」라는 기록이 있으므로 1906년에 건축됐다고 믿어지며 사랑채, 별당채, 대문간채 등도 같은 연대에 지어졌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중문간채와 사랑 앞의 정원시설은 연대가 조금 더 떨어진 20세기 초반에 꾸며졌으리라 추측되며 기타 건물들은 근래에 지어진 임시 건물이다.
건물의 배치는 안채가 뒤로 가고 사랑채가 앞에 오는 서남향의 직선축을 썼다. 전면에 사방으로 개방된 바깥마당을 두고 정면에 ㄴ자로 꼬부라진 솟을 대문채를 두었다. 넓은 사랑마당을 가로질러서 한길 이상 높은 축대를 쌓고 뒤쪽으로 당당하게 사랑채를 배치했다. 사랑 앞은 정성들여 만든 정원이고 사랑 서쪽 모퉁이를 돌아 사랑 뒤곁을 지나면 또 다시 두길 높은 축대 위에 중문간채가 자리한다. 이 뒤에 안채가 ㄱ자로 배치되며 안마당 서쪽 맞은편에는 뒤집은 ㄴ자로 별당채가 놓였다. 안채 동쪽은 가사노동공간인 뒤뜰이고 뒤안은 다시 축대를 만들어서 후원(後園)으로 연결된다.
안채는 ㄱ자형집으로서 중부지방식 평면구성을 보인다. 가로칸은 전퇴, 세로칸은 전후퇴(세로칸 동쪽으로 다시 헛기둥을 세워서 반칸을 덧달았으나 이것은 근래에 변형된 부분이다)로 간살이를 해서 맨 남쪽에 2칸부엌을 배치했다. 다음은 복판의 상하 2칸을 큰방으로, 다음은「골마루」, 꺾어져서 3칸대청을 배치했고 맨 끝머리가 작은방(이곳에서는「못방」이라 부름)인데 머릿퇴에 벽장과 굴묵공간을 마련했다. 큰방 앞퇴에서부터 작은방 끝 모퇴까지에는 툇마루를 시설했으며 통행의 편의를 위해 마루가 꺾어지는 곳에는 세모마루를 덧붙였다. 대청과의 사이 대청문은 중부식으로 모두 분합문을 시설했다. 큰방과 골마루 동쪽퇴에는 예전에 모두 골방이 시설되었던 곳이다.
구조는 가로칸을 1고주5량으로 하였다. 도리는 납도리이고 장혀를 받쳤으며 보밑에는 단이를 끼웠다. 대들보는 달걀꼴 단면이고 대공은 사다리꼴이다. 기둥은 전면만 큼직한 두리기둥을 쓰고 나머지는 네모기둥이다. 초석은 대강 네모난 덤벙주초이고 댓돌은 얼추다듬은 한벌대 화강암이다. 지붕은 골기와 합각지붕이다.
별당채 역시 ㄱ자형집으로 뒤쪽을 향해 뒤집어졌다. 간살이는 가로칸 ·세로칸 모두 전퇴를 두고 가로 ·세로의 전퇴와 맨 뒤의 머릿퇴에는 툇마루를 시설했다. 그러나 머릿퇴 부분은 높은 누마루를 만들었다. 전면을 향하는 좌우 2칸에는 샛방을 배치하고 뒤로 꺾어져서 상하 2칸은 대청이며 맨 마지막은 머릿방이 된다. 대청 앞문은 남도식으로 세살문을 해 달았다.
구조는 1고주5량이며 장혀를 받친 납도리집이다. 기둥은 전면 기둥만 두리기둥이며 나머지는 모두 네모기둥이다. 초석은 덤벙주초인데 동남쪽 기둥 2개에만 아주 높은 8각주초이다. 아마 후에 보수한 것으로 보인다. 댓돌은 얼추 다듬은 화강암 외벌대이다.
사랑채는 7칸 一자형 전후퇴집이다. 간살이는 서쪽으로부터(겹으로 배치하여) 앞칸에 약방, 뒷방이 놓이며 다음은(홑으로 배치하여) 복판 좌우2간을 사랑큰방으로, 다음 2칸은 대청, 맨 끝 2칸은 사랑갓방으로 구성하였다. 사랑큰방에서 사랑갓방까지의 앞퇴에는 툇마루가 시설되고 약방 앞에는 쪽마루가 놓였다. 또한 뒷퇴에는 각 칸으로 나누어「다락」(골방)이 설치되었는데 큰방의 웃칸과 갓방의 머리칸을 제외한 나머지 세 곳은 바닥을 마루로 했다. 대청 앞문은 모두 분합문이고 나머지는 겹창으로 만들었다.
구조는 2고주5량이며 납도리집이다. 장혀는 처마도리와 종도리에만 덧대고 중도리에는 생략했다. 처마도리에는 단이를 받쳤는데 전면은 직절이고 후면은 빗절이다. 갓 보는 활꼴로서 끝이 고주머리에 맞춰졌다. 대공은 동자주 모양이고 기둥은 네모꼴인데 모접기를 크게했다. 초석은 덤벙주초이며 댓돌은 막돌 허튼층쌓기 두벌대 높이이다. 지붕은 의외로 우진각이다.
대문간은 맞걸이 8칸 ㄱ자형(전면 6칸)집인데 맨아래(동)에 퇴칸을 두었다. 간살이는 동쪽에 뒷칸을 시설하고, 2칸광, 대문간, 광, 다음은 꺾어지면서 헛간으로 이루어졌다. 가운데 대문칸은 솟을대문으로 하였고 동쪽 지붕은 둘로 나누어서 층단으로 끼웠으며 끝은 우진각으로 처리했다. 서쪽은 중앙을 모임으로 하고 맨 머리는 박공으로 마감했다. 중문칸은 2칸으로서 모두 대문간인데 바로 진입치 못하고 근사(近似)로 꺾어지도록 칸막이를 만들었다. 구조는 맞걸이이며 모임지붕이다.
이 집에는 사랑마당과 안마당에 각기 정원이 꾸며졌는데 특히 사랑마당은 정성껏 만들었다. 향나무, 대나무, 감나무, 전나무, 철쭉 및 정원석들이 짜임새 있게 짜여졌다. 그러나 왜색(倭色) 맛을 지울 수는 없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사랑마당의 석축과 안마당의 석축인데 전자는 다듬돌 바른층 쌓기이고 후자는 자연석 바른층 쌓기로서 후자의 석축기법은 전래의 깊은 맛을 풍긴다.
건물의 배치는 안채가 뒤로 가고 사랑채가 앞에 오는 서남향의 직선축을 썼다. 전면에 사방으로 개방된 바깥마당을 두고 정면에 ㄴ자로 꼬부라진 솟을 대문채를 두었다. 넓은 사랑마당을 가로질러서 한길 이상 높은 축대를 쌓고 뒤쪽으로 당당하게 사랑채를 배치했다. 사랑 앞은 정성들여 만든 정원이고 사랑 서쪽 모퉁이를 돌아 사랑 뒤곁을 지나면 또 다시 두길 높은 축대 위에 중문간채가 자리한다. 이 뒤에 안채가 ㄱ자로 배치되며 안마당 서쪽 맞은편에는 뒤집은 ㄴ자로 별당채가 놓였다. 안채 동쪽은 가사노동공간인 뒤뜰이고 뒤안은 다시 축대를 만들어서 후원(後園)으로 연결된다.
안채는 ㄱ자형집으로서 중부지방식 평면구성을 보인다. 가로칸은 전퇴, 세로칸은 전후퇴(세로칸 동쪽으로 다시 헛기둥을 세워서 반칸을 덧달았으나 이것은 근래에 변형된 부분이다)로 간살이를 해서 맨 남쪽에 2칸부엌을 배치했다. 다음은 복판의 상하 2칸을 큰방으로, 다음은「골마루」, 꺾어져서 3칸대청을 배치했고 맨 끝머리가 작은방(이곳에서는「못방」이라 부름)인데 머릿퇴에 벽장과 굴묵공간을 마련했다. 큰방 앞퇴에서부터 작은방 끝 모퇴까지에는 툇마루를 시설했으며 통행의 편의를 위해 마루가 꺾어지는 곳에는 세모마루를 덧붙였다. 대청과의 사이 대청문은 중부식으로 모두 분합문을 시설했다. 큰방과 골마루 동쪽퇴에는 예전에 모두 골방이 시설되었던 곳이다.
구조는 가로칸을 1고주5량으로 하였다. 도리는 납도리이고 장혀를 받쳤으며 보밑에는 단이를 끼웠다. 대들보는 달걀꼴 단면이고 대공은 사다리꼴이다. 기둥은 전면만 큼직한 두리기둥을 쓰고 나머지는 네모기둥이다. 초석은 대강 네모난 덤벙주초이고 댓돌은 얼추다듬은 한벌대 화강암이다. 지붕은 골기와 합각지붕이다.
별당채 역시 ㄱ자형집으로 뒤쪽을 향해 뒤집어졌다. 간살이는 가로칸 ·세로칸 모두 전퇴를 두고 가로 ·세로의 전퇴와 맨 뒤의 머릿퇴에는 툇마루를 시설했다. 그러나 머릿퇴 부분은 높은 누마루를 만들었다. 전면을 향하는 좌우 2칸에는 샛방을 배치하고 뒤로 꺾어져서 상하 2칸은 대청이며 맨 마지막은 머릿방이 된다. 대청 앞문은 남도식으로 세살문을 해 달았다.
구조는 1고주5량이며 장혀를 받친 납도리집이다. 기둥은 전면 기둥만 두리기둥이며 나머지는 모두 네모기둥이다. 초석은 덤벙주초인데 동남쪽 기둥 2개에만 아주 높은 8각주초이다. 아마 후에 보수한 것으로 보인다. 댓돌은 얼추 다듬은 화강암 외벌대이다.
사랑채는 7칸 一자형 전후퇴집이다. 간살이는 서쪽으로부터(겹으로 배치하여) 앞칸에 약방, 뒷방이 놓이며 다음은(홑으로 배치하여) 복판 좌우2간을 사랑큰방으로, 다음 2칸은 대청, 맨 끝 2칸은 사랑갓방으로 구성하였다. 사랑큰방에서 사랑갓방까지의 앞퇴에는 툇마루가 시설되고 약방 앞에는 쪽마루가 놓였다. 또한 뒷퇴에는 각 칸으로 나누어「다락」(골방)이 설치되었는데 큰방의 웃칸과 갓방의 머리칸을 제외한 나머지 세 곳은 바닥을 마루로 했다. 대청 앞문은 모두 분합문이고 나머지는 겹창으로 만들었다.
구조는 2고주5량이며 납도리집이다. 장혀는 처마도리와 종도리에만 덧대고 중도리에는 생략했다. 처마도리에는 단이를 받쳤는데 전면은 직절이고 후면은 빗절이다. 갓 보는 활꼴로서 끝이 고주머리에 맞춰졌다. 대공은 동자주 모양이고 기둥은 네모꼴인데 모접기를 크게했다. 초석은 덤벙주초이며 댓돌은 막돌 허튼층쌓기 두벌대 높이이다. 지붕은 의외로 우진각이다.
대문간은 맞걸이 8칸 ㄱ자형(전면 6칸)집인데 맨아래(동)에 퇴칸을 두었다. 간살이는 동쪽에 뒷칸을 시설하고, 2칸광, 대문간, 광, 다음은 꺾어지면서 헛간으로 이루어졌다. 가운데 대문칸은 솟을대문으로 하였고 동쪽 지붕은 둘로 나누어서 층단으로 끼웠으며 끝은 우진각으로 처리했다. 서쪽은 중앙을 모임으로 하고 맨 머리는 박공으로 마감했다. 중문칸은 2칸으로서 모두 대문간인데 바로 진입치 못하고 근사(近似)로 꺾어지도록 칸막이를 만들었다. 구조는 맞걸이이며 모임지붕이다.
이 집에는 사랑마당과 안마당에 각기 정원이 꾸며졌는데 특히 사랑마당은 정성껏 만들었다. 향나무, 대나무, 감나무, 전나무, 철쭉 및 정원석들이 짜임새 있게 짜여졌다. 그러나 왜색(倭色) 맛을 지울 수는 없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사랑마당의 석축과 안마당의 석축인데 전자는 다듬돌 바른층 쌓기이고 후자는 자연석 바른층 쌓기로서 후자의 석축기법은 전래의 깊은 맛을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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